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우리 교회의 한 성도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요약하면 요즘 설교에 너무나도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고 하는 문자다.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한편으로는 기쁘고 힘도 많이 얻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짝 긴장이 된다. 요즘 내가 얼마나 설교를 망치고 있으면, 이렇게라도 말해서 힘내라고 하는 것일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긴 요즘은 설교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 설교를 하면 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튕겨 내는 듯한 반응을 종종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대구 특유의 반응일까? 아멘 아멘을 연발하는 교회에서는 설교하는 것이 쉽고 준비한 것 이상으로 반응과 효과가 나타날 수 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이 냉담하거나 설교를 거부하는 대상들 앞에서는 정말 진땀을 뺄 수밖에 없다.

작년에 어느 대학교 채플에 초청받아서 설교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참석한 학생들은 크리스천들도 아니었고, 단순히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참석하라고 하기 때문에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오자마자 잠을 자기 시작하거나, 그 다음 시간에 있을 시험을 위해서 시험 공부하는 시간으로 채플 시간을 사용했다. 아예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청중들 앞에서 진땀만 뺀 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훈련에 지쳐 예배당 안에 들어와 작정하고 졸고 있는 병사들 앞에서도 꽤 열정적으로 설교를 해 오던 내가 그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었다.

나는 설교를 할 때는 항상 나 자신을 향해서 설교를 한다. 내가 청중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준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서 내가 들어야 할 메시지를 준비하고 나 자신을 향해서 설교를 한다. 그래서 내가 낙망할 때면 나를 향해서 낙망하지 말라 설교하는 것이고, 나에게서 사랑의 모습이 없는 것 같으면 나 자신을 향해서 사랑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교를 한다. 그래서 그 설교를 통해서 내가 은혜를 받고, 다시 낙망했던 마음을 추스르기도 하고 식었던 열정을 다시 회복하곤 한다.

그런데 나를 위해서 한 설교를 듣고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것은 그분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 혹시 나의 설교를 듣고 나의 삶과 나의 설교 사이의 괴리를 찾아내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당연히 나의 설교를 듣고 그 설교와 나의 삶을 비교하면 당연히 괴리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스스로 책망하기 위해서 설교하기 때문이다. 내가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것만 설교하라고 하면 나는 아무것도 설교할 수 없다. 나는 완벽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서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제이 이 아담스 교수는 아주 흥미로운 책을 쓴 적이 있다. 지금은 한국어 번역판이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운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생명의말씀사, 1993)란 책이다. 이것의 원서 이름은 A Consumer's Guide to Preaching으로 의역하자면, '설교를 잘 소비하기 위한 현명한 소비자들을 위한 안내서'라고나 할까? 설교를 상품으로 비유하고 청중을 소비자로 비유해서 어떻게 하면 설교를 통해서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주제의 책이다. 이 책은 우리들이 반드시 읽어 보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설교를 대하는 성경적 원리들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다루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설교를 듣게 될 때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실제로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듣게 될 때 마음에 들지 않거나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지게 되는 설교를 들을 때가 많다. 성경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성경을 근거로 설교하는 목사들은 절대로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며 때때로 이단적인 사설을 말할 수도 있고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 성경의 진리인 양 전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위선적인 설교를 할 수도 있다. 그런 설교가 전해지는 예배를 통해서도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만일 설교자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거나 관계가 좋지 못하면 설교자가 전하는 그 메시지는 오히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이다. 위선적인 모습을 가진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영적인 유익을 발견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어떤 영적인 유익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제이 이 아담스 교수는 그러한 함량 부족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우리가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안들을 한다. 무엇보다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설교를 들을 때 정말 그 설교가 성경적인 것인지 상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행 17:11)고 제안한다. 전해지는 설교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성경적인 메시지인지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위선자들임을 지적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위선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을 무조건 배척하고 듣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 것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3:3). 아무리 잘못되고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지만, 그 가운데 성경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그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누가 전하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거지를 통해서 전달된다 하더라도 왕의 명령은 왕의 명령이지 거지의 말일 수 없다. 바리새인 랍비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해야 했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주셨던 주님의 말씀이다.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논쟁 가운데 하나는 타락한 성직자에 의해서 주어진 세례가 유효한 것인가 하는 논쟁이었다. 도나투스는 타락하거나 배교한 성직자에게서 받은 성례는 유효하지 못하므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성례의 유효성이 안수자의 내적 자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례가 합법적 요소를 갖춘다면 그 자체가 유효하므로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314년에 모였던 아를레스 종교 회의에서는 어거스틴의 입장이 성경적임을 확인하였다.

어쩌면 설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위선적인 설교자가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는 설교자가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설교자가 위선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설교를 거부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만일 그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영적인 유익을 누릴 것이다.

내게 문자를 주신 그 성도님이 은혜를 받았던 이유는 내가 뛰어난 설교를 했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그 설교의 말씀대로 정확하게 살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 문자를 받는 것은 내가 괜찮은 설교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며, 내 설교가 뛰어난 설교였음을 증명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분이 은혜를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며, 그분은 믿음으로 예배에 나왔고 설교를 간절함으로 사모했으며 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은혜 받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든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아무 의미 없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도 통곡하며 회개한 베드로도 있었다. 위선적이고 한없이 부족한 설교라 할지라도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게 손해 보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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