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은 겁쟁이다."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탁월한 작품 <웨이크필드의 목사>에 나오는 말이다.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양심이란 것은 자신이 막아 낼 힘이 없는 그런 과오에 대해서는 감히 정의의 비난을 퍼붓지 못하는 법이니까 말이요."

▲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 변증> /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전의우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 펴냄 / 340쪽 / 1만 8000원

양심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에 작동하는 정의와 공의의 원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양심은 겁쟁이다. 양심은 공의를 갈망하지만 힘이 없다. 자기 합리화의 폭군 앞에 철저히 무능하다. 자기 합리화의 결론은 '어쩔 수 없었다'이다.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상황 논리에 지배당하는 자신의 무능을 옹호한다. 자기 합리화는 생각보다 강하고 철저한 이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폭군이다. 변증은 자기 합리화의 폭군에게 억압당하는 양심을 깨우는 작업이다. 양심이 지배할 때는 그는 일말의 인간성을 보장받게 된다. 영혼의 양심을 깨우는 변증은 방법론이 아닌 여정이다.

복음주의 지성으로 불리는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간이 출간되었다. 원제는 'Mere Aplogetics'인데, 한국 상황을 고려해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기독교 변증>으로 정했다. Mere는 번역하기에 모호하다. '겨우', '불과'의 뜻도 있고, '단지 ~만으로'란 뜻도 있다. 후자의 경우 단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후자의 뜻으로 사용한 듯싶다. 그렇다면 충분한 변증 정도로 번역 가능하다. 아니면 부차적 의미인 '단순한', '순전한' 뜻일 수도 있다.

책의 부제를 '구도자들과 희의자들이 진리를 찾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가'로 정했다. 변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는 방법론이다. 인간의 내면에 잠들고 억압당하는 양심을 깨우고 자기 합리화의 벽을 부술 수 있는가를 다룬다. 변증을 넘어 설교와 대화의 영역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설교자와 전도자, 소그룹 인도자들에게도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석학(碩學)이 말하는 변증의 방법론은 뭘까?

"변증학은 소통을 독려한다(14쪽)." 머리말에서 강조한 말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변증학은 기독교의 진리를 불신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제하는 것이었다. 변증에 대한 그릇된 생각은 무례한 기독교를 양산했고, 그것을 옹호하는 무뇌(腦)한 설교자들로 인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맥그래스는 '변증학을 세상에 맞서는 방어적이고 적대적인 반말'로 보면 안 되고,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보물 상자를 열어젖힐 좋은 기회(15쪽)'로 여기라고 한다.

9장으로 구분했다. 1장에서는 변증학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2장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변증학의 위치를 찾는다. 3장에서는 변증의 신학적 기초를 탐색하고, 4장에서는 변증의 대상인 '청중'에게 접근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사도 바울의 전도 설교를 통해 배운다. 5장부터 7장까지는 변증의 방법론을 철학(5장)과 우주론(6장)과 설명, 논증, 이야기 이미지(7장)를 통해 접근한다. 8장에서는 실존적 질문을 심층적(深層的)으로 다루는데, 예를 들어 "왜 하나님은 고통을 허락하시는가"와 "하나님은 목발에 지나지 않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간다. 9장에서는 결론으로 자신에게 적합한 변증의 방법을 찾고 훈련하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변증에 대한 맥그래스의 관점(觀點)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변증은 '변호'와 '공격'에 가까웠다. 이성적 차가운 논리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격을 막는 폐쇄적이고 전투적 성향이 강했다. 자세하게 설명했으니 믿고 싶으면 믿고 말라면 말라는 막가파식의 변증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람은 전혀 만나지 못했다(132쪽)"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18세기 부흥 운동의 주역이자 탁월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조차 '합리적 증거가 논증에 기대어 기독교의 진리에 동의'하게 할 수는 있었으나 회심이나 "진정한 믿음으로 이어지게 할 수는 없다(132쪽)"고 말한다. 변증학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답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며, '우리와 문화를 잇는 다리' 놓음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세상이 이해하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다. (37쪽)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와 사람들을 잇는 중매쟁이라고 말한 것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2장에서 맥그래스는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변증의 6단계를 알려 준다. 1. 신앙을 이해하라. 2. 청중을 이해하라. 3. 명쾌하게 전달하라. 4. 접촉점을 찾아라. 5.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라. 6. 실천하고 실천하고 실천하라. 변증학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끌어오는 '기교'도 아니고, 증에서 이기려고 '고안된 논증 기법'이 아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시선을 향하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려는 '의지'라고 말한다. (69쪽) 의지는 행위이며, 마음의 표시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이 알아듣도록 몸부림치는 것이다. 저자는 변증학을 '하나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그리스도를 보도록 창문을 열어 주는 것'으로 표현한다. 마치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 예수를 설명하지 않고, '인도'한 것처럼 변증은 세상으로 하여금 직접 하나님을 만나도록 돕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직접 빌리면, "예수님을 위해 논쟁하지 않고, 상대방을 예수께로 향하게 한다." (74쪽) 이것으로 우리는 변증학이 상아탑에 갇힌 이론이 아닌 삶을 요구하고 있음을 안다. 삶이 결여된 변증학은 온전할 수 없다. 무례한 변증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건너편이 아무리 좋아도 다리가 허물어져 있다면 건널 수 없는 이치와 동일하다.

결국 변증학은 관계의 문제다. 소통을 통한 참만남으로 진리가 세상으로 무난하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변증학이 신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면, 맥그래스의 변증학은 변증자의 성품과 인격의 문제를 더 크게 본다. 이것은 참으로 옳은 것이며,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지혜로운 자세이다. 청중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변증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다. 상대가 무례하게 대하고, 의도적인 공격을 한다고 할지라도 변증자는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보여 줘야 한다"고 일러 준다. (273쪽) 또한 질문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질문 뒤에 숨은 질문'을 찾아내야 한다.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자신이 고통 속에 있다고 하소연하는지를 간파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인에게 '지적인 대답이 아니라 실존적 대답'을 기대한다. (274쪽)

자기 합리화의 폭군에게 억압당하는 양심을 깨우는 것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다. 친절한 변증자의 입술이다. 변증학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삶의 여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철학 강의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그는 동정과 이해를 원한다. 지적인 대답이 아니라 실존적 대답을 원한다. 인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재확인시켜 주는 대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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