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 60대 중반에 접어드니 '은퇴'라는 말이 실감 있게 다가왔다. 보통, 사람들은 '은퇴 후를 어떻게 보낼까'를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은퇴 전에 무엇을 할까가 더 무겁게 다가왔다. 은퇴 전에 할 일을 충실히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은퇴 준비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목회 은퇴'는 곧 '인생 은퇴'라는 생각도 들었다. 뭐든지 마무리가 중요하다. 끝이 좋으면 다 좋고 끝이 안 좋으면 다 안 좋은 것이 된다. 그래서 '은퇴 전에 이룰 10가지'를 정한 것이다.

1. 아름다운 목회 은퇴하기

목사로 부름받아 평생을 목회했으니 목회자로 은퇴를 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나는 아름다운 은퇴를 위하여 이런 은퇴관을 정립했다. "은퇴란 삶으로 보여 주는 마지막 설교다." 평생을 강단에서 입으로 설교를 한 목사로서, 이제 마지막 설교를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 '은퇴'라고 생각한다. 입으로 설교하기는 쉽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다 이제 마지막 설교를 하고 떠나야 한다. 그 마지막 설교가 행함으로 보여 주는 '은퇴'라는 설교다. 안타깝게도 이 마지막 설교에 실패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본다. '은퇴'라는 마지막 설교를 잘하면 두고두고 은혜가 되고 감화가 된다. 남한산성 자락 작은 거처로 은퇴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삶으로 보여 준 마지막 설교는 오랫동안 감동을 주고 있다. 떠나는 이의 아름다움은 비움이요, 요구하지 않음이요, 개입하지 않음이라고 생각한다.

2. 화평하게 행복한 목회하기

"교회는 화평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참 행복해 보인다." 이런 소리를 듣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교회' 하면 다투고 싸우는 교회가 생각나는가. 교회는 화평하고 성도들은 행복해야 한다. 화평하지 않은 교회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아니다. 불화하는 교회는 화평의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다. 그런 교회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못 쓰는 교회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든 다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누구와도 화목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하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불목하고 산다. 심지어 형제를 고소 고발한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믿느냐?"고. 생각해 보라. 화해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 못 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십자가 밑에서 손을 잡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화평하게, 행복한 목회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3. 사랑과 존경받는 목회자로 남기

한평생을 목양을 하며 산 목회자의 명예는 무엇일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자로 남는 것이다. 과연 누가 성공한 목사인가? '큰 교회 목사?', '유명한 목사?', '돈 많은 목사?' 아닐 것이다. 사랑과 존경을 받는 목사다. 정도를 걸으며 평생을 목회한 목사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사랑과 존경심이다. 나는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다. (잠 22:1) 세계 최대의 교회를 목회하면 무엇 하는가. 교단의 무슨 장을 하면 무엇 하는가.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불행한 목사가 아닌가. 잠깐의 '소유(To Have)'보다 영원한 '존재(To Be)'적 삶을 살고 싶다.

4. 신실과 정직한 목사로 살기

'신실과 정직' 이것은 나의 생활 철학이다. '신실'이란 '믿고 신뢰할 만하다'는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신실하시니 우리 자녀들도 신실해야 한다. 무엇에 신실해야 하는가? '인격의 신실성', 믿음성 있고 신뢰감을 주는 인격을 말한다. '말의 신실성', 한마디의 말이 약속어음으로 대용될 수 있는 사람이다. '책임의 신실성', 맡은 일에 책임지는 성실함과 충성됨이다. 그런데 어찌하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신뢰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8.4%밖에 안 된다. 정직 또한 그리스도인의 트레이드마크다. 우리가 지금보다 10%만 더 정직하면 1년에 약 80조 원의 이익이 생긴다고 한다. 인천 국제공항을 14개나 세울 수 있는 액수이다. 정직이 곧 애국이다. 물질에 있어서 투명하고 정직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정직한 영을 구한다.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않고 물질로 양심을 속이지 않게 하옵소서!"

5. 가족과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

가족과 노후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고 옥한흠 목사님은 이 점에 있어서만은 안타까움을 남기셨다. 목사님의 하관식 때 유족석에 있던 사모님과 세 아들이 갑자가 목사님의 영정 사진을 가운데 두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장례 예배를 마치고 축도를 하기 직전 옥 목사님의 둘째 아들이 앞으로 나와서 대뜸 하는 말이다. "방금 전 우리 가족이 아버지 관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진을 찍은 것은…" 하면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을 잇기를 "우리 아버지는 제자 훈련에는 능하셨으나, 가족을 돌아보는 데는 무지하셨습니다. 모르셨기 때문에 저는 아버지를 용서하려고 합니다." 옥 목사님은 변변한 가족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신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나는 이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퇴근해 집으로 가면 목사의 옷을 벗고 섬기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작은 섬김으로 가족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든다. 방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빨래도 갠다. 하지만 가족 간에는 사랑과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족을 존중히 여기고 인격적으로 대한다. 세치 혀를 조심하자. 입술의 30초가 가슴 속 30년이 간단다.

