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체로 부차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사 시대 드보라의 경우를 제외하면 구약시대의 여성들은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되기 십상이다. 중심에 서지 못하고 변두리에 머물러 있다. 이야기 자체도 그렇지만, 성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해석은 남성들의 관점에서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일까?

성경 본문의 주된 해석자들과 설교자들이 여성보다 남성들이 많은 이유에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해설되는 경우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등장인물들 중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는 여성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욥의 아내다. 남성이 주류를 점하는 주일 설교 강단에서 가차 없이 난도질당하는 욥의 아내를 향한 평가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어거스틴은 욥의 아내를 '마귀를 돕는 배필', 칼뱅은 '사탄의 도구'라고 했던 발언이 교회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흘러 온 셈이다. 누군가는 '21세기는 여성의 세기'요, 여성의 세기가 도래할 것이라 말했지만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에서는 요원한 말이다. 제법 큰 교회의 중년을 넘긴 어느 남성 목회자는 욥의 아내를 세계 3대 악처(욥, 소크라테스, 존 웨슬리의 아내)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러한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어거스틴과 칼뱅의 권위와 영향력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욥의 아내는 그렇게까지 혹독한 비난을 받아야만 할까?

그녀가 했던 말은 딱 두 마디 말, "그래도 자기 온전함을 굳게 지키겠는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3:9)." 욥과 그녀의 말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이 두 마디 말만으로 평가한다면 악처라는 별명을 얻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욥의 아내에 대한 평가는 욥과 그의 아내가 나눈 대화의 맥락과 책 전체가 의도하는 메시지에 비추어 읽고 면밀히 짚어 봐야 공정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1.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신앙의 사람 욥. 아주 먼 옛날 우스 땅에 살았던 욥

우스 땅의 위치는 에돔과 하란 지역 어디쯤으로 추측하지만(창 36:28, 렘 25:19~21, 애 4:21) 어디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이스라엘 밖의 땅이다. 욥은 그저 우스의 시민이었다. 그는 '흠이 없고' '곧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악에서 떠난 자였다. (1:1) 여호와는 욥에게 욥기의 저자가 했던 평가에 덧붙여 "이 땅에 그와 같은 자가 없다(1:8)"고까지 극찬하신다.

6세기의 예언자 에스겔 역시 노아와 다니엘과 욥의 의로움을 기억한다(겔 14:14, 20).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고(1:2),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와 암나귀가 각각 오백 마리나 있고, 종을 많이 거느린 동방의 으뜸가는 부자였다(3절).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엄청난 재산가였다. 욥이 얼마나 부자였던지 생일마다 그의 아들들은 잔치를 열어 먹고 마신다(1:4). 욥은 자신의 경건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잔치가 끝나면 이른 아침 자녀들의 숫자만큼 일일이 번제를 드렸다. 이유는 자신의 자녀들이 혹시 범했을지도 모를 죄와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저주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11:5). 자녀들의 감추어진 죄의 가능성까지 염려하는 신실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욥의 경건이 너무 지나쳐 강박적 증세를 가진 사람이 아닌가 할 정도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날벼락 같은 재난과 고통은 그의 완벽한 삶에 균열을 일으킨다. 땅에 사는 욥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우주적 차원의 일들이 하늘 위에서 벌어진다. 하나님이 주재하는 하늘 회의에서 '고발자' 사탄으로부터 제기된 질문은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였다. 사탄은 영리하고, 교활하다. 사탄은 마음의 동기를 문제 삼는다. 사탄은 "당신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틀림없이 당신 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11절)"고 단언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허용하되, 욥의 몸만은 손대지 말라는 조건을 주고, 사탄의 도발을 허용하신다(1:12). 충실한 종을 고통 받게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자기를 향한 욥의 섬김과 사랑이 진정한 자발성에서 조건 없이 비롯된 것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 욥 사이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견고한가를 보여 준 장면이다.

