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 이담에 커서 뭐가 될래?"

"목사님이요."

내 사랑하는 착한 아들아.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천진난만 뛰놀던 때와는 다르게 순결하고 결연한 눈빛으로 "목사가 되겠노라" 벼린 뜻을 보여 주는 너는 아마 목사가 된다는 것의 구체성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를 것이다. 너는 그것이 세상 그 어떤 고귀한 일과 비교한대도 비교가 불가능하리만치 고귀한 일이라 여기고 있겠지만, 실은 지금 그 말인즉 세상 그 어떤 비루한 일과 비교한대도 비교가 불가능하리만치 비루한 일이란 뜻이 되기도 했음을. 이해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예배와 집회에 밤낮으로 불려 다니며 사춘기도 없이 모범생으로 소년 시절을 통과해 온 준수한 아들아. 너는 이런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으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너의 미래에 이런 따위의 곤혹스러운 현실이 노정되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술 한 잔 입에 댄 적이 없고 담배 한 대 피워 물어 보지 못한 채 방황하는 친구들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저 높고 겸손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경배와 찬양으로 수련회와 비전트립으로 청년기를 보낸 순결한 아들아. 누가 너에게 그런 고결한 마음을 심어 주었던 것인지. 그것은 어쩌면 네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전해져온 모천(母川)의 유전으로 우리가 흔히 모태 신앙이라 부르는 그것이기도 할 것이다.

너와는 다르겠지만, 나도 그랬다. 내 아버지는 농부셨다. 소년 시절 나는 농부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숭고한 직업이라 여겼었다. 땅의 소산물로 만생을 먹여 살리는 농업은 과연 누군가는 반드시 맡아야 할 천하지대본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맹신은 내 어머니로 인해 자라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어머니는 말끝마다 "너희는 절대 느이 부모처럼 일평생 땅바닥에 엎드려 지긋지긋한 농사 따위나 짓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던 것이다.

나는 지금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그러나 아직도 농업이 천하지대본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밥과 고기와 반찬들을 생산해 내는 농부들을 숭고한 사제처럼 여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지난한 노동의 과정에 대해서, 그들의 아쉬움 많은 빈한한 생계에 대해서라면 나는 감히 나의 농자천하지대본의 믿음을 액면 그대로 발설할 수가 없다. 무릇 '삶'이란 '사람'이 뭉뚱그려진 말이다. 마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의해 강제로 뭉뚱그려질 때 거기선 어떤 형태가 나타날지, 신념의 아이디얼한 형태가 아닌 삶의 실질이란 그런 것이다.

2.

나의 경우 아직 만나지 못해 봤지만, 목사로서 자신의 목회를 이어 가겠노라 나서는 제자가 생긴다는 것은 보람되고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 스승뿐 아니라 제자의 가슴에도 아직 여물진 않았을 보람과 감격을 미리 맛보는 감동이 있다. 나는 이십대 후반에 이런 보람과 감격의 맛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수련회였는지, 마지막 폐회 예배가 끝나고 그동안 받은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고 확인시켜 주는 프리허그(Free Hug)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의 하이라이트는 참가자들이 목사님을 포옹하는 감사와 격려의 시간이었다.

차례차례 청년들이 목사님과 악수하고 포옹하며 감사를 표했고 목사님도 그들을 끌어안고 격려와 기도를 해 주셨다. 감격해 울먹이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목사님, 제가 목사님께 사도 바울에게 디모데 같은 제자가 되어야 마땅할 텐데, 너무도 부족하여 죄송합니다"고 다소 감상적인 고백을 하였다. 목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사도 바울에게 디모데가 있었던 것처럼, 너를 만난 것만으로 나의 목회는 충분히 보람 있었다." 지금에 와서 이런 회상은 낯이 뜨듯한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때 우리 사이에는 세대를 이어 나가는 영(靈)의 떨리는 감격이 있었던 것이다.

3.

