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대한 구조적 대안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르치신 목적은 이웃의 의미가 무차별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확장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것은 모든 인류가 신성한 교제의 끈으로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칼빈이 설교할 때 부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칼빈은 어떤 설교에서 매점매석, 독점하는 자들을 향하여 "살인자, 사나운 짐승, 가난한 자를 물어뜯고 삼키는 자, 가난한 자의 피를 빨아먹는 자"라고 비난했고 또 "유산 때문이건, 자기 사업과 노력으로 부자가 되었건 부자들이 먹고 남는 것이 무절제나 사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에 쓰게 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우리가 사회를 한 뼘의 쌓아 놓은 영혼의 더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공동체로 살아가는 유기체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난이라는 질병의 치료책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요, 돈주의요 승자 독식 시스템이다. 자본주의 밑바탕에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뿌리박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인간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다. 그 결과로 인간을 1차원적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인간은 공급과 수요의 원칙에 의해 돌아가며,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고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자본주의 체계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결코 좁힐 수 없는 차이를 보여 왔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큰 격차를 만들어 냈다(르네 빠딜라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자본주의는 도둑의 논리다. 약육강식이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그 저변에는 무신론이 똬리를 틀고 있다.

한국교회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오해가 많다. 마치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이었다고 주장한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책에서 명백히 밝힌 것처럼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은…종교개혁의 어떤 영향의 결과가 아니면 형성될 수 없었다거나,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종교개혁이 창조해 냈다는 어리석고 공론적인 명제를 주장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만 둘 사이에 '결합하기 쉬운 유사점'이 어느 정도 있어서 자본주의 정신이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그리스도인 경제사학자인 리처드 토니는 자신의 저서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에서 그 관계를 좀 더 세밀하게 밝혔다. 베버는 상업 및 산업자본주의시대를 배경으로 연구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 시대의 자본주의는 오늘의 자본주의보다는 상대적으로 건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핵심의 한 축이라 할 수 있었던 근면, 절제, 검소와 자본주의 정신이 서로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 것이다. 그러기에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오늘의 금융자본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이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데 소수가 과식하는 것은 악마적인 구조"라 하였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방 '빨갱이'로 몰렸을 것이다. 지금은 '종북'으로 매도당하거나 '좌빨'이라는 혐오스러운 이름을 얻기 십상이다. 우리는 참으로 무지하고 숨 막히는 비성경적 사회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 어떤 부자가 한 가난한 사람이 배고파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목도했다고 보자. 그를 살려 낼 풍부한 자원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탐욕과 무정함 때문에 그가 죽도록 방관한다면 이는 끔찍한 죄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에게 부여하신 권리를 고의적으로 짓밟는 것이기에 죽어 가는 자들을 직접 신체적으로 공격한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정말 슬픈 것은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무정한 한국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지켜 내는 사회 정의를 외면한 채 자신의 기득권 강화에 몰두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에서 자본주의만큼 창조적이며 동시에 파괴적인 독특한 능력을 부여받은 것은 없다. 최근 우리 나라도 가계 부채가 1000조가 넘었다. 돌이켜 보면 열심히 살아오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자꾸 빚은 늘어만 가는 것일까? 교회 1년 예산이 10억인데 빚이 30억이라고 생각해 보라. 이것이 교회가 바로 자본주의를 알아야 할 이유다.

2011년 9월 젊은 청년들이 뉴욕 증권거래소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침낭과 텐트까지 준비한 그들은 노숙을 하면서 시위를 했다. 처음에는 이들의 시위가 그저 사회로부터 소외된 청년들이 불평과 불만을 표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이들의 시위는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의 큰 파급력을 지니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만 900여개의 도시, 전 세계 80여개의 나라, 1500여개의 도시에서, 서울에서도 동일한 구호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가정 주부, 학생, 회사원, 교수, 일용 근로자, 예술인 등 직업과 신분의 차이를 넘어 그들이 함께 외쳤던 것은 무엇일까?

전 세계 1%가 99%의 부를 장악하고 있으며, 나머지 99%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삶의 희망을 잃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으며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있다! 임마누엘 월러스타인 예일대학 석좌교수는 이 시위를 두고, '현대 자본주의의 몰락'이라고 표현했다.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해 처했다는 사실은 일부 좌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말대로 "자본주의는 부채 경제이며 우리들을 평생 부채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크리스티안 마라찌, <금융자본주의의 폭력>).

