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아내가 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한겨레>, <오마이뉴스>, <뉴스타파> 등을 매일 꼼꼼히 살피고 현대사와 교회 개혁에 관한 책과 글을 찾아 공부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전에 사는 우리 부부는 시간을 내서 촛불 집회에 참여하거나 광화문광장에서 동조 단식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한택규)

아내가 변했다. 이런 걸 '회심'이라고 해야 하나, 5월 17일 청계광장 세월호 추모 촛불 집회에 다녀온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불혹이 지난 짧지만은 않은 인생 속에서 몇 번의 부침과 방황은 있었지만 그래도 교회의 가르침과 몇몇 진실성을 보이는 목사들의 메시지를 좋아하고 따르는 이른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 아내가 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한겨레>, <오마이뉴스>, <뉴스타파> 등을 매일 꼼꼼히 살피며 씩씩거리거나, 이 기사 읽어 봤냐, 저 기사 읽어 봤냐, 이건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며 책 읽고 토론하기 좋아하는 남편의 꼭꼭 숨겨 놓은 욕망을 건드린다.

왜 그런 변화가 생겼을까? 아내 자신의 말로는 "우리나라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세월호 촛불 집회에 그렇게 안 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많은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참석해서 억울하게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진실을 위해 함께 싸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현상을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교회에 대해 깊은 실망과 절망감을 느낀 것 같다. 신학을 한 남편이 자주 성토했던 문제들에 대한 고뇌가 이제서야 시작된 걸까?

그래서 그런지 요즘 아내는 교회 비판적이고 개혁을 추구하는 여러 책들과 기사들을 열심히 읽고, 남편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내용이 좋은 것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SNS 공간에 올리곤 한다. 최근엔 우리나라 현대사의 고통스러웠던 사건들에도 관심을 갖고 자료들을 찾고 공부를 한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상처들의 뿌리가 이미 오래 전 사건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챈 것이다.

아내의 주변 지인들이 대부분 '권위에 순종하기'와 '복잡하게 따지지 않기'를 덕목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인지라 지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까 봐 조금 걱정은 되지만, 나는 이런 아내의 변화가 내심 반갑고 기특하기까지 하다. "당신의 길을 가라,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말했던 단테의 말을 아내에게 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다.

 

▲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작은 위로와 힘이나마 주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동조 단식을 하기도 했다. (사진 제공 한택규)

그 후 우리 부부는, 대전에 살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아니 시간을 내서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상경하여 촛불 집회에 참여하거나 광화문광장에 가서 동조 단식에 동참하는 등 유가족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온다. 유가족이 바라는 진상 규명과 안전한 나라를 위한 특별법이 한 개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미래와 역사와도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아내에게 "여기 있으면 하나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라고 물어보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얼마 전 교황 프란치스코가 내한했을 때도, 우리 부부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는 교황의 행보에 함께 감동하며 배우며, 개신교와 가톨릭에 대해 여러가지 진지한 토론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번 추석에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광화문에 다녀왔다.

총신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의료 사고로 인한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꿈꾸던 독일 유학의 길을 포기하고 홀어머니 부양과 생계를 위해 한국이라는 사회와 몸을 섞은 지 벌써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구조적인 이유로 목회자가 차고 넘치는 한국교회, 그로 인해 수많은 윤리적, 신학적 문제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와 '개독'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는 한국교회, 나라도 목회하지 말고 땀 흘려 일하면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열심히 살자 라는 생각에, 그동안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아이들 수학을 가르치며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형편이 닿지 않아 마흔이 훌쩍 넘어 뒤늦게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 아내가 나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최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판결이 있었다. 정치에 개입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국정원법으로는 유죄지만 선거법 위반은 아니라는 판사의 판결문에 수많은 국민들과 지식인, 언론인들이 권력의 눈치만 보는 법원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모든 법관들의 제청 과정 없이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직접 추천하고 임명하는 우리 나라인지라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삼권분립의 정신이 엄격하게 구현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늘 해 왔지만, 동료 부장판사가 실명으로 내부 강령을 어기면서까지도 지록위마에 빗대어 이번 판결을 비판하며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었다고 울분을 토한 기사를 보며 우리 부부도 함께 분노하며 아파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 통과가 요원한 지금의 절망스러운 상황이 더해져서 그런지 아내도 나도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었다.

▲ 최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판결이 있었다. 국정원법으로는 유죄지만 선거법 위반은 아니라는 판사의 판결문에 국민들이 분노했다. 김동진 부장판사는 이번 판결을 비판하고 우리나라의 법치주의가 죽었다고 했다. 대법원이 삭제한 김동진 판사의 게시글을 읽어 본 아내가 불현듯 이 판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 같다고 한다. 사진은 광화문광장에서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사진 제공 한택규)

대법원이 삭제한 김동진 판사의 게시글을 읽어 본 아내가 불현듯 이 판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 같다고 한다. 구약성서 아모스 5장과 예레미야 6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한 상처를 법정에서 뇌물을 받고 더 깊게 만드는 이스라엘 사회,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쳐 버리고 오히려 평안을 외치는 이스라엘을 향해 부글부글 끓는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짖었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한 말이 보수적인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도 모르는 순박한 아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한국 사회의 아픔과 정치적 현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했던 우리의 현대사에 눈 뜨기 시작한 철모르는(?) 아내이지만, 그런 작은 민초의 눈과 입이 더 정확하게 진실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9월 5일 현대 신학의 거장 판넨베르크가 별세했다. 그의 스승이자 세계적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가 계시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게, 그는 신의 계시의 가능성을 역사와 자연으로까지 열어 두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계시의 통로라고 생각하는 보수적 개신교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인 신학이지만, 그의 그러한 열린 시각과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는 말은, 우리의 삶과 유리되지 않은 정직한 신학에 목말라 있던 피 끓는 신학도(나)를 매혹시켰던 기억이 난다.

판넨베르크 신학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자연과 인간의 역사에서 신의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도, 심지어 기독교인이 아닌 착한 사람들의 정의로운 몸짓에서도 말이다. 아마 판넨베르크도 김동진 판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 같다는 아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에 동의를 할 것이다.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나중에 만나면 꼭 물어볼 생각이다.

사법 체계, 배후 세력 운운하며 진실을 덮으려고 혈안인 정부 여당을 보나, 개혁 의지를 상실하고 지리멸렬하고 있는 야당을 보나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이지만,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사유의 결말이 희망이었듯이 김동진 판사 같은 사람에게서 희망을 본다.

아내와 함께 밤하늘을 보니 별들이 더 밝게 빛난다.

한택규 /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를 전공하고 총신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사정상 독일 유학(교회사 전공)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10여 년 하다가 지금은 대전에서 아이들 수학을 가르치며 소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되기를 꿈꾸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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