아들아. 너는 최근 유명 목회자들의 탈선과 배임과 횡령과 표절과 성추행과 폭력과 거짓과 세습에 대해서 들어 보았을 것이다. 너는 대형화 기업화 경영 이론 교회성장학 권력 지향 물질주의 물량주의 배금주의 성공주의 은사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사람이 아닌 삶으로, 교회가 아닌 한국교회로 뭉뚱그려져 있는지는 어렴풋이나마 알 것이다. 세상에서 그런 한국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어떤 말과 글로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을 하는지, 또 그런 일들이 현재 우리 사회 속에서 어떤 소비적인 논쟁과 스트레스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너는 아마 그런 한국적 교회를 위하여 순진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너는 너의 순결한 기도의 마음으로 이 모든 것들이 너와는 상관이 먼, 너의 신념과는 거리가 먼, 너에게는 비현실의 현실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너는 이 모든 사람이 뭉뚱그려진 삶이라는 것을 너의 주변에서 너의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게서 심지어 너의 부모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풍문으로만 알고 풍문으로 걱정하고 풍문 가운데 기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나의 이러한 의심이 단지 의심일 뿐이라고 믿고 싶긴 하지만, 솔직히 고백한다면 확신 이상으로 너에게서 느끼고 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시대가 있으니 우리에겐 우리의 시대가 있을 뿐이라 하면 할 말은 없다. 당신이 당신의 길을 왔듯이 우리도 우리의 길을 갈 뿐이라 한다면 말릴 힘도 없다.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내 아들아. 나는 너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한 너의 결단에 옛날 나의 스승들처럼 축복해 줄 수가 없겠다.

아들아. 세습해 줄 번듯한 교회 하나 건축하지 못한 아비가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루쉰(魯迅, 1881~1936)은 자기가 젊었을 때에는 "저 늙은이들만 죽으면 중국이 변화되리라고 희망적인 생각을 가졌었다"고 쓴 바 있다. 여기서 늙은이라 일컫는 부류들은 다만 생물학적 늙은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젊은이를 젊은이라고 부를 수 없다. 나이가 젊은 데도 오히려 병적일 정도로 보수적이고 애늙은 부류들을 너무나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모두가 인식상 늙은이의 연대에 자신의 정신상의 시계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망령처럼 우리를 지배하는 늙은이들의 의식이 그 다음 세대에게서는 충성으로, 그 다음 세대에게서는 굴종으로, 그 다음 세대에게서는 본래 그러한 세계인 것으로 아무런 의구심도 회의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세습(世習)의 본 모습이다. 목회 세습이란 이러한 진짜 세습 체제의 빙산의 돌출부일 뿐이다. 그 수면 아래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끼리끼리의 유기적 세습이 전체적 인습으로 굳어 가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몇몇 세습의 사례들을 비난하는 것으로는 침몰해 가는 타이타닉을 구할 수가 없다.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침몰해 가는 타이타닉으로부터 구명정을 내릴 수 없다.

늙은이의 탐욕의 정신으로서의 세습이 어떻게 '먹고사니즘'의 비루함을 낳는지를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들 아직 늙지도 않은 세대의 목사들은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재산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죽을 때까지 권력을 탐하는 늙은 아버지에게 저당 잡힌 듯 갖가지 포즈의 지지와 동감과 감동과 존경과 너스레와 악수와 부추김과 모방과 경쟁과 감시와 처벌과 눈치와 검열에 의하여 자진해서 아양과 위선을 떨고 있다. 그것은 진정 그렇게 여기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루하고 추악하다. 이 노골적인 위선에 다시 끌려다니는 것은 순진함을 가장한 성도들이다. 내가 순진함을 가장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현실적인 삶에서의 기민한 순발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아야 한다. 세습은 목사들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의식이 무의식을 반영하듯 이 세습 교회의 돌출부가 감추고 있는 전체적 일체화한 기독교를 나는 '먹고사는 기독교'라 불러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말은 네가 근래 들어 본 수사(修辭)로서는 최악의 표현일 것이지만, 나는 순진한 너를 충격에 빠뜨리거나 모욕 주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내가 근심하는 것은 네가 아직도 오해하고 있거나 끝내 빠져나오지 못할 기독교 복음에 대한 오해이고, 말씀에 나오듯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막 13:14)" 것, 곧 한시적 현상이 오히려 본질 노릇을 하면서 끝내 미래의 희망까지 자신들과 함께 침몰시키는 것이다.

4.

