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노회 교육부가 주최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미래학자라고 하는 최윤식 박사를 강사로 '침체와 퇴보의 시대에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였다. 강사의 현실 판단과 미래에 대한 예측은 아주 절망적이다 못해 암울했다. 2050년이 되면 한국교회는 300~400만으로 축소할 것이며, 교회의 50%는 사라질 것이고 남아 있는 교회의 90%도 주일학교가 없는 상태가 될 것이며 초고령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의 강연에 의하면 2028년부터 몰락이 시작할 것이며 향후 10년간이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교회를 살려 나갈 수 있을까? 우리에게 고민이 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아쉽게도 강사가 제시한 해법이란 일반론 수준이어서 그의 현실 진단에 비해 미래에 대한 방향 제시는 미흡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게 강사가 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인가는 우리가 우리의 상황에 맞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이지, 강사가 우리에게 먹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이에 대하여 우리가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항상 교회의 몰락은 본질을 상실하는 데서부터 왔다. 복음이 순식간에 유럽으로 퍼져 나갔지만 결국 유럽의 교회들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럽의 교회들이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사라져 버리고, 단순히 교회가 사회적 성공을 위한 사교의 장이 되어 버리고 생활을 하는 데 유익한 도움들을 주는 기관으로 전락해 버렸을 때, 교회는 잠시 부흥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 왔다. 사람들은 복음보다는 빵이 더 시급했고 교회가 빵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느낄 때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그래서 교회는 부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빵을 얻고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더 크고 좋은 빵은 교회보다도 이 세상이 더 많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매력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교회 중심의 사회였던 유럽에서, 심지어 왕도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시대였을 때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회에 들어와 있어야 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교회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던 때였다. 종교개혁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러 면에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교회의 파워는 막강했었다. 사람들은 교회와의 관련 속에서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자동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제는 교회에 가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고,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유럽의 교회는 그래서 텅텅 비어 갔던 것이다. 미국의 교회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고 있으며 한국교회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교회는 정말 놀라운 곳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환등기를 가지고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교회가 유일했었다. 여름 성경학교는 정말 신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교회에 가면 수박이나 과자나 아이스케이크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교회에서 주는 공책과 연필을 가지고 학용품을 마련하기도 했었다. 교회에 와야 이성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문학의 밤은 청춘의 열기를 발산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이 세상보다 교회가 더 좋고 멋있는 빵을 준다고 생각될 때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더 이상 교회가 이 세상보다 더 멋진 것을 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교회에 가면 학생들은 휴대폰을 압수당해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노래를 부르면서 붙잡혀 있어야 한다. 물론 지금도 빵이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 있다. 군대가 그곳이다. 그곳에서는 병사들이 초코파이나 피자를 얻어먹을 수 있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훈련에서 잠시 쉬면서 안식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군대는 여전히 황금어장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과거에 대한 미련 때문에 과거에 했었던 행사들을 다시 교회에서 하면 사람들이 몰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추억의 아이템을 꺼내 놓으면서 사람들을 모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추억의 아이템들에 매료되는 사람들은 과거 시대를 살았던 노년층뿐이다. 미래의 세대들, 다음 세대들은 추억의 아이템이라는 게 정말 싫은 것이다. 과거에 통했던 방법이 현재와 미래에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를 점차 초고령화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고 있다.

스펜서 존슨이 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변의 상황이 변해 가고 있는데 그러한 변화는 눈치채지 못한 채 옛날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우리들을 질타한다. 그 책에서 꼬마 인간들은 어느 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치즈 창고를 보면서 공황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스니프와 스커리라는 생쥐는 상황이 변해 가는 것을 감지하고 새로운 창고를 찾아서 떠난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 이러한 상황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과거에 통했던 방법들을 지금도 쓰면 교회가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유럽이나 미국 교회의 몰락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껍데기뿐인 전통이 본질인 줄 알고 그 껍데기뿐인 전통만 붙잡고 있다가 몰락하였던 것이다. 마크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본질은 변하지 않아야 하지만 형식을 과감하게 바꾸어야 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본질은 흔들리면서 전통만 붙드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교회가 줄 수 있는 것, 아니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도무지 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참된 복음이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한국교회는 복음을 제시함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빵을 제공하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였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전했고, 교회에 가면 병을 나을 수 있다고 하였고, 기도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면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으며, 십일조를 하거나 건축 헌금을 하면 몇 배로 축복을 받는다고 가르쳐 왔다. 적절하게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는 간증들을 섞어 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에게 빵이 절실한 것이 아니다. 병원에 가면 대부분 병을 쉽게 치료받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 돈을 잘 벌기도 하고, 굳이 교회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이 가능함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가짜 복음은 사람들에게 이젠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빵이 절실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교회는 이제라도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본질로 돌아가면서 과거의 방법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해 나가야 한다. 어쩌면 지금은 과거에 썼던 모든 방법들을 포기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역효과만 양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 예전에는 통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본질이 아닌 것들은 강하게 고집하면 할수록 오히려 교회를 무너지게 할 수 있다. 한때 대단한 방법으로 통했던 것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주일학교 교역자들에게 항상 강조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라고 말이다.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왜 나는 내 힘과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지,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가르쳐야 한다. 단순히 설교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활동과 대화 속에서 복음의 원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복음만이 그들이 교회에 있어야 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들이 부모를 따라서 나왔기에 주일학교에 앉아 있고, 약간의 재미와 약간의 유익을 주기 때문에 그곳에 앉아 있겠지만 복음의 맛을 깨닫지 못하면 더 이상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 세대를 위하여 우리는 부단히 투자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교회를 다음 세대를 중심으로 개편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참된 복음의 매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나의 두 딸들은 월남 국수를 너무나도 즐겨 먹는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을 월남 국수 집으로 처음 데리고 갔을 때, 우리 아이들은 너무나도 싫어했었다. 음식점에서 나는 이상야릇한 냄새와 그리고 월남 국수 속에 들어 있는 고수의 맛이 정말 역겨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월남 국수를 결코 먹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점차 맛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어느 음식보다도 좋아하게 되었다. 요즘 페이스북에 아이들이 올리는 음식 사진 중에 월남 국수 사진이 종종 올라온다. 그 사진들을 보니 새삼스럽다. 월남 국수의 맛에 빠지고 나니, 이 아이들이 기회만 되면 월남 국수를 먹으러 다니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죽어도 가기 싫다던 그 월남국수 집으로 말이다.

복음에는 최상의 맛이 있다. 정말 대단한 맛이다. 그 맛의 진가를 보여 주는 것 외에는 복음을 사랑하게 하는 방법은 없다. 전혀 미래에 대한 대책이 아닌 것 같은 이 대책이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를 향한 나의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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