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서 자주 들려 주셨던 명언이다. 지금도 이 말은 나를 나 되게 하는 말이다. 지금도 이 말은 나를 목사로 남아 있게 하는 말이다. 이 시대에는 종교도 참 많다. 그중에 사고를 치고 매스컴을 타며 악명을 떨치는 종교인들도 많다. 다른 종교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적으니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개신교)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목사는 많은데 참목자는 적다. 교회는 웅장하고 큰 건물을 자랑하는데 참된 신앙인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헌금 액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교회의 긍휼과 사랑은 바닥을 친다. 총회장, 감독, 회장은 넘치는데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매스컴이 이들을 조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정말 그런 사람이 희귀하다.

참목자가 있는가

▲ <기독교의 재출발: 이용도 목사 평전>(정재헌 지음 / 행복미디어 펴냄 / 2014. 8. / 456쪽 / 1만 8000원)

80여 년 전 이용도 목사님이 활동하던 시대나 지금이나 그런 모습은 조금도 변한 게 없다. 나는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들려 주셨던 말씀을 이렇게 자주 바꿔 되뇌곤 한다.

"목사가 목사이면 다 목사냐, 목사가 목사다워야 목사지."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난 이런 말할 자격도 실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자꾸 이 말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목사로 남아 있다. 이 시대의 목사란 누구인가. '먹사', '목레기(목사+쓰레기)' 시대를 사는 21세기 이 시대의 목사는 과연 누구인가. 목사 예복 속에 묻혀 있는 사람인가. '장(長)' 자 타이틀 꿰차고 있는 사람인가. 대형 교회를 배경으로 사는 사람인가.

이 질문의 답을 정재헌의 책 <이용도 목사 평전>(행복미디어 펴냄)이 충실히 하고 있다. 성경보다 물질이 앞서고, 낮아짐보다 높아짐이 판을 치고, 말씀보다 교권이 우선하고, 낮은 자의 선한 음성보다 높은 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진리인 양 회자하며, '소금과 빛의 삶'보다는 사회를 먹물로 물들이는 오늘날 교회에 이용도 목사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될까.

목사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회의가 일고 있는 이 시대, 1920~30년대 이용도 목사님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같았다. 목사의 처세술이나 외모가 신앙과 섬김의 영적 사역보다 앞서는 시대가 아닌가. 이용도 목사님이 생각하는 목사직은 '가장 높은 직업'이었다. 지금 과연 목사가 가장 숭고하고 존경받는 직업인가.

"용도에게 목회자란, 고생자다. 성도들로부터 가장 대접받는 자가 아니라, 믿음을 조건 그리고 사랑을 수단으로 하여 섬김으로써 가장 고생하기로 다짐한 사람이 바로 목회자다. 용도 식 '서번트 후드(Servant hood)'이다." (본문 68쪽)

이용도 목사님이 생각하는 목사는 '고생'하는 목사였다. 믿음과 사랑으로 고생과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목자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목사는 참 찾아보기 어렵다. 이용도 목사님은 일생을 섬기며 살았지만 당시 교권은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회에서 몰아냈다. 오늘날도 자꾸 '참목자상'을 말하면 쫓겨날지도 모를 일이다.

참개혁자가 있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유명 목사들이 자신의 탐욕 때문에 교회를 먹물로 물들여도 저항은커녕 곁에서 박수만 치고 있다.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한 물질 추구의 맘모니즘과 교권주의에 대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성적 타락에 대하여도 쉬쉬하거나 묵인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교회가 존립 이유를 상실할 게 뻔한 데도 여전히 교회는 개혁의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보신에만 신경을 써 "그건 아니다"고 말하지 못하는 타락한 교회 지도력,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에,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 사교술이 뛰어난 목사가 득세한다. 줄을 잘 서야 인정받는다. 묵묵히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목사보다 발로 뛰며 자신의 포용력을 알리는 소위 '정치 목사'가 득세한다.

몇 백억, 몇 천억을 들여 교회를 웅장하게 치장한다. 루터 시대의 베드로 성당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루터는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했지만 지금은 "다시 루터가 와도 개신교를 개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용도 목사는 당시의 교회 타락을 용감하게 지적했다.

조선 기독교의 재출발은 '파괴의 생성'을 통해 재정립되어야 한다며, 부패한 교회와 주의 일꾼들이 직업화하는 것을 엄중 경고했다. 예수와 십자가를 재인식하고 교회의 불의, 교만, 탐욕, 거짓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예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1920~30년대 독립 운동가이자 예수에 미친 사람, 최고의 설교자 이용도 목사님은 거지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 주는 사랑의 사도였다. 33살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짧지만 굵은 것이었다. 오늘날 목사들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예수의 정신이 이 사회를 흐르게 할 것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그의 영적 부흥 운동이 기성 교회의 교권에 '이단'이란 정죄를 받았지만 이후 그의 정신을 추종하는 이들에 의해 이어진 '예수 교회'만이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단은 우상숭배를 단호히 거절하고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단들은 앞다투어 우상 숭배한 꼴이다.

80여 년 전 이용도 목사님 당시나 지금의 현실이 너무 닮아 있다. 진정한 목사, 진실한 복음 전도자, 예수의 참된 일꾼이 매도된다. 커다란 교회가 목사를 말해 주고, 많은 교회 재정이 목사를 든든하게 한다. '장(長) 자리' 하나쯤은 있어야 목사로 행세를 한다. 매스컴을 탈 정도는 돼야 목사로 인정된다.

정말 이런 게 맞는 것일까. 이용도 목사님은 당시의 기성 교회에 버림받았다. 후에 복권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가 진정한 목사였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기득권자들이 버린다 해도 올곧게 진실을 말하는 목사, 그만이 참목자이다. 이러면 안 된다. 책의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오늘날 마스크를 쓰고 교회로 침투하여 이단 교리를 설파하는 그런 이단들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이단은 제멋대로 정통의 명찰을 제 가슴에 붙이고 그걸 내세우며 교회의 높은 자리를 꿰찬 뒤 거기서 제 배불리고 있는 양심상 이단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교세 확장이나 정치 세력화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목표상 이단, 하나님의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를 해 대는 횡령상 이단 등이다." (본문 40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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