미국은 자신이 망할 때까지도 갚을 수 없는 빚을 가지고 있다. 70년대에는 세계 경제의 실물 자본 대 금융 자본 비율이 90:10이었던 것이 오늘날은 10:90으로 역전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와 같이 오늘의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가 아닌 금융자본주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 자본주의를 잘 모른다고 해서 오늘 당장 내생계의 위협을 받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미래는 자본주의의 엄청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우리의 지갑 속, 돈과 통장, 우리가 가입한 금융 상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가격, 매달 갚는 대출금과 이자,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우리의 일상생활, 말하자면 경제활동의 미세한 모세혈관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금융자본주의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원래 서유럽 즉 영국과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해서 16-17세기경에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했다. 상업과 산업 활동에 대한 긍정적 태도,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 영국의 석탄 매장 패턴, 새로운 과학의 태동으로 가능해진 새로운 기술의 발전 등 다양한 원인들이 제시되어 왔다. 18세기엔 방직, 제철 그리고 화학 등의 산업 분야에서 기계화된 생산 체계가 가능해지기 시작했고 1820-70년 사이에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는 급속히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는 자원 확보와 시장 개척을 위한 제국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렇게 고속 주행하던 자본주의는 1, 2차 세계대전과 그 사이의 대공황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파란을 겪게 된다.

하지만 1945년 즈음부터 산업자본주의는 다시 대약진을 하게 된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무렵 미국을 중심으로 44개 연합국 대표가 미국 뉴헴프셔 주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에 모여 외환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무역을 활성화하는 목적으로 브레튼 우즈 협정을 맺었다. 그 핵심은 35달러를 내면 금 1온스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세계 각국의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킨 것이다. 달러가 세계 중심 화폐인 기축통화가 된 것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자본주의는 1970년대 초반까지 소위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등으로 미국 금의 양이 떨어지면서 미국이 금을 확보하기 힘들게 되자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세계를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금 태환제를 철폐하겠다고 발표했다. 더 이상 달러와 금을 바꿔 줄 수 없다는 선언이다. 이 말은 1971년 이후부터 달러는 금과는 전혀 무관한 그냥 종이일 뿐이라는 말이다. 이때부터 미국은 국익을 따라 재량껏 돈을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원하는 만큼 빚을 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시대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자본주의는 400여 년 동안 유지해 왔던 기본 형태에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노동력과 생산 공장을 중심으로 하던 산업자본주의 시대가 하락의 길을 걷게 되고 새로운 금융자본주의 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노동자들이 다양한 기업을 통해 생산해 내는 각종 재화와 서비스가 부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복잡한 생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돈이 직접 부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1990년대부터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경제 비중이 크게 확대되면서 금융시장 개방에 대한 압력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1992년 금융 자율화 및 금융시장 개방 계획이 발표되었다. 그 후 금융시장이 급속도로 개방되면서 외국 자본들이 물밀듯이 들어옴으로써 외국 자본과 선진 금융 회사들의 휘황찬란한 금융 상품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외국 투자 회사들은 한국의 부동산을 자유롭게 매매하게 되었고, 은행과 대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금융자본주의 경제는 급박하고 변화무쌍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통화량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했고, 환율은 오르락내리락했고, 주가는 심하게 요동쳤다. 그 와중에 결국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관리체제하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 후 경제적 양극화는 결정적으로 심화되었고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본격적으로 세계 금융시장에 편입되었다.

