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이다. 팔레스타인과 동유럽 등 전 세계 곳곳을 아비규환으로 몰아넣고 있는 전쟁의 폭력은 대단히 참혹한 일차원적 폭력이다. 불균형한 무력의 압도적 우위에서 인간의 광포한 호전성으로 저질러지는 끔찍스러운 폭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간을 달리하는 우리에겐 브라운관 너머의 관조적 폭력일 뿐이다. 우리 일상에서 경험되는 실제적 폭력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단 한발의 총성도 지축을 가르는 포격음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진다. 한참 신나게 MT 중이던 대학생들이 리조트가 붕괴돼 죽고 다친다. 멀쩡히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이 배가 침몰해 죽어 나간다. 오토바이 타고 제 갈 길 가던 이가 갑자기 꺼져 버린 아스팔트 싱크홀에 빠져 죽는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책임과 원칙의 붕괴가 불러온 폭력

이것은 굳이 희생양을 찾지 않는다면 뚜렷이 가해자를 지목하기 어려운 다층적 상황의 부실이 결합돼 벌어진 폭력이다. 한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됐을 이기심과 욕심이 누군가의 도덕적 해이에 영합함으로 유착 비리가 되고 사회구조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 참담한 결과 앞에서 책임을 느끼고 철저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 애써야 할 정치는 이미 조직과 인사(人士)들의 부도덕한 결탁에 대한 수수방관을 넘어서 오히려 적극 동참의 의혹 속에 공범의 대열에 합류해 있다. 결국 지켜져야 할 원칙과 질서는 사이좋게 주고받은 청탁과 금품 앞에 무너지고 톱니바퀴 돌아가듯 정교하게 맞물려 작동했어야 할 사회적 시스템은 '우리가 남이가'라며 온갖 이권과 물권으로 교묘하게 치장해 나누던 뜨끈한 정(情)으로 인해 침몰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면서 어디선가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를 파괴적 폭력이 단순히 명백한 누군가의 의도적 물리력만으로 인함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는 폭력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스스로가 책임질 것을 책임지는 공동체 의식의 부재와 자신의 필요에만 눈이 밝은 극도의 이기심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불성실과 부주의와 부도덕함이 또 다른 누군가의 그릇된 필요와 요구에 의해 동력을 얻고 어떤 조직의 비리와 비호를 만나 사회구조의 맹점과 법망의 허점을 꿰뚫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잠재적 위협으로 자라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실히 살아갈 어떤 이의 일상을 무너뜨릴 실제적 폭력으로 완성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석촌동 일대에 대규모 지하 동공을 양산하며 지하철 9호선 공사가 한 대기업의 주관으로 진행되고 있고 참여 정부 때 항공기 이착륙 안전 문제로 반대되다 이명박 정권에서 갑자기 사업 승인이 떨어져 급물살을 타게 된 555m의 제2롯데월드가 애초에 모래밭이었던 취약 지반 위 건설이라는 점과 석촌호수 수위 저하와 지하수 유출, 지반 침하, 4780톤급의 초대형 아쿠아리움 바로 아래에 위치한 15만 4000볼트 규모의 고압 변전소 문제 등 태생적 위험 요소들을 고스란히 품은 채 개장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언제 어떻게 흉포한 폭력성의 맨얼굴로 드러날지는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고통을 비웃는 폭력의 일반화가 불러온 폐해

물론 이 땅엔 원초적이고 의도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피폐케 하는 직관적 폭력도 상당수 존재한다. 윤 일병 사망 사건이 그 예이다. 폭력이 일반화된 그들만의 세상을 지배한 폭력의 내성은 피해자들로 하여금 수치와 모멸감을 공포로 삼키게 만들었고 가해자들 내면에 일말의 도덕성이 뱉어 냈을 죄책감을 둔화시키고 무뎌지게 했다. 폭력은 가해자들에게서 피해자들에게로 세습됐고 폭력에 목 졸리던 공포는 폭력으로 일상의 위안을 삼는 쾌감으로 승화됐다. 이러한 직관적 폭력의 일반화는 학교나 직장에서, 폐쇄적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또는 특별히 긴밀한 유대 관계를 보이는 공동체에서 빈번하게 일어나 사회적 이슈가 되곤 한다.