크건 작건 먹고 산다는 것은 소박하고 귀엽기까지 한 것이다. 아무리 많이 먹어야 하루 여섯 끼니를 먹을 수 없고 아무리 오래 산대야 백 살을 넘기면 희귀한 뉴스감이 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사는 기독교'라는 말은 참으로 민망한 실상을 들여다보았을 때 혀를 차게 되는 것과 같은 견적이 나오지 않는 난감함을 느끼게 한다. 가령 그것은 내가 그 말을 또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끝에 떠올린 '생계형 기독교'라는 말과는 또 다르다. '먹고사는'이라는 전체적 수식 속에는 '생계'라는 말이 가리키는 살림을 유지해 나가는 고단하고 지루한 개별성보다는 이미 자동 기계처럼 본능이 되어 버린 뻔뻔함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거기엔 수치가 수치로서 드러나 있지도 않지만 감추어지지도 않은 채 방치돼 있다. 모욕이 모욕으로 드러나 있지도 않지만 감추어지지도 않은 채 굴욕적으로 방치돼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먹고사는 실상을 애써 감춘 그럴듯한 모든 포장의 너절함이다. 그것들은 변명이고 장황함이고 무능이고 무식이다. 이 메커니즘 속에서는 문제로 지적되는 그 무엇도 정식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 할 때 목적이 이미 옮아갔기 때문이다. 기왕의 옮아갔으니 그 다음 모든 포장과 변명이란 엿가락을 질질 늘이듯 늘여서 그 먹고사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내용으로 가지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먹고사는 기독교'라 함은 길이길이 먹고사는 방편으로서의 목회라는 종교적 세속성의 절정이자 말단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자 현실이다.

전일(前日) 자식에게 교회를 유산으로 물려주는 세습의 문제는 일부 대기업형 교회들만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거기엔 그들이 자주 변명하는 대로 나름대로의 그럴 수밖에 없거나 그것이 가장 편리한 요소가 있다. 욕망의 이합집산을 다스리지 못하는 비민주적인 체제 속에서는 북한식 로열패밀리의 혈통적 대물림이 유리하기도 할 테니까. 거기에선 자식에게 내가 가진 재산을 물려주고 싶다는 욕망은 부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그 문제가 그다지 핵심적인 사안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나에겐 그 증거가 주로 그들의 당당함에서 찾아지곤 했다.

대형 교회 목사로서 자기 아들에게 목회를 물려주거나 반대로 그 아버지로부터 목회를 세습한 아들 목사들에게서 나는 세상의 이목에 괘념치 않는 과장된 당당함을 보곤 했다. 그것은 재벌급 부자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물질의 상속 과정에서 혹은 상속을 통하여 획득하게 되는 스스로의 위상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과도 같은 당당함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때문에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습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내외적으로 선포하는 바로 그 당당함이라는 위선의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교회 세습의 문제가 더 이상은 그런 독재 체제와 권력의 위선 문제가 아님을 본다. 가계를 이어 가는 물려주고 받음이라는 부자지간 욕망들의 절박함과 불가피함의 아우성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야말로 진정한 세습의 시대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목회 세습의 문제에 있어 작은 교회들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세습이라는 당당한 위선에는 축에 끼지도 못할 민망하고 미안한 일이었다. 그것은 반대로 순교적 희생의 세습으로 칭송을 받을 만한 미담이었다. 일생 3, 40년을 한 공동체를 섬겨 성도 2, 30명이 모이는 교회를 이룬 상태, 아직도 미자립 상태이거나 혹은 그것을 자립이라 부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부친의 소규모 목회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대를 이은 희생으로 비춰지기에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도 그것만이 아님을 본다. 이제 세습은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교회의 문제인 것이고 그것도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대형이든 중형이든 소형이든 우리는 세습을 교회의 가장 중대한 목표로 삼게 된 교회들을 본다. 차라리 대형도 못 되면서 세습에 목매는 모습들을 보게 된 것이다. 차라리 대형 세습은 뻔뻔하고 당당하기나 했다. 일단 비웃음을 받든 비난을 받든 그럴 만한 덩어리가 컸다. 미안한 표현이지만, 대형 교회엔 첫 소나기만 적당히 피해서 세습 권력이 공고해지면 그 다음엔 천둥이 치든 우박이 쏟아지든 방패와 우산이 되어줄 만한 충성스런 신자들이 넘친다. 성동격서로 순식간에 이슈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이벤트를 생산해 낼 능란한 역량도 넘친다. 그러나 이제 먹고사는 기독교의 세습은 그렇지 못하다. 쏟아지는 눈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막장드라마처럼 결말이 우스워진다.

