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한 틈에 결혼식을 올렸다. 해방 이후 이렇게 뜨거운 날이 없었다던 날이었다. 예식이 끝난 후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기 전, 오산리기도원으로 사흘간 금식 기도를 하러 갔다. 지금 와서야 어찌 비춰질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우리의 충정이 그러했음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 뒤풀이도 없어 서운한 친구들이 기도원까지 태워다 주기로 하였다. 한때 용인 시내를 깡다구와 바지 자락으로 휩쓸고 다녔던 내 죽마고우 M이 임시 넘버를 단 채 비닐도 벗기지 않은 허니문카(Honeymoon Car)를 끌고 왔다. 그야말로 출시된 지 한 주일도 안 된 신차(新車)였다. 꽃 장식과 깡통을 주렁주렁 달고 전설 속에서 달려 나온 흰 말처럼 미끈하고 기름진 그 차는 '다이너스티(Dynasty)'였다.

친구들은 파주 시내에서 보신탕을 먹고 기도원에 신혼부부를 내려 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는데, 마치 한 쌍을 이루듯 또 한 대의 다이너스티가 주르르 미끄러져 들어와 멎었다. 그리고는 운전기사가 먼저 내려 재빠르고도 절제된 동작으로 공손히 열어 주는 뒷좌석에서 쓰윽 몸을 내미는 머리의 기름칠이 전신에 흘러내릴 듯 훤칠한 그야말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와 같은 양복 신사 한 사람이 내렸다. 그가 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여러 명이 마치 회장님이나 조직의 보스를 맞을 때처럼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영접했다. 인사를 나누던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무슨 경이로운 장면을 보는 듯이 그 신사와 그가 방금 내린 백마처럼 기름진 '다이너스티'를 번갈아 바라보았었다.

아무튼 그때가 '8·15기념대성회'라는 집회 기간이었는데(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저녁 집회에 가서야 나는 그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가 이번 8·15기념대성회의 주 강사인 최성규 목사님이라는 분이고, 그는 순복음의 제2인자 소리를 듣는 그런 인물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제2인자'라는 말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주위에서 저절로 듣게 된 말이다. 그 말을 영어로 하면 '넘버 투'가 될 것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자신은 '효(孝)'를 전파하는 목사라고 소개했다. 목회에 있어서 효를 가장 강조한다는 것이었다. '충성도 아니고 효라니?' 나는 적잖이 의아스러웠다. 어떨 때 순복음이 정말 한국적인 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효라는 것은 기독교 진리와는 상관이 먼 주제가 아닌가? 오해이기도 하고 그렇기도 한 여러 이유로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으로 불효자라 야단맞기가 일쑤였지 않았던가? 그런데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효라고 본다니… 그 효의 내용은 곧 밝혀졌다.

그는 자신이 지방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공장에서 일할 때,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를 자신의 아버지라고 여기면서 살아왔다고 간증 비슷한 인생 얘기를 했는데, 자신의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조용기 목사님의 덕분이고, 그분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결코 지금의 이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었고, 그 결론이 바로 '효'였다. 인생에 있어서 은인에 대한 효가 제일 중요하다는 거였다. 그리고 여러분 역시 그러한 효도할 목자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조용기 목사님께 잘하라"는 유언까지 하시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8·15기념대성회에 듣기로는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나는 순간 '이것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인데, 그것이 뭐였을까?' 하다가 엉뚱하게도 "민족의 태양이시며 불러도 불러도 그 예지로움과 영명하심이 만고에 길이 남으실 위대하신 어버이 수령님…" 하는 북쪽의 '효 이데올로기'가 떠올랐다.

물론 내가 이런 은혜롭지 못한 생각까지 품게 된 데는 과정이 있다. 주 강사가 나서기 전 이미 서너 차례 오픈 게임 같은 설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들이 간판으로 내건 8·15기념은 물론이고 막 결혼을 하고 앞날을 하나님께 맡겨 기도를 드리러 온 우리를 포함해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의 사정에 부합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놀라운 사실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 옆자리에는 말기 암 판정을 받고 자신의 누나(그는 기도원에 속한 교회의 권사님이면서 초등학교 교사였다)에게 이끌려 억지로 기도원에 온 한 중년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벌써 사흘을 굶어 기진해서 거지반 죽게 된 채 늘어져 있었다. (맙소사, 그것은 금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신약성서('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이 그랬겠지만 천사가 와서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못에 넣어 줄 누군가를 기대하는 그와 같은 병자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그들에게 최성규 목사님의 개인사적 간증과 거기서 나온 듯한 효의 메시지는 과연 복음으로 들렸을까.

집회는 연이어 계속되었고 강사가 바뀔 때마다 매번 헌금 바구니가 돌려졌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가 치유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로 인하여 손이 들 수 없도록 팔이 무겁다며 흰소리는 쳤지만 병자를 안수하기 위해 강단을 내려올 배짱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집회와 아랑곳없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저 사내의 모습이야말로 이곳의 진실이 아닌가. 나는 늘어져 있는 사내를 억지로 부축하여 데리고 나왔다.