9월 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단식 중인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일베 회원들이 폭식 투쟁을 가졌다. 오랜 단식으로 초췌한 얼굴의 유족들과 동참자들의 면전에서 가져온 치킨을 뜯어 대고 피자를 조각조각 베어 먹던 그들은 대부분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청년들이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폭식에 열중하던 그들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치기 어린 비장함은 역겨움보단 가여움을 불러일으켰고 온라인상에서 일베충(蟲)으로, 키보드워리어로 폄하되던 자신들의 실체가 드디어 현실 강림했으니 반드시 뭔가 보여 줘야 한다는 압박감은 우스꽝스런 결연함으로 피어올랐다.

슬픔과 고통을 뒤로 하고 곡기를 끊은 채 몸뚱이를 축내 가면서까지 전달하고자 하는 애달픈 마음 앞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으로 피자와 치킨을 섭취하는 그들의 모습은 자라지 못한 미숙한 인격의 소유자들 아니면 결함 있는 인격의 소유자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신념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라 여기고 싶었겠지만 그들 행위의 본질은 온라인상에서 습관적으로 내뱉던 반인륜적 막말들이 그저 그들 내면에 일반화되어 관성적으로 나타난 패륜적 폭력일 뿐이었다. 물론 컴퓨터 화면을 온갖 막말로 가득 채우던 현란한 키보드질로 견고히 구축됐을 폭력의 내성이 오프라인에서의 이 가여운 패악질을 감행할 용기를 더해 주었을 것은 자명하다.

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은 자연스럽게 주위 다른 이들의 감정을 끌어들인다. 이러한 감정의 전이는 보편적 공감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다. 적어도 상식과 공의가 숨 쉬는 사회라면 공감으로 전이된 슬픔과 고통 앞에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와 존중마저 내팽개친 채 실없는 조소과 증오의 모독으로 맞설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결코 많지 않을 그들 중 한사람이라면 당신은 공감 능력 결여의 병증 상태며 그 상태가 가볍든 무겁든 반드시 치료를 요하는 폭력의 일반화에 물든 패륜적 폭력의 당사자일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폭력의 시대를 살며 유의해야 할 사항

우리는 현재 우리의 일상에 언제 닥칠지 모를 다양한 형태의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다. 울분에 찬 누군가의 느닷없는 칼부림이나 린치가 묻지마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아예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의 특정 공동체 안에선 구성원 다수의 암묵적 용인에 의한 직간접적 폭력으로 인해 저항할 힘없는 어떤 이의 삶의 존엄성이 유린되고 파괴되기도 한다. 사회 각 분야 책임자들의 그릇된 욕구와 삐뚤어진 도덕성이 융합해 또 어떤 사회구조적 부실로 이어져 국민의 평범한 하루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어떠한 형태의 폭력이든 간에 그 폭력 앞에 마주했을 때 분명히 우리가 유의하고 경계해야 될 것들이 있다.

첫째 폭력에 대한 상대적 인식이다. 폭력의 주체가 타인이냐 본인이냐에 따라 폭력이 될 수도, 자기방어로 변명될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도 '성공했다'는 결과론에 의해 정당화되고 그 의도와 실행 과정상의 위법성이 덮어지고 은폐된 폭력적 유혈 혁명이 얼마인가. 베트남 전쟁도 이라크 전쟁도 힘 있는 한 나라의 제국적 야욕이 빚어낸 폭력적 참사였지만 결국 그럴듯한 정치적 명분으로 덮어진 비열한 전쟁이 아니었나. 동일한 폭력적 상황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입장 차이가 더해지면 그 폭력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각기 제멋대로 달라진다.

