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윌 18일, 세월호 희생자 예은이의 이모 박명희 씨를 만났다. 처음에 인터뷰를 꺼렸던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자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꺼냈다. 동생에게 이제는 딸아이의 죽음에 대해 그만 자책하고 추억하고 살 수 있지 않겠냐고 했던 것을 후회했다고 했다. 참사 이후 가장 힘든 것은 신앙적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사라

'세월호를기억하는기독인모임'(세기모)이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했다. 원래 국회에서 1인 시위를 하다가 광화문에 힘을 보태려고 장소를 옮겼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정오부터 1시까지 피켓 시위와 서명운동을 했다. 유난히 햇볕이 뜨거웠던 9월 18일, 단원고 2학년 3반 고 유예은 양 이모 박명희 씨(48)도 참여했다. 박 씨는 한 시간 동안 4·16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박 씨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주저했다. 박 씨의 동생 예은이 엄마 박은희 씨로부터 인터뷰 기사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나간 적이 많았다고 말한 걸 들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기독교 언론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 끝에 인터뷰에 응했다. 박 씨의 피켓 시위가 끝난 후 광장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힘드시죠?"라는 첫 마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박 씨는 질문을 듣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질문을 이어 가기가 힘들었다. 기자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박 씨와 기자는 마음을 정돈하고 다시 인터뷰를 시작했다.

 

▲ 박명희 씨는 "힘드시죠?"라는 첫 질문에 울음부터 터뜨렸다. 기자도 함께 울었다. ⓒ뉴스앤조이 이사라

- 처음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을 것 같다. 사고 소식을 어떻게 접하게 되었나.

4월 16일, 나는 건강 검진을 받으러 내과에 가 있었다. 그런데 큰오빠가 전화했다. 예은이 고등학교 이름을 물어봤다. 조금 전 안산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사고가 난 뉴스를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에 예은이 고등학교 이름을 잘 몰랐다. 수학여행을 간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15일에 출발했기 때문에 예은이네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 타고 하루가 걸리는 길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병원 직원에게 텔레비전을 틀어 달라고 요청했다.

텔레비전에 세월호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기울어져 있었다. 예은이가 그 안에 있었다. 뉴스에서는, 이 정도 크기의 배는 기울어지는 데 몇 시간이 걸린다며 다 구조할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보도를 믿었다. 다 구조될 줄 알았다. 또 전원 구조했다는 소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보였다. 370명이 구조되었다고 했을 때, 그중 예은이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후 안산에 내려가 동생과 함께 있었다.

- 세월호 참사 후 다섯 달이 지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사고 한 달 후, 동생에게 이제는 그만 자책하고 추억하고 살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내 말에 동생이 많이 서운했을 것 같다. 나조차도 그게 잘 안 된다. 시간이 갈수록 더 힘들다. 어서 진상 규명이 되어야, 부모들이 덜 힘들어하고, 덜 자책할 것 같다.

나도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해 동네에서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혼자서 500명 서명을 받았다. 처음에 탁자를 놓고 서명운동을 했다. 사람들이 별 관심 없이 지나갔다.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서명을 받았다. 놀이터와 교회를 가기도 했다. 주일에는 세월호 유족들이 안산의 한 대형 교회에 서명을 받으러 갔다. 희생자가 많은 교회였다. 그런데 두 번째 주일에는 서명운동은 한 번으로 됐다며 오지도 말라고 했다. 교회 때문에 많이 실망했다. 교회의 중요한 가치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종교 중 기독교에 제일 이웃 사랑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꾸준히 가능한 곳에서 서명운동을 하고, 집회에도 참석하며 지냈다.

 

▲ 박명희 씨는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해 동네에서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혼자서 500명 서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서명을 거절하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제일이라고 배웠는데 교회는 가장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데 같았다. 사진은 박명희 씨가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4·16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그는 한 시간 동안 서 있었다. ⓒ뉴스앤조이 이사라

- 교회의 소극적인 모습에 많이 서운하지는 않았나. 신앙적으로 힘들지는 않은가.

나는 수지에 있는 한 상가 교회를 다닌다. 작은 교회이다. 마음 같아서는 큰 교회로 옮기고 싶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교회에서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다니는 게 더 편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다. 교회가 작은 교회고, 권사라서 맡은 일이 많다. 또 남편이 교회 다닌 지 3년 된 초신자다.

여전히 매일 새벽 기도회에 간다. 가서 운다. 예배는 못 드리고 그저 앉아서 울다가 온다. 많이 답답하다. 내가 예전처럼 교회 가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을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앙금이 남는 것처럼 하나님과 나 사이도 그런 거 같다. 전에는 열심히 노방전도도 했다. 아파트에 장이 서면, 가서 전도지도 나눠 주었다. 그런데 더는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마음이 안 생긴다. 사라졌다.

-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3대째 믿어 온 나의 신앙적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다. 얼마 전 작은아들이 하나님은 없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자신 있게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사실은 언제든 사고는 날 수 있다. 사고가 나서 20세가 될 때까지 못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사고가 아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구조했으면 다 살 수 있었다.

도대체 그 순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기를 쓰고 성경을 읽으려고 한다. 그런데 해결이 안 된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해결이 안 된다. 그래서 아직까지 운다. 언제까지 울지 모르겠다.

-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답을 듣고 싶다. "명희야, 내가 이래서 그랬단다." 하나님은 아시니깐, 답을 듣고 싶다. 왜 그랬는지. 왜 모르는 척하셨는지.

 

▲ 박명희 씨는 하나님께 답을 듣고 싶다. "명희야, 내가 이래서 그랬단다." 또 세월호 참사 때 뭐 하셨는지, 왜 모르는 척하셨는지. 박 씨는 이 말을 하며 또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울었다.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사진에서처럼 일주일에 한 번 피켓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말하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뉴스앤조이 이사라

박 씨는 또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 피켓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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