6. 냉수 한 그릇 잊지 말기

목말라 죽어 가는 사람에게 금덩어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부동산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목이 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냉수 한 그릇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한 개의 빵을 주는 것 외에 달리 사랑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주변에는 냉수 한 그릇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주기를 잊지 말아야겠다. 이것이 하늘에 보물을 송금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천국 계좌' 통장을 만든다. 서로서로 기부도 해 준다. 그날에 냉수 한 그릇에 대한 주님의 상급을 기대한다. 냉수 한 그릇 주는 것을 잊지 말자! 낙심한 자에게 격려 문자를, 슬픔 가운데 있는 자에게 위로의 전화를, 기뻐하는 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그리고 힘들어 하는 자의 손을 잡아 주자.

7. 위기의 한국교회 구하기

참으로 거창한 말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목사로서 당연한 외침이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애태우지 않은 국민이 있었겠는가. 오늘의 한국교회는 필경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 유일하게 개신교만 교인이 줄고 있다. 가톨릭은 급성장하고 불교는 정체되고 개신교는 쇠퇴하고 있다. 교회가 신뢰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높은 도덕성을 인정받고 예언자적 통찰력으로 사회 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교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모든 게 자업자득이다. 그동안 교회가 본질에서 많이 벗어났다. 지나친 외적 성장 추구, 기복주의, 물량주의, 성공주의, 세속주의, 대형 교회의 비리, 개교회주의, 교회의 분열, 교인들의 언행 불일치, 목회자의 자질 부족, 각종 스캔들, 교회의 정치 성향화, 신학교의 난립 등이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하락시켰다. 건강한 교회, 신실한 목회자, 충성된 성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역부족이다. 어찌하랴! 존 칼뱅의 말처럼 "교회의 탁월성은 교인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게 아니라 순결함과 거룩함에 있다." 순전한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물질주의, 성공주의, 출세주의와 같은 세상적인 가치보다 영적인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다.

8. '작은 교회' 격려하여 세우기

교회가 위기에 직면하니 '작은 교회'들은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다. 대형 교회들의 비리가 터질 때마다 그 유탄은 '작은 교회'들이 맞는다. 사명인지라 쉽게 떠날 수도 없고 어떤 어려움도 견뎌 내던 가족들도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다. 어찌하랴! '작은 교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개척 교회를 살려야 한다. '작은 교회' 목회자를 격려하고 세워 주어야 한다. 실개천이 살아야 강이 산다. '작은 교회'가 문을 닫으면 결국 큰 교회도 문 닫게 된다. 다만 조금 더 오래 버틸 뿐이다. 이웃에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세워 주자.

9. 교회의 연합과 일치 운동

나는 교회 연합 운동의 철학이 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다. 예수님은 지상에 세워질 교회와 지도자들을 중보하시며 "아버지, 우리와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셨다. 교회가 하나가 될 때 선교적 지상명령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 기도는 초대교회와 제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하여 기도하고 계실 것이다. 나는 주님의 기도가 나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응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연합과 일치를 추구한다. 교파를 초월하여 지역 교회가 연합하는 일에 변함없이 참여한다.

10. 교회의 탈정치화 운동

나는 오늘의 교회나 교단의 정치 행태를 보면서 이런 "정치는 어린아이 짓이다"라고 지적한바 있다. 고린도교회 안에 4개 파벌이 있어서 시기하며, 분쟁할 때 바울은 이를 '어린아이 짓'이라고 책망했다. (고전 3:1) 한국교회는 잘못된 정치 때문에 찢겨지고 밟혀지고 있다. 사탄은 정치라는 이름으로 개 교회와 지방회, 총회, 교계까지 분열시키고 있다. 잘못된 정치에 오염되면 감투와 교권에 집착한다. 동역자 간 고소 고발의 난무, 파벌 형성, 돈 선거, 아니면 말고 식의 흑색선전, 제 식구 감싸기, 이런 정치가 한국교회 영성을 바닥에 떨어트린다. 정치는 적전 분열 행위이다. 한국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요인 중 가장 큰 것이 저급한 정치 때문이다.

교회 정치란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 받은 치리권 행사다. 교회 정치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의 구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평화와 정의의 나라다. 하나님은 권위를 위임하여 그의 나라를 세워 가신다. 인사권을 비롯한 위임된 권위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행사해야 한다. 위임 권위를 가지고 횡포를 부리거나 남용해서는 안 된다. 나는 총회 정치가 격화되고 정치꾼들이 총회를 무대로 이전투구를 할 때 1~2년만 총회를 해산하고 총회본부의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회의 탈정치 운동'이란 나쁜 정치를 막고 성숙한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성숙한 정치는 평화주의 신앙 공동체인 메노나이트교회처럼 자신의 의견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대화와 토론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한다. 메노나이트의 핵심 가치는 "사랑 안에서 찬성하고 반대하라(Agreeing and disagreeing in love)"는 것이다.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보지 않고 건강한 공동체 교회를 만드는 창조적 요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은퇴 전에 이룰 10가지'를 정하고 나니까 마치 집을 건축하려고 할 때 설계도를 완성한 기분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뭔가 이룬 것 같다. 이렇게 살다 가면 주님께서 반갑게 맞아 주실 것 같다.

신만교 / 화평성결교회 목사

*<기독교성결신문>에도 중복 게재했습니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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