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장을 자주 찾았던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조미선 씨(50)와 마주쳤을 것이다. 그는 광장에 있는 특별법 서명운동대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봉사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 늦은 밤까지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소리를 외쳐가며 서명을 받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을 포함하여 광장에서 상주하는 이들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 광화문 광장에서 3달째 서명 받기 봉사를 하는 조미선 씨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 소속된 교회의 집사인 그는 기도뿐만 아니라 행동에 나섰다. 세월호 현장, 유가족이 있는 곳이 선교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뉴스앤조이 이사라

Excuse me, have you ever heard about Ferry Sewol?

10월 29일 낮 12시 광화문광장, 이날도 여지없이 조미선 씨가 있었다. 그가 외국인에게 목청을 높였다. "Excuse me, have you ever heard about Ferry Sewol?(실례합니다, 세월호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그는 무심하게 서명대를 지나치는 외국인에게 다가서더니, 유창한 영어로 세월호 참사를 설명했다.

그러더니 조미선 씨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서명해 달라는 설득에 성공한 것이었다. 외국인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서명대로 향했다. 조미선 씨는 서명을 마친 외국인에게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노랑 리본 배지를 직접 외국인의 가방에 달아 주었다.

알고 보니 조미선 씨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에 소속된 교회의 집사였다. 젊었을 때, 호주 시드니에서 3년간 선교사 훈련을 받기도 했다. 또 그는 세 딸의 엄마이기도 하다. (딸들은 대학교 1학년, 고등학교 3학년, 중학교 1학년이다.) 더구나 '워킹맘'이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4년째 영어 강사를 하고 있다.

바쁠 만도 한데, 조미선 씨는 3개월째 매일 광장에 나와서 서명 봉사를 하고 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종일 수업이 있는 목요일과 금요일은, 수업을 마친 뒤 8시에 광장에 온다.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10시간이나 성대를 쓰고 왔는데, 지치지 않는다. 광장에 오면 힘찬 목소리가 난다고 한다.

▲ "Excuse me, have you ever heard about Ferry Sewol?" 10월 29일 낮 광화문 광장, 조미선 씨가 외국인에게 목청을 높였다. 그의 설명을 들은 외국인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서명대로 향했다. 그는 서명을 마친 외국인에게 노랑 리본 배지를 가방에 달아 주었다. ⓒ뉴스앤조이 이사라

세월호 유가족, "모든 기독인이 조미선 씨 같았으면"

어느새 세월호 유가족이 조미선 씨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들은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하기야 광장에서 유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 지 3개월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가 서명운동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유가족과 함께하며 광장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는 유가족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한다고 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춥지는 않을지,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이날 아침도 유가족을 위해 집에서 영양 닭죽과 건강 차를 만들어 왔다.

"모든 기독인이 조미선 씨만 같으면 좋겠다" 광화문광장을 지키는 세월호 유가족이 말했다. 광화문광장에 기독인이 모여 몇 차례씩 기도회를 해도 유가족은 늘 아쉬워한다. "기도회도 좋지만, 행동해 달라"고 부탁한다. 제발 일회성 행사로 끝내지 말라고 한다. 지속해서 광장에 나와 빈자리를 채워 달라는 것이다. 광장을 지켜달라는 것이다. 유가족은 조미선 씨를 칭찬했다. 기독인들이 그처럼 현장에 나와 유가족과 함께하며 행동할 수는 없을까 기대했다.

든든한 가족의 지지…자녀도 특별법 서명운동 동참

조미선 씨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중학생, 고등학생 딸들도 서명운동을 했다. 친구들에게 몇 백 장이나 되는 서명을 받아 왔다. 엄마가 세월호 유가족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하는 일로 이해한다고 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안전 사회 건설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동참해야 하는 일이었다. 딸들은 엄마를 이해할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자랑도 한다고 했다.

며칠 전에 집에 갔는데 식탁 위에 라면, 에너지바, 시리얼 등 식사 대용 음식이 한 박스 놓여 있었다. 남편이 사다 놓은 것이었다. 밤에 늦게 오는 엄마를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 조미선 씨가 딸에게 밤에 늦게 들어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자 한 딸이 말했다. "그래도 엄마가 밤에는 오잖아. 괜찮아.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잖아." 조미선 씨는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가족이 든든하다고 했다. 가족이 있어서 힘을 낼 수 있다고 했다.

▲ "모든 기독인이 조미선 씨만 같으면 좋겠다" 광화문광장을 지키는 세월호 유가족이 말했다. 유가족은 기독인들이 조미선 씨처럼 현장에 나와 유가족과 함께하며 행동할 수는 없을까 기대했다. 조미선 씨는 광장에서 유가족이 농성하는 한, 천막이 치워지지 않는 한 유가족과 함께 광장을 지킨다고 했다. (사진 제공 조미선)

무관심한 교회 반응…이제라도 교회가 나서야

젊었을 때부터 다녔던 교회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 부담스럽다고 했다. 언젠가 교회에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이제는 교회가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사람마다 시각이 다 달라서…순수하지 못한 의도와 세력이 섞여 있는 것 같아서…이미 정치화가 되어 버려서…."