어느 날 욥의 자녀들이 큰아들 집에서 잔치를 즐기고 있을 때, 동시다발적인 재앙들이 발생한다. 네 가지 경건의 표상과 동일한 횟수로 네 가지 재앙이 일어난다. 이 재앙들의 형태는, 두 차례의 강도떼 약탈과 두 가지의 기상 현상에 따른 것이다. 삽시간에 연속적으로 욥은 하나님이 그동안 주셨던 실제적인 복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스바 사람들(참조, 창 25:3)이 욥의 황소와 나귀를 훔쳐가고, 종들을 죽였으며(1:14~15), 이후에는 북동쪽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사람들이 낙타를 약탈하고, 종들을 죽였다(1:17). 번개('하나님의 불')로 욥의 양떼와 종들이 죽고(1:16), 큰 바람이 불어와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집을 덮쳐 그들이 죽게 된다(1:18~19). 번개 때문에 양 7000마리와 그것들을 돌보는 목동들이 모두 죽었다.

신속하게 일어난 일련의 재앙들에 대해 욥의 반응은 분명했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죽은 자들을 위해 애곡 의식을 행한다. 욥은 슬픔의 표시로 겉옷을 찢고(참조. 창 37:34), 머리털을 밀어 버린다(참조. 사 15:2, 렘 7:29). 겉옷을 찢는 행위는 애도 의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창 37:29, 수 7:6, 삼하 13:19, 레 10:6), 거룩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머리털을 미는 행위는 레위기 법이 금지하고 있다(레 9:26, 신 14:1). 그럼에도 고대 사회의 풍습에서는 옷을 찢는 행위처럼 머리털을 미는 행위는 흔하다(사 15:2, 22:12, 렘 7:29, 16:6, 41:5, 47:5, 겔 7:18, 암 8:10).

이러한 고대 사회의 의식은 살아 있는 자가 자신을 죽은 자와 동일시하는 표시로서 충동적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준비 과정과 다소 긴 활동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서 그는 땅에 엎드려 경배한다(1:20). 욥이 고통 중에서도 정돈된 모습을 보여 주었고, 그의 믿음은 고통에 의해 붕괴되지도 침식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그리고 너무도 유명한 고백, "주신 이도 주님이시고, 취하신 이도 주님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21절)"라는 말로 그는 고통의 본능을 누르는 흔들림 없는 균형 감각을 보여 주었다. 하늘 회의에서 사탄에 의해 제기된 욥의 경건한 신앙에 대한 문제는 해소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 사탄은 욥에 대한 고발을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이 승인하시는 욥의 흔들림 없는 신앙은 사탄의 완전한 동의로 끝나지 않았고, 사탄의 공격 수위는 훨씬 더 강화된다. 사탄은 욥의 뼈와 살을 칠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여호와를 저주할 것이라는 확신한다(2:4). 하나님은 욥의 생명만은 해하지 말라는 조건과 함께 그의 두 번째 도발적 제안을 수용하신다(6절). 욥의 몸을 치는 사탄의 공격은 강력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욥의 온몸에 종기가 나고, 극심한 가려움이 그를 괴롭혔다(2:7~8). 무슨 질병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심각한 피부병이다. 진물이 흐르는 상처, 심각한 부스럼, 통증이 있는 상처, 피부가 벗겨지고 검어지고(참조. 13:18~20, 30:30), 고름에 번식하는 구더기들까지(참조. 7:5) 참으로 처참한 상황이다. 그의 혹독한 피부병 때문에 명예도 잃었다.

그는 '재 가운데 앉아서' 그러니까 도시 밖 오물더미 위에서 질그릇 조각으로 온몸을 긁고 있다(2:8). 도시의 화덕에서 남겨진 잿더미와 깨진 항아리들이 나뒹구는 곳에 앉았다.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상태다. 그의 안락했던 삶과 신앙적 품위를 유지했던 삶에 의문을 갖게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랬던 사실조차 망각시킬 정도다. 욥은 말이 없다. 이후 기대되는 장면은 하늘 회의의 장면이어야 한다. 그러나 하늘은 닫혔다. 하늘은 말이 없다. 침묵의 상황에서 욥의 아내가 처음으로 입을 뗀다.