이제 우리나라 경제는 우리나라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금융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세계 금융 황제인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유조선의 칸막이가 열린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시장의 탐욕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을 예감케 하는 언급이다. 우리의 돈이 은행에 입금되어 있는 동안 세계 어떤 은행이나 투자 회사에 들어가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은행에 저축을 하거나 주식이나 펀드를 구입할 때 은행원은 삼성전자에 투자하면 연 수익률이 12.5%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삼성전자 주식을 산다고 단순히 삼성전자 주식만을 사는 것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예컨대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에도 투자했기 때문이다. 2008년 미국 금융 위기의 경우처럼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되면 삼성전자의 주식이 큰 타격을 입고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 증시가 기침만 해도 한국증시는 감기에 걸린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외국 회사의 흥망성쇠에 우리의 운명이 상당부분 좌우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2008년 미국 금융 위기와 그 이후의 경제 변화가 잘 보여 주듯이 세계 금융시장이 크게 출렁일 때마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진다는 데 있다. 얼마나 비극적이고 부당한가? 더구나 이렇게 경제적 양극화가 사회적으로 확대되면 부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만큼 더욱 커져 국가의 정책과 운명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그리스 로마 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식민 통치라 함은 타국의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여 그 토지의 원소유자인 국민을 식민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약소 민족 국가들이 외면적으로 독립국의 형태를 취하게 되자, 독립국의 형태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그 경제를 강대국에게 예속시킴으로써 지배 체제를 관철시키는 새로운 식민 통치가 생겨났으니 이것을 신식민지주의(New Colonialism)라고 한다. 요즈음 떠드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세계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신식민지주의를 보편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전략에 불과하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우리 나라의 대기업은 기본적으로 신식민지주의의 추종자들이다. 민족 동포의 안녕과 복지가 그들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어떻게 동포 인민을 활용해야 세계 다국적기업들의 연계망 속에서 자신의 성공을 쟁취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경제적 집단이요 시스템일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무역 자유화, 자본 시장의 개방, 무한 경쟁을 통한 효율성의 제고, 규제 완화, 노동 시장의 유연성, 공적 영역의 축소, 민영화 등등의 모든 전략이 미국의 세계 지배와 우리 나라 대기업의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식민주의가 취하는 국내 전략은 농촌을 포함한 국민들의 생활 세계를 철저히 파괴시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금융자본주의는 지금과 같이 경제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삶의 불안 요소를 양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자리, 주거, 교육, 보육과 의료, 노후 문제는 과거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 특히 경제적 양극화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가계 부채 증가는 매우 위험스러운 지경에 도달해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량 생산한다. 이들은 빈곤의 덫(poverty trap)에 걸린 이들이다.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혁명이다. 만일 이것을 통제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이 혁명 때문에 파멸되고 말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 혁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향한 도전이 된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실상 한 배를 타고 있다. 바다가 죽으면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섬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헬무트 골비처, <자본주의 혁명>)

오늘날 자본주의 자체를 구조적으로 변혁시키지 않고는 가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문제는 오늘의 강력한 금융자본주의의 틀을 해체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란 데 있다.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인 양상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배후에는 엄청난 동맹 세력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 아직은 눈앞에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하나님이 아니라 부(富)의 신 즉 맘몬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교회는 결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가치, 즉 누구나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최근 <21세기 자본>으로 세계적 각광을 받고 있는 토마스 피케티는 '자본주의 문제의 해결은 제도와 정책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소설가 조정래는 <허수아비 춤>에서 한국 재벌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그리며 그들이 얼마나 이기적 탐욕에 가득 차 있는 가를 보여 준다. 정치는 재벌들의 허수아비들일 뿐이다. 조정래는 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적 사회를 건설해 가는 데 있어서 시민 사회 단체들의 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나는 교회가 시민단체와 함께, 아니 보다 앞장서서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현재의 자본주의 현실을 교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뿐 아니라, 십일조에 대한 설교보다 돈을 주제로 한 설교를 자주해야 한다. 돈에 관한 성경 구절은 믿음과 기도에 관한 구절보다 두 배 많은 2350절이나 된다. 자본주의로 인한 경제·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경제 민주화와 복지 사회 건설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나라 운동이다. 그런 실천을 통해 가난한 자들이 인간답게 살게 되고 맘몬의 지배력이 쇠퇴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과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등은 오늘의 자본주의가 이렇게 가다가는 멸망을 자초할 뿐이라며 세계를 돌아다니며 외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를 '임박한 파국'이라고 말하면서 얼핏 보면 종교적 종말론을 외치고 있는 듯 절박하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자체 추진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제어하기 어렵다." (지젝, <임박한 파국>)

"자본주의의 섬뜩한 폭력은 더 이상 어떤 개인이나 그들의 사악한 의도를 물을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객관적, 체계적이며 익명적이다." (지젝, <멈춰라, 생각하라>)

무신론자인 칼 마르크스는 '가난한 사람이 왜 항상 가난해야 하는가?', '자본주의는 정말 이상적인 체제인가?'라는 체계적 의문을 던진 최초의 철학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1, 2, 3>은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활발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이 책은 놀랍게도 세계적으로 성경보다 더 많이 팔리는 책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비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를 위해 투쟁하는 행동을 보고 부끄럽지 아니한가!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귀 타고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께 찬양하였다. 이때 같이 가던 바리새인들이 놀라 예수님께 당신을 메시야로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해 달라고 말한다. 이때 예수님께서 '만일 이 사람들(제자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19:37-40) 말씀하신다.

그렇다! 생명 있는 '산 돌'(벧전2:5)이라도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찬양하지 않는다면 생명 없는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박철수 / 분당두레교회 전 담임목사, <하나님나라>(대장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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