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구체적인 논거를 제시하지 않은 인상비평이라는 점 미리 밝히고 양해를 구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비겁함 때문이다.

현직 목사의 90%가 표절 설교를 한다는 뉴스를 읽었다. 나는 그 90%가 어떻게 취합된 근거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과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심증이 든다. 

설교 표절을 논할라치면 설교란 기본적으로 인용과 출처를 통해서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학술 저작이나 순전한 개인의 사색에 의한 예술적 창작과는 달라서 본래적으로 표절일수밖엔 없는 특성이 있다고 봐야한다. 내가 선택한 성경 본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독교 2000년 역사에 누군가 반드시 먼저 설교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러한 설교를 전혀 나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빚어 내는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내가 듣고 읽고 알고 있는 내용의 의미 맥락을 이 시대의 역사적 시공간에 접합하도록 대중에게 환기시킬 뿐이다.

'경의 모든 해석은 이미 내려졌기 때문에 새롭게 추가할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경의 말씀을 견고하게 실천하는 것이 문제'라던 주희(朱熹, 1130~ 1200)나 조식(曺植, 1501~1572)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성경 역시 앞선 시대의 무수한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써 내린 대강의 의미와 맥락에서 벗어나 새롭게 밝혀져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작금 문제가 되고 있는 설교 표절은 그런 근본적 표절의 문제는 아니다. 타인이 한 설교, 타인이 작성한 설교 원고를 그대로 가져다 자기의 것인양 선포하는 행위의 윤리적 문제는 새삼 따져 볼 필요가 없겠다. 도둑질이라 손가락질하기에도 민망하여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싶어진다. 내가 문제로 여기는 지점은 윤리적 파렴치함이 아니다. 설교 표절을 낳고 있는 현실이다. 왜 목사들은 표절을 할까? 혹은 할 수 밖에 없을까? 도무지 설교 표절이란 무엇일까? 

내 식으로 설명해 본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표절하는 설교자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일주일이면 서너 번씩이나 강단에 나서서 대중에게 해야 할 말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우선 대단히 불행하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떡하든지 목사로서 해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으니, 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임의로는 아니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린도전서 9:17)', 부득불 남의 것을 베껴서라도 설교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베낄 것인가? 그는 자신이 청중에게 할 수 있는 고유한 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신이 어떤 것을 말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가 선택한 타인의 설교 원고는 말하자면 '설교란 이 정도면 된다'는 나름의 판단이 골라 낸 설교 모범인 셈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즉 자신의 고유한 할 말을 갖지 못한 설교자가 설교란 이 정도면 된다고 하는 자기 판단으로 선택한 타인의 설교는 표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어떤 문제일까?

만일 우리가 중병(重病)에 걸렸다고 가정을 해 본다면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어떤 의사를 찾아가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된다'고 하는 정도의 의사일수는 없다. 죽고 사는 문제라 한다면 무조건적으로 나는 나의 생각 따위를 배제해야 한다. 그리고 지극히 객관적으로 이 질병에 있어 가장 권위 있는 의사를 선택해서 바로 그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의사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그냥 적당한 의사에게 치료받고 말자'라고 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권위 있고 능력 있는 의사일 것인가?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는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과 영성가들과 설교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사에 있어 검증받은 고전(古典)인 셈이다. 고전의 장점이 무엇인가? 당대의 현실성(Reality)이 시공을 뛰어넘어 여전한 감동을 준다는 점이다. 아무리 남의 설교를 베껴서 그대로 읊어 대는 게으른 목사라 할지라도 교회의 역사에 그런 설교자들이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의 설교를 베껴야 할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느 누구의 설교가 가장 좋은 설교로서, 잘못 판단할 위험이 없는지를 궁리할 필요가 없다. 루터든 칼뱅이든 조지 휫필드든 웨슬리든 조나단 에드워드든 로이드 존스든 본회퍼든 혹은 이용도든 김홍전이든 박윤선이든 김재준이든 우리에겐 구름같이 허다한 고전의 목록이 있음이다. 혹은 자신이 속한 교단과 교파와 신앙 색깔에 맞추어 얼마든지 대가들의 설교를 원문 그대로 복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 정도의 수고를 하지 않을까? 그들이 선택한 설교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그 설교를 선택한 것일까? 왜 하필 그 설교를 선택해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여기엔 표절 이전에 만연된 표절보다 심각하게 만연된 하나의 광범위한 문제가 전제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90%의 설교자들이 표절을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90% 이상의 설교자들이 설교와 목회에 관해서 오직 하나의 표절된 틀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을 '목회주의'라는 말로 규정해 본다. '목회주의'란 설교든 교회 프로그램이든 목회자 자신의 독서든 신학연구든 그 어떤 기독교적 활동이든 '목회를 위한, 목회에 의한, 목회적 활동'이라는 한 가지 목표로 환원되고 있다는 현실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목회주의에 따르면 목사는 오로지 목회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존재가 된다. (마찬가지로 선교사는 오로지 선교를 위해서만 만들어진다) 따라서 목사의 신학 연구든 실천적 행동이든 다 같이 목회를 위한 것이 된다. 즉, 목회라는 직업적인 목적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을 갖지 않는 것이다. 곧 그들에게 기독교란 교회이고,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목회이고, 교회를 성장시켜 나가는 목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러한 신념은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다닌 교회에서, 청년기를 보낸 공동체들에서, 신학교에서, 전도사 부목사 시절을 거쳐 담임 목회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배워 왔던 것이다.