2. 욥의 아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킬 것인가? 욥에게 견디기 어려운 극도의 고통 가운데서도 지상의 가장 큰 위로는 아내일 것이다. 그의 온 생애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과 일상의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나누는 아내의 위로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 그런데 욥에게 돕는 배필이어야 할 아내의 말은 의외였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이어야 할 아내는 "이래도 온전함을 굳게 지킬 것인가요?(2:9)" 질문한다.

누가 들어도 경건함을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동시에 욥의 경건함을 인정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말이다. 경건한 남편을 향한 그녀의 충고는 아주 간결하고 결정적이다. "이래도 당신의 온전함을 지킬 것인가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9절)." 그녀의 말은 고대와 현대의 주석가들로 하여금 고군분투하도록 만들었다. 욥기에서 듣는 욥의 아내가 말한 첫 마디이자 유일한 말이다. 하나님은 욥의 온전함이 자랑거리였지만, 욥의 아내는 현실의 벽 앞에서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부가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본문에서 욥의 아내의 반응은 생략되었다. 그러나 욥의 아내가 자기 남편이 악창으로 인한 심한 피부병 때문에 고통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는 달랐다.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고도 침묵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겨우 한마디를 했건만! 이 말 때문에 욥의 아내는 수많은 성경의 해석자들에게 엄청난 비난과 욕을 들어야 했다. 욥의 아내는 악명 높은 여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곰곰이 묻고 생각해 볼 일이다. 본문은 욥의 아내가 한 말에 대한 맥락을 생략한다. 그녀의 한마디 말만 기록할 뿐이다. 이 한마디 말로 그녀의 모든 것을 평가해야 할까?

욥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욥의 아내 역시 남편 못지않게 고통스럽지 않았겠는가. 침묵했지만, 남편의 모진 통증과 괴로움 앞에서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욥의 아내는 충격적이며 격한 방식으로 같은 고통을 느끼며 남편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개역개정, 욕하고 죽으라)"는 말은 그녀의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솔직한 표현인 셈이다. 필사적으로 자기 남편의 고통이 끝나기를 열망하는 아내는 남편의 극심한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모두 죽은 상황에서 남편의 고통은 곧 자신의 고통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여러 해석자들은 욥의 아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이 원하는 주장(1:11, 2:5)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이 그녀에게 붙인 별명처럼, 그녀는 '마귀를 돕는 배필'이나 '사탄의 하녀'쯤으로 생각한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하틀리(J. Heartley)는 욥의 아내가 하나님에게 둔 인간의 믿음에 대한 사탄의 의심을 땅 위에서 메아리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욥의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보다 쉬운 방법을 택하라는 유혹자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읽은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요구로 하나님이 욥의 뼈와 살을 치셨을 때(2:5), 욥의 아내의 뼈와 살도 해를 입은 거나 다름없다. 욥의 아내가 욥처럼 몸소 육체적인 같은 고통을 당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었고, 재산을 잃었다. 그녀의 상실감과 혼란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욥의 아내가 살았던 시대는 남편의 안녕은 곧 아내의 안녕이다. 그럼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성경의 독자들이 그녀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고, 주변화 시키는 것은 아닌가? 욥의 아내가 했던 말의 의도는, 하나님께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죽는 게 낫지 않겠냐는 욥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깊이를 격하게 표현한 것은 아닌가? 더구나 본문 이야기의 중심은 욥의 아내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도하게 그녀를 비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욥의 아내의 말은 하나님을 욕하지(저주하지) 않으려는 욥의 순전함에 대한 도전적인 발언이지만, 동시에 모호한 말이다.

'욕하다'(개역개정), '저주하다'라는 히브리말은 원래 ‘축복하다'(바라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어휘가 강조능동형(piel)에서만 '저주하다'라는 완곡어법으로 사용된다. 이 동사는 하나님을 주어가 아닌 목적어로 사용할 경우, '찬미하다'라는 뜻이 된다. 그 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하고(piel 명령형) 죽어요!"라고 읽는 것도 가능하다. 어쩌면 그녀가 이중의 메시지를 남편 욥에게 건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을 찬미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저주하든지 선택지를 준 것이다.