아들아.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누구는 '성골'이니, 누구는 '진골'이니 하는 우스갯소리를 들어보았다. 친·외가가 모두 목사 가문에서 태어난 전도사는 '성골', 한쪽이 목사 가문이거나 적어도 장로 가문쯤 되면 '진골'이라 했다. 나같이 장래에 큰 도움이 못 될 평신도 가문이나 그 자신 아예 무녀리 헌신자라면 '해골'이라 불렀다. 나는 이런 농담을 들었을 때는 그 의미가 지니는 진가를 짐작도 못 했었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도 그만큼 어두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좀 알 것 같다. 진짜 속이면 스스로도 속는다는 식으로 스스로도 속아 버려 진짜 뻔뻔하게 당당했던 저 위선의 세습형은 이제 선구적인 사례가 되었다. 세상의 이목을 향한 고뇌를 수면 아래 침묵의 카르텔 속에 감춘 채 세습답지도 못한 세습을 완료해 나가느라 절치부심하는 저 묵묵한 노력들을 나는 본다. 나는 그들이 더더욱 가슴 아프다. 먹고사는 일이란 다 이런 것이지 싶다.

우리는 지난 백 년 동안 이 먹고사는 문제를 너무나 간과해 왔던 것이다. 우리 중의 일부 약삭빠른 선각자(?)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순수를 빙자해 세상에 무능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뿐 아니라 우리들의 자식들까지 생존 능력을 길러 주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 먹고사는 현실의 중대함에게 역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물려줄 교회라도 있어 세습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는 목사들의 사정과 달리 물려줄 근거도 없는 선교사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경로로 그들의 최종 기착지가 되는지, 왜 그들은 모두들 최종적으로 미국엘 가고 싶어 하는지, 미국에 가서 왜 그들의 자녀들은 목사가 되지 못하고 선교사가 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기독교인도 되지 못하는지, 우리는 부모 된 입장 이전에 복음에 헌신했던 선배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아야겠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전파해 왔던가. 그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있는 것인가.

5.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 선조가 그들에게 명한 그 명령을 준행하나 이 백성은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나의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예레미야가 레갑 족속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 모든 훈계를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5:16~19)

본래 사막의 베두인이었던 레갑의 후손들은 모세를 따라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도 토착 농경문화에 물들지 않고 유목민의 생활을 지켰다. 마치 당대엔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처럼 요나답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정주할 집을 짓지 말고, 포도원을 경작하지 말고,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의 후손은 약 250여 년 동안 그 예언을 지킨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역사를 고증함으로써 패역한 이스라엘이 직면한 재앙을 풀이한다. 중요한 것은 그 정신과 거기서 나온 삶의 방식이다. 아직도 큐티책으로 세상을 읽는 달걀 껍질 같은 아들아, 안면 몰수하고 묻겠다. 현대의 레갑인은 어떤 정신과 삶의 방식을 가진 부류라 할 것인가? 너와 너의 아비가 레갑인이 아니라면 그들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인가? 아들이여. 내가 현대의 레갑인에 대하여 가르쳐 주마.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임박한 환란을 인하여 혼인하지 않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라 권면한다. 바울의 이 권면과 그 정신은 현대의 개신교 메시지에선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목사들은 혼인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가정이 하나님의 세우신 제도라는 목회적 덕담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이 세상은 환란이 임박한 종말의 세상이라는 리얼리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를 못한다. "세상의 불평등이란 한 인간이 맨 처음 땅위에 자기 소유를 표시하는 말뚝을 박으면서 시작되었다"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의 말처럼, 작금 세습 기독교의 문제란 결국 한 목사가 아들을 낳으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나도 루소의 말을 흉내 내어 한마디 하고 싶다. 그들은 애초에 아들을 낳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와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랴.

나는 나의 말을 이렇게 수정할 수밖에 없겠다. "아들아, 너희는 목사가 되지 마라" "너희는 목회를 꿈꾸지 마라" 너희가 목사가 됨으로써 아비의 필생의 목회마저 먹고 살아온 생활의 방편이 되게 하지 마라. 행여 아비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는 것을 자랑과 명예로 여기지 마라. 목사가 된다는 것, 먹고산다는 것이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너의 아버지는 차라리 목사가 아니라 목수가 되었을 것이다.

6.

나에게는 아들이 없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아들이 나에게 없다고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나의 딸들일지라도 목사에게 시집가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그보다 내가 지금까지 말해온 이 '먹고사는 일이라는 정신상의 불가피한 억압으로부터, 거기서 기인된 모든 불가피한 먹고 삶으로부터, 우선적으로 자유롭고 독립된 인간이 되라고 가르친다. 나는 비록 이런 말이 유효할 정도의 규모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사라지면 우리 교회도 해체되어 교인들 각자는 자기의 길을 가라고 주문하고 싶다. 나에게는 그게 맞고 그게 이 '먹고사는 세습 기독교의 시대'를 사는 나의 기독교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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