따라서 설교란 그 목회주의에 입각한 목회주의적 사역을 위한 재료이자 가장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나는 여기서 오늘날 설교의 정형화된 모습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표절보다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시대에 만연된 하나의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표절의 상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는 각기 다른 청년들로부터 동일한 내용의 상담을 받아 본 적이 있다.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는 것이다. 도무지 성경이 과연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감동은 고사하고 분노마저 치미는 설교를 매주일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고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설교를 같이 들었으면서도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동료들을 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그 점에 관하여 질문하곤 했다. 그것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잘못된 성경 해석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가 만일 그런 엉터리 설교를 듣고도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를 그냥 은혜의 상태에 내버려 두라. 문제는 그가 아니라 당신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그런 엉터리 설교를 들으면서 숨 막혀 하는 사람이다. 거기에 당신의 부르심이 있다. 나는 당신의 고민하는 그 고민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고 있는 고민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내가 그의 고민을 정말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공동체에 대한 신자의 의무를 고뇌하는 것이다. 지금도 문제적인 교회의 대부분 신자들이 설교자나 그의 설교가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회에서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기 위해, 곧 교회를 위해, 참고 그 자리에 있다고 하는 말들을 자주 듣는다. 나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의 유감이 전부일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목회주의'가 작동하는 것을 보는 것이고, 오로지 목회주의라는 단 하나의 설교만이 지배하고 있는 교회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단 하나의 목회주의적 신학과 설교가 오늘날 교회와 강단을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표절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이 표절은 표절인지를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의 표절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이 표절은 한마디로 목회란, 신앙이란, 교회란, 교인이란 이래야 마땅하다고 하는 정형화, 박제화다. 거기 따르면 칼뱅도 루터도 그들 이후의 그 누구도 현재의 한국교회의 목회를 위해서 존재했던 인용과 참고로 기능한다. 그 고유한 역사 속 개인의 치열했던 고뇌의 과정은 역사적 맥락과 개인의 개성과 그것이 만들어 낸 현실의 특수성을 상실해 버린다.

심지어는 현세계에 존재하는 로마가톨릭이나 러시아정교회나 그 어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들의 존재도 모두 다 초월해서 그야말로 천상천하 오로지 한국교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고립된 정신의 체계는 고립된 열심 가운데 자기증식과 자가증폭을 강화해 나간다.

이것은 내 식으로 비유하자면 어느 한 편저자에 의해 역대의 명문장들을 한 책에 모아놓은 꼴과 같다. 누구라도 그런 책들을 읽어 보았을 것이다. '무슨무슨 세계명작 감상'이라든가 '무슨무슨 나의 애송시'라든가 하는 해설집들 말이다. 그런 책들이 편리한 점은 오직 한 가지에 있다. 나도 읽었노라, 아노라하는 자랑을 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묶음집이 각개 개별적 저자들의 고유성을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평준화해 버린다는 점이다.