욥의 아내는 자기 남편이 그토록 순전했건만!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를 묻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한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욥이 하나님을 저주한다면 그는 죽어야 한다(참조. 레 24:10~16). 욥의 아내는 자기 남편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가능성까지 생각하며 말한다. 욥의 아내야말로 욥이 하나님 앞에 서도록 도전적인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남편을 향한 연민은 '온전한'(2:9) 남편을 잔인하게 다루듯 보이는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반응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욥의 아내는 새로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다. 그녀의 유일한 말은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사심 없는 경건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극한 것이나 다름없다.

놀랍게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욥은 스스로 죽음을 갈망하며(3:20~21),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불의한 자의 번성과 결백한 자의 고통의 현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친구들과 치열한 논쟁을 이어 간다. 욥에게 닥친 재앙과 고통에 대해 일관되게 기계적인 보응 신학으로 설명하려는 친구들을 설득하기까지 한다(3~31장). 욥은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상황을 직면하며, 회피하지 않고 세상의 선과 악에 대한 관찰들을 거침없이 쏟아 놓았다.

욥은 탄식과 절망을 넘나들며 친구들이 말했던 행위 화복의 원리가 세상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경악했다. 악인이 당장 처벌받지 않는 세계의 현상은 욥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없이 악에 놀랄 뿐 아니라, 악이 공정하게 처벌받지 않고, 연기되는 것에 놀란다. 그러나 돌이켜 곰곰이 생각하면 세상의 악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예수님은 빛이 어둠 속에서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 말씀하셨다. 그 때문에 욥기는 전통 신학의 딜레마를 말해 주는 책이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만의 안전한 신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렀다. 그 때문에 절규하는 욥의 고통에 다가서지 못했다.

욥과 친구들은 격렬하게 많은 말을 나누었지만,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잃은 친구들 역시 안전한 신학의 막다른 골목에 처해진다. 반면에 욥의 아내는 욥으로 하여금 솔직한 항변을 쏟아내게 만드는 도구가 된 셈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욥의 아내가 던진 한마디 말에 경악하며 악처로 치부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크리스토퍼 에쉬는 욥의 아내의 말을 "바보나 할 법한 것"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1~2장의 프롤로그와 하나님과의 만남(38~41장), 그리고 에필로그(42장)를 제외한 나머지의 길고 긴 논쟁(3~31장)은 사실상 악인이 왜 번성하는지, 왜 의인이 고통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욥의 절규이며, 이 질문에 대한 친구들의 반복된 답변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은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칼뱅이 말했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강조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분의 비밀스러운 목적들을 생각할 기회를 준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욥기에서의 고통의 문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욥기는 보다 큰 틀에서 인간 지혜의 한계와 하나님의 신비,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더 많이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 첫 머리에 밝힌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고 다만 무엇이 아닌지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결국 우리의 신학적 사고는 신비에 관한 것임을 전제해야 하고, 성경을 읽으며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욥의 아내는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 앞에서 자기 남편이-정직하고 온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지만-때로는 분열하며 저항하고 질문하는 신앙을 갖도록, 그리고 전통 신학에 안주하지 않도록 도전하는 도구였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이 주재하는 하늘 회의에서 사탄이 했던 역할을 땅에서 대신하는 욥의 믿음을 시험하는 사탄의 도구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가 욥의 아내에게 붙여 준 3대 악처 중 하나라는 별명은 이제 거두어들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참고 문헌]

데이빗 클라인즈, <욥기1-20>WBC(서울: 솔로몬, 2006) 제랄드 젠슨, <욥기> 현대성서주석, 한진희 역(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크리스토퍼 에쉬, <욥기> 전의우 역(서울: 성서유니온, 2014) John Heartley, The Book of Job (Grand Rapids: Eerdmans, 1988) F. Rachel Magdalene, "Job's Wife as Hero: A Feministic-Forensic Reading of the Book of Job," Biblical Interpretation 14 (2006), 209-258.

김순영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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