우리 사회는 지금도 폭력의 주체나 피해자가 누구냐에 따라, 폭력적 정황과 과정에 따라, 폭력의 주체나 피해자의 사회적 위치나 역할이 무엇이냐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역전이 일어나기도 하고 폭력에 대한 가치와 정의가 달라지기도 한다. 사회구조의 총체적 부실로 인한 폭력적 참사의 피해자인 세월호 유족들이 이젠 사회 정체와 경제 침체의 피의자로 격하되고 있다. 안전한 삶의 터전 확보를 위해 국가의 합법적 폭력에 저항하는 밀양과 청도의 할머니들이 사회 기간 시설물 설치의 방해자들로 치부되고 있다.

둘째 폭력의 당위성이다. 폭력에 있어 당위성이란 결코 부여될 수 없는 의미이다. '마땅히 행사해도 될 만한 폭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상대적 인식이란 덫에 걸려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폭력은 그 자체로 부정적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 당위성을 덧입은 폭력은 '당해도 싼 사람' '맞을 만한 짓을 한 사람' '좀 죽어 봐야 할 사람’들을 양산하고 이들을 과녁 삼아 죄책감 없이 저질러지는 폭력의 일반화를 부추긴다.

폭력이 당위성을 얻을 때 그 부정적 가치는 모호해진다. 인류사의 전철(前轍)을 돌아볼 때 폭력의 당위성은 대체로 힘 있는 자들의 손에 의해 덧씌워지고 이로 인해 모호해진 폭력의 가치 또한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새롭게 규정됨으로써 이들의 권력 유지의 수단이 된다. 그래서 역사 이래 수다한 백성들이 권력자들에 의해 정당화되고 도구화된 폭력의 희생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셋째는 폭력의 도구화이다. 평범한 백성일 뿐인 우리들 또한 폭력의 도구화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는 우리가 일상의 평범하고 사소한 관계 속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드러내는 과도한 수위의 언어와 표정과 몸짓들이 때로 얼마나 폭력적으로 수단화되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 폭력은 때로 존재감 과시나 자기 변명, 그럴듯한 명분 형성에 있어 꽤 유용하게 작동한다.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간에 폭력이 가진 도구로써의 즉각적 효용성을 체감하는 순간 폭력의 노출과 강도는 다양한 방법으로 증가하게 된다. 바로 그 도구로써 극대화된 폭력의 악마성을 세계 각지의 독재적 군사정권하에 자행됐던 잔인한 폭력들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이포역포(以暴易暴)라 했다. 폭력은 폭력으로 갚아지게 된다. 폭력에 대한 피해 의식이 그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폭력을 도구화한다. 불평등하고 불균형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시달리던 폭력의 피해자가 다른 형태의 물리력을 도구화해 또 다른 피해자를 찾아 공격함으로 폭력의 가해자로 전환되는 악순환의 예를 주변과 언론을 통해 심심치 않게 보고 들을 수 있다.

폭력에 맞선 복음의 의연함

폭력의 부정적 본질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가 필요하다. 폭력으로 인한 피해에 길들여지다 가해자가 되고 반복적 폭력의 가해로 생긴 내성으로 다시 폭력을 일반화하고 수단화하는 악순환을 거부하고 저항함으로 그 연결 고리를 끊어 낼 만한 온전한 마음가짐이 요구된다.

십자가 처형이란 폭력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들던 로마 군병들에게 칼부림으로 응대한 베드로를 제어하시고 베드로의 칼질에 잘려 나간 로마 군병의 귀를 다시 봉합해 주시던 예수님의 태도는 폭력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를 순종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로 전환시키는 가치 역전의 역사를 이뤄냈다. 다만 폭력에 맞선 예수님의 의연함을 폭력을 폭력으로 응대하는 이 시대의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재현해 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남을 뿐이다.

며칠 전 봤던 사진 한 장이 생각난다. 광화문광장에서 한 입 가득 치킨과 피자를 물고 폭식 투쟁하던 일베 폭식자의 어깨를 다정스레 얼싸안고 만면에 가득 웃음 짓고 있는 장기 단식자의 모습이었다. 폭식자를 민망케 했던 단식자의 여유로운 미소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패륜적 폭력의 좌절을 목도했다. 폭력적 십자가 처형 가운데 채찍질 당하시고 창에 찔리시면서도 그리스도 본연의 태도를 잃지 않으시고 치유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바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폭력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얻게 한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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