또 교회에서 자신에게는 직접 말 못 하고, 장로인 남편에게 "부인이 너무 세월호에 빠진 것은 아니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했다. 조미선 씨에게 "이제는 살아 있는 아이를 돌아보아야 할 때 아니냐. 교회는 정치 집단이 아니다. 기도만 할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교인도 있다고 했다.

조미선 씨는 이제라도 교회가 나서면 1000만 명 서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나서 준다면, 대형 교회에서 나서 준다면 가능하다고 했다. 이제라도 많은 교회가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같이하는 사람이 있지만, 눈에 확연히 드러난 움직임은 여전히 약하다고 했다.

"세월호 현장, 유가족이 있는 곳이 선교지"

조미선 씨는 세월호 현장이 선교지라고 했다. 유가족이 있는 곳이 바로 선교지라고 했다. 팽목항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4월 16일, 텔레비전에서 아이들이 수장되는 참사를 지켜봤다.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멘붕' 상태로 집에서 울며 기도만 했었다. 그러다 5월 초, 자원봉사자가 줄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1박 2일로 자원봉사를 신청하고 남편과 진도에 내려갔다. 팽목항 땅을 밟으며 기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미선 씨는 5월 23일, 진도에 내려갔던 날짜를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다음 날 단원고 학생 한 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검안소에 배정을 받았다. 남편과 검안소를 지키던 조 씨는 다음 날 새벽, 2학년 8반의 고 조찬민 군을 찬민 군의 어머니와 함께 보게 되었다.

바다에서 발견된 고 조찬민 군이 검안소에 오기까지는 1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조미선 씨는 찬민 군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 찬민 군 어머니는 진도에 내려와 있는 동안 기도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교회 연합 부스가 있어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가지 않았다고 했다. 조미선 씨는 기독교 부스가 유가족 내부에서 큰 영향력이 없어 보였다고 했다.

그는 깨달았다. '사랑이 필요한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그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세월호 유가족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해외 선교에만 늘 관심을 가져왔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바로 여기 세월호 현장이 선교지라고 보여 주신 것 같았다. '세월호 현장, 유가족이 있는 곳이 선교지다.' 기도뿐만 아니라, 앞장서 행동해야겠다고 결단했다.

11월 7일 '세월호 3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가족은 자신들의 요구가 모두 수용되지 않아 못내 아쉬워했다. 이제 청운동주민센터, 국회 앞에서 농성하던 유가족이 모두 철수했다. 남은 곳은 광화문광장뿐이다. 조미선 씨는 광장에서 유가족이 농성하는 한, 천막이 치워지지 않는 한 계속 광장에 나오겠다고 했다.

조미선 씨는 세상과 나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교감하며 사는 삶이 중요하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세상에서 약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 선교라고 했다. 그는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단기 선교'라며, "이번 단기 선교는 조금 길어질 것 같다"고 했다.

다음은 조미선 씨가 10월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시한 글.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기독인이 세 부류인 것 같다.

1. 고통 받는 유가족들 편에 서서 목숨 건 동조 단식을 하며 슬픔을 함께 나누는 소수의 기독인.
2. 하나님과 박근혜 대통령을 동급에 올려놓고 유가족과 봉사자를 깎아내리고 모욕하는 극우 기독인. 그들은 매일 광화문농성장 길 건너편에 등장한다. 광장을 향해 서서 한 손에는 십자가, 한 손에는 태극기를 흔들며, 찬송가와 애국가를 번갈아 부른다. 또한, 광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애국 및 종북 빨갱이 퇴진을 외치고 있다.
3. 초기에는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모르쇠의 일관적 자세를 취하며 침묵 중인 다수의 기독인.

알아 버렸다. 한국교회의 이런 모습이 비단 세월호 참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주류 기독교는 늘 약자의 편이 아닌 강자의 편이었던 것 같다.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는 비겁함을 보이면서, 뒤로는 정권에 아부하고 눈치를 보며 돈과 권력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광화문에서 체감하는 기독인에 대한 일반 시민의 온도는 정말 싸늘하다. 매일 광장 맞은편에 있는 극우 교회의 횡포에 인해 사람들은 기독교에 진절머리를 낸다. 대놓고 '개독'이라 부른다.

놀랐다. 이 정부가 하는 말과 똑같아서. 불의에 대한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저항을 정권과 똑같이 색깔론과 같은 이념 논쟁으로 몰아세운다. 대통령과 그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일을 마치 하나님을 비판하는 일 인양 화들짝 놀라고 발끈하는 이 종교계에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교회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이 억울한 죽음 앞에 무엇을 했나. 입을 꽉 다물었다. 교회가 침묵하는 동안,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는 투사가 되고 좌파가 되고 사회 혼란을 유발하는 범죄자가 되어 버렸다. 이 비정한 국가로부터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우리는 이들의 부모 역시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날마다 광화문에서 마음이 참담하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