대학 입시를 위해 문학의 목록을 달달 외운다고 문학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듯, 모든 역대의 집적물을 하나의 관점을 위한 도구로 보고 그때그때마다 적절히 그것을 인용하면서 하는 설교란 남의 것을 통째로 베끼든 자기의 머릿속에서 궁리해서 짜내든 이미 표절인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진다.

기왕에 표절을 하려거든 대가(大家)를 표절하자. 글로벌 시대에 민족 복음화를 넘어서 세계 선교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고작 출처도 불분명한 누군가의 시답잖은 설교를 표절한다니, 이것은 자존심 문제가 아닌가. 표절을 하려면 적어도 한 시대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갔던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표절하자. 온통 고전을 해설하고 불후의 저작자들을 베껴 먹는 인문학 강좌가 백가쟁명(百家爭鳴)을 이룬 시대가 아닌가. 통째를 그대로 베낀대도 표절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뿐더러, 내가 위대한 아무개의 것을 표절했노라 밝힌대도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내가 생각하는 목회주의하(下), 이 시대에 광범위하게 만연되어 있는 보편적 표절의 특징 몇 가지를 인상비평식으로 열거해 본다.

① 신학 실종, 혹은 신학에 대한 터부시 ― 이는 설교자 자신의 무식(無識)에 대한 자기변명에 불과한대도 목회는 신학과 다르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의상으로 걸치고 근거 없는 낙관으로 태연해한다. 계속 그렇게 공부하지 않으면 끈끈한 의리와 맹목적인 충성밖에 남을 게 없을 것이다.

② 엘리트주의 ― 설명이 필요 없는 허영과 위선의 행태이며 그 근원은 콤플렉스의 역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콤플렉스의 특징은 여기에 물든 사람들 자신에겐 콤플렉스가 오히려 특별한 명예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알아야한다. 콤플렉스(complex)란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거대한 공동 구조물이다. 자기 건물 안에서 자기가 길을 잃었다면 그는 누구인가?

③ 경영주의 ― 교회나 교회 사역을 하나의 개별적인 신규 사업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문어발 식으로 끝없이 새로운 모델과 이슈를 찾아 자기 확장을 추구하며 그것으로써 자기들이 교계를 선도해 나간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선진적이라 여기는 남의 것을 모방하고 이식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한국인이 미국인 흉내를 내는 것이다. 대부분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약하다. 지금까지 속아서 끌려 다닌 투자자(?)들을 생각하라.

④ 혼합주의 ―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이다. 뭐든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것이면 두루 시도해 본다. 하다가 안 되도 그만이고, 그것으로 누군가의 정신세계가 망친대도 크게 상관치 않는다. 왜냐하면 '아말감이 금이빨로 변했다는데, 그것으로 병이 나은 사람이 있다는데, 혹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다는데, 그러면 됐지' 하는 식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그게 고양이라는 논리는 실용주의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잡은 쥐란 무엇인가?

⑤ 마지막 전제한 이 모든 4가지 광범위한 표절 상태의 특징은 그것들이 하나같이 실천적인 세계 인식, 현실 인식의 국면에서 정치적인 극우, 내지는 보수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폐일언. 내가 아는 바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모든 당대의 세상성으로부터 벗어남에 있다. 벗어난다는 것은 일단 답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미 나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찾지 못하여 그로인한 세상성에 편의상 함몰되어 답습하고 있는 목회이고 설교라면 그것은 이미 표절 상태라고 봐야 한다. 나는 그 증거가 반드시 실천적인 진보성과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물론 내가 말하는 진보성이란 정치적 파당으로서의 진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근본주의적인 신자라고 여긴다. 자기는 표절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미 깊은 표절 상태에 있는 줄 모른다면, "방술을 베풀기도 전에 뱀에게 물린 것, 술객이 소용에 닿겠는가. (전도서 10:11)" 차라리 대놓고 대가들을 표절하자. 자, 누구를 고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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