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마다 운동으로 걷기 시작한 지 벌써 수개월이다. 우리 부부의 산책의 반환점에 총신대학원이 있다. 집을 출발해 농로를 따라 마을을 가로질러 평창리와 제일리를 지나서 제일초등학교 앞길을 넘어서면 총신대학원으로 가는 길이 나선다. 이때쯤이면 등줄기에서 더운 땀 기운이 느껴지고 가끔씩 깊은 숨을 몰아쉰다. 어떤 날은 유난히 이 언덕을 오르는 마지막 여정이 힘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였을까? 이런 플래카드를 보았다.

"충성심, 자기중심적 권력은 이제 내려놓으십시오!"

나는 그 플래카드의 글귀를 보는 순간, 거친 호흡 가운데서도 숨통이 탁 트이는 듯한 시원함에 탄성이 나옴을 느꼈다. '저런 신선한 말이, 이 가을 신학교 교정에 걸려서 나부끼고 있다니!' 아내에게 저것 좀 보라고 손짓을 했다. 아내는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나름대로 주석까지 붙였던 것이었다.

충성심이란 당연히 하나님을 위한 충성심을 뜻하는 것일 테니,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빙자한 자기중심적 권력은 이제 내려놓으라는 것이렷다. 신학생들의 선언치곤 얼마나 신선한 것인가! 충성이라 하면 모름지기 신학생 시절만큼 충성심에 불타오르는 젊음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순결한 충성심이 어떻게 자기중심적 권력으로 변질되는 것인가? 목회자들이 자신의 충성심을 빙자하여 자기중심적 권력욕을 정당화시켜 나간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나에게는 이러한 충성심이 있으니 내가 하는 말들은 다 정당하다. 누구 나보다 더 충성심이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위하여 불철주야로 헌신하고 있는가" 등등등…. 그런 자기중심적 권력 지향을 충성심으로 포장하는 일일랑 그만두라는 말이렷다. 신학교에서 보는 플래카드로서는 참으로 생동감 넘치는 것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총신대를 올라갔을 때 -오늘은 일찍 출발했던 터라 아직 날이 어둡지 않았다- 내가 읽은 글귀가 내 눈의 착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작인즉 이랬다.

"총장님, 자기중심적 권력은 이제 내려놓으십시오."

'총장님'을 '충성심'으로 잘못 읽은 것이었다. 허 참!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던가. 내 마음의 빨랐던 반응이 일순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총장님이나 충성심이나 그 말이 그 말일 수도 있겠다 싶긴 했지만, 아니다. 그 말은 너무도 다른 말이다 싶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총신대 총창 선거는 지금껏 수차례나 무산되었다.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한 번은 두 후보가 증인까지 내세워 서로 적은 표를 얻은 사람이 후보를 사퇴하기로 맹세까지 했지만, 진 사람이 맹세를 깨는 바람에 여전히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은 맹세까지 하고도 후보 사퇴를 하지 않는 저 사람은 총장이 될 수 없다 하고, 한 사람은 자신은 사퇴하려 했으나 지지자들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방식이라 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한다. 결국 현 총장을 연임하는 것으로 신임 총장 선거를 포기하려 한다는데…. 학생들은 이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래서 나온 플래카드가 "총장님, 자기중심적 권력은 이제 내려놓으십시오"다.

나는 "충성심이라는 자기중심적 권력은 내려놓아야 한다고 쓸 수 있는 신학교와 학생들이 있는 한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다"고 아내에게 했던 말을 도로 주워 담아야 했다. 근원적인 데서 나오지 않는 말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하나의 입장을 더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으론 어리석은 정치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이다.

"충성심, 자기중심적 권력은 내려놓아야 한다."

* 이 글은 옛날(2008. 11. 07)에 쓴 것이다. 그러나 2014년 현재까지도 현재적이다. 총신대와 총신대학원 학생들이 길자연 총장과 김영우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총신대에서는 개혁주의 장례식까지 열렸다. 문제의 장본인들은 학교에 나타나지도 않고 있다고 한다. 다시 플래카드를 바꾸어야 할까? 아니다. 본래 그것이었으니 바꿀 필요는 없겠다. 종교개혁 497년. 개혁주의 장례식이 개혁의 부활로 번져 가기를. 하나님의 권위는 권력에 기댄 권위자가 '권위 없는 자처럼' 겸손히 자기를 낮출 때 충만한 은혜로 드러난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3:11)."

부디 두 목사님들은 신학생 시절의 순결한 충성심을 기억하고 돌이키시기를 기대해 본다. 잘못은 인정하고 회개하고 고치면 되지만, 이제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부끄러움 앞에 정직하지 못하면 그 마지막은 사망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의 사망을 우리는 작금 도처에서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엔 정신이지만 그 다음엔 무엇이 올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죄일 것이다. 신학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충성심과 자기중심의 권력 사이에 방황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신학교의 권위를 보여 주시라. 나 같은 사람이라도 안다. 가진 것을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러나 오늘날 용퇴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 바로 그 일을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내려놓아야 할 사명을 내려놓는 것도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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