나는 병자의 누나에게 이러는 게 아니라고 화를 내다시피 강권해 그에게 죽을 먹이도록 했다. 음식을 먹고 약간 기운을 차린 그를 우리 방으로 데려와 내가 아는 바대로 믿는다는 게 뭔지 처음부터 설명해 주었다.

우리 모두 처음 가 보는 길, 삶이 그러했듯이 죽음도 그렇다. 삶이 있었듯이, 죽음도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죽음은 애초에 없는 것이고 죽음에 관한 미지의 공포와 불안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없다는 그것을 믿는 기독교인은 죽음의 거짓과 싸우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모든 죽이는 것들과 죽이려는 것들과 싸우시는 생명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죽음과 죽음을 앞세운 거짓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 오셨다. 그것을 약속이라 한다. 아무도 가 보지 못한 길, 그러나 용기를 내어 가시라. 죽음은 없다. 끝까지 죽음과 싸우시라. 여기서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라.

밤이 깊어 그는 내가 말하는 신앙을 받아들였다. 자기는 이제 죽음일지라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지켜보던 그의 아내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의 누나는 자기 동생이 복음을 알아듣고 신앙고백까지 하니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그가 믿게 된 기념으로 예배를 드렸다. 우리 부부는 금식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이틀 동안을 그들과 기도하며 지냈다.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기도원을 떠날 때, 권사님은 나에게 앞으로 "큰 목사님이 되시라"며 십만 원을 봉투에 넣어 주셨는데, 이것이 내가 받아 본 첫 사례비라면 사례비였던 셈이다.

최성규 목사님이 신문에 광고를 내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구글 검색으로 그가 그동안 어떤 종류의 성명을 발표하고 광고를 실었는지 제목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한 핑계로 대국민 광고를 실었다. "이제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나라를 위해 결단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해상 기념탑을 세우고, 국민 성금을 모아 돕겠으니 가족들은 서명받는 것을 그만두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라"고도 했다. "산 자는 사는 게 먼저 간 이에 대한 예의"라고 "돌을 던지면 맞겠다"고도 하였다.

과대망상이나 견강부회가 아니라면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이런 정도로밖에 감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실망스럽다. 욥이 말했다.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욥기 6:25)" 사도 바울도 말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로마서 12:9)." 이런 행동이야말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욥을 괴롭히고 선을 위하여 악과 싸우려는 이들을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목회자이기에 더욱 문제이긴 하지만, 목회자 이전에, 나는 그가 왜 계속 신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 말마따나 돌 맞을 광고를 내는 것일지 궁금해진다. "조용기 목사님께 효도를 다하겠다"던 그의 다짐과 '효란 은혜를 받은 자 제일의 덕목'이라던 그의 설교와 함께 누군가 말해 주었던 제2인자라는 말이 어른거리기도 한다.

최근 조용기 목사님과 그의 아들들이 필시 자기들이 땀 흘려 번 돈일 리는 없는 돈 문제로 법정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일생을 타인들에게 천국 이야기를 해 왔지만 자기와 아내와 아들들의 그 '돈의 맛'으로 그가 설교해 온 천국은 얼룩지고 말았다. <시사저널>에 따르면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신도 수가 46만 명. 매주 예배 참석 인원만 25만여 명. 매주 신도 한 사람이 4000원 꼴로 헌금을 낸다 해도 10억 원에 이르고, 1년이면 5백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십 수년 전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효를 설파하던 그가 이제 '나라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설파하고 있다. 시쳇말로 이런 경우를 두고 '대단히 성장했다'고 하던가. 문제는 그의 메시지가 여전히 이 기도원 같은 현실 청중들의 아프고 힘겨운 죽음의 삶과 유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잘사는 삶만을 위해 질주해 온 때문인지 모르겠다. 너무 큰 기대일지 모르겠으나 죽음에 대한 사색과 예의가 결여되어 있다. 설교를 하기 위해 신차 다이너스티(Dynasty)에서 내리며 만면의 미소를 짓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처럼 훤칠했던 그의 모습이 많이 본 어떤 장르의 영화 속 장면들에 자꾸만 오버랩되는 이유이다.

세상이란 게 다 '다이너스티'들의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여! 부닌(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Бу́нин, 1870~1953)의 걸작의 주제는 과거의 자랑과 허무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더 나가면 자랑도 허무도 한낱 끝까지 추한 동물적 세속성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럼 우리의 실상은 뭐란 거지? 다이너스티 한 번 얻어 탄 추억을 평생 우려먹을 자랑으로 간직한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이지 뭐겠는가. 최성규 목사의 효도와 애국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어떤 상관일지, 루쉰(魯迅, 1881~1936)이 만리장성을 보고 한탄했다던 말투를 흉내 내어 한마디해 본다.

"아아, 위대하고도 저주스러운 다이너스티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