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인식이 없었던 고대로부터 인류에게 신이란 존재는 막연하고 부정확한 실체 인식이 불러오는 두려움을 동반한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들에게 신은 인과를 추측할 수 없는 자연현상일 수도 있고 자연 속 사물일 수도 있고 죽어 이승을 떠도는 누군가의 영혼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두에게는 공통적으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어 인간의 생사화복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신적 존재들이 인생에 발휘할 길(吉)하거나 흉(凶)한 영향력을 빌어 자신들의 삶에 나타날 화(禍)와 복(福)을 저지하거나 이끌어 내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주술(呪術)적 행위라 칭했다. 주술적 행위에는 여러 가지 구체적 방법과 기술이 존재했는데 이를 복술(卜術)이라 했다. 재앙을 막거나 복을 부르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부적 사용이나 특정인에게 저주를 걸거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머리카락이나 의류, 신체 일부를 사용하는 접촉 주술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주술 행위가 원시종교 형태인 토착적 무속신앙으로 발전했는데 무당이라 명명된 주술사들에 의해 행해졌다. 무당은 굿이라 불리는 한국 고유의 주술적 제의(祭儀)를 통해 개인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빌었다. 이때 무당은 굿 시행에 대한 사례비로 복채(福債)라는 것을 받았는데 이는 무당이 주술 행위로 천기누설을 하게 됨으로써 현세에서 잃게 되는 복에 대한 보상이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주술적 기원

6・25 전쟁 직후 산 입에 거미줄 칠 것 같던 시절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몰려든 곳은 교회였다. 휴전 후 외국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선진국의 원조 물자가 그래도 풍족하게 공급되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양식과 의류 등 물자를 얻기 위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을 일컬어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이라 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느니 교회라도 나가서 목사님 말씀에 아멘하고 찬송가에 박수라도 치면 쌀 한 되라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쌀 한 됫박을 위해, 옷 한 벌을 위해, 목숨 부지를 위해 기도하던 현실적 부르짖음이 교회의 성장과 확산에 발맞추며 변태(變態)에 변태를 거듭해 현세와 내세의 온갖 복과 행운을 담보로 하나님께 빌고 또 비는 '기복신앙(祈福信仰)'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재난과 사고가 본인 인생에서만큼은 비껴가길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께 엎드리는 '액(厄)땜 신앙'으로 진화했다.

현재의 한국 교계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급 목사 두 분이 최근에 헌금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설교를 남겼다고 들었다. 한 목사는 십일조를 떼먹고 암 발병, 화재 등 갖가지 불행을 경험하게 된 이들의 예를 들며 십일조 불이행으로 야기될 불운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했고 한 목사는 자신이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일천번제로 어떠한 복을 받았는지를 강조하며 재물로 하나님의 관심을 끌라고 했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느슨해진 성도들의 신앙심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노련한 목사님들의 성도 훈육용 메시지 같지만 핵심을 꿰뚫어 보자면 어느 허름한 철학관에서 길흉화복의 무난한 제어를 장담하며 복채를 요구하는 박수무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무속적 주술 의식으로부터 영향 받은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이 많은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우려에 우려를 더하게 되는 것은 성도들을 기복신앙으로부터 교도해야할 목회자들이 오히려 기복적 간구를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해 전국 곳곳의 개교회와 기도원에서 열리는 부흥 성회 중 부흥강사 목사들의 설교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레퍼토리는 헌금을 잘해서 복 받은 사람들과 헌금에 인색해서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충실한 헌금 생활을 통해 보장될 복된 내일을 꿈꾸며 아멘하고 혹여 헌금에 인색했던 어제로 인해 마주칠지도 모를 불운이 두려워 회개하며 아멘 한다.

전국 예배당 구석구석에서는 지금도 단순히 목숨 부지의 차원을 넘어서 더 풍족한 삶, 더 풍성한 인생을 위해 진화한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들의 개인의 안녕과 재물의 복과 자식의 안위 등등을 위한 주술적 기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게 온갖 복에 대한 염원이 듬뿍 담긴 예물들과 혹여나 드릴 것을 드리지 않거나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노여움이라도 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짙게 깔린 채 바쳐진 도액(度厄)용 헌물들이 교회 재정을 풍족케 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개인의 안녕과 재물의 복과 자식의 안위 등등을 위한 주술적 기원은 아닐까.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성경이 가르치는 헌금의 진정한 의미와 온전한 시행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유래를 정통적으로는 초대교회의 연보(捐補)에서 찾는데 자기 재물을 내어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마케도니아의 성도들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연보를 통해 고난 속에 있는 이웃을 얼마나 큰 기쁨으로 섬기고 도우려 했는지에 대해 적고 있다(8:1~3). 여유 있는 이가 부족한 이를 돕는 행위의 유의미한 선순환을 통해 서로의 삶이 알맞게 균등해지는 은혜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8:13~14) 그들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이웃 성도를 극진히 돌볼 수 있었던 이유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앎으로 자신을 주께 드려 하나님의 뜻을 좇았기 때문이라 했다(8:5, 9).

스스로의 소유에서 넘치는 것으로 이웃의 모자람을 지탱해 주던 초대교회 연보 개념의 퇴색 내지는 후퇴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헌금에 대한 개념을 구약시대의 제사와 연관 지으려는 시도를 쉬지 않고 있다. 그래 봤자 결국 헌금 봉투에 기재할 명목 한두 가지 추가하는 것 외에 별 다른 의미 부여는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일천번제를 이 시대의 헌금 행위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구약시대의 타임루프에 빠져 허우적대다 신약의 연보에 구약의 제사 개념을 기형적으로 이식한 괴이한 오적용의 대표적 사례이다.

끊임없이 소를 잡고 양을 잡아 하나님과 인간의 일시적 화해를 시도해야 했던 구약시대의 불완전한 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대속자(代贖者)가 되시어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불순종으로 틀어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화목을 이루심으로 생명의 예배로 완성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한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법 안에서 사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굳이 짐승의 유혈이 낭자한 구약의 때로 회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러나 이런저런 신구약의 말씀 구절들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짜깁기해서 억지스런 연결 고리로 삼아 구약시대의 제사를 지금의 헌금 행위와 엮어 놓는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혹시나 해서 소제, 번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 등 구약의 어느 제사를 탈탈 털어 훑어봐도 역시나 개인의 복에 대한 기원이나 다가올 화와 액을 막기 위한 의도나 목적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 근간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기복신앙과 액땜 신앙을 합리화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구약의 제사 의식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 유대 백성들에게 제사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나마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것이었고, 하나님과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로 인해 가로막힌 하나님과 인간 간의 온전한 관계 복원이 목적이었단 말이다. 당시 이스라엘 주위의 고대 제국들이 길흉화복의 전권을 틀어쥐었다 믿었던 불명확한 미지의 신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인신 제사도 주저 않던 때에 유대 백성들은 실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신(神) 인식으로 기복과 액땜이 아닌 거룩한 소통을 위한 제사를 드렸다.

바울이 연보함에 있어 마음에 정한대로 하고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는 사실을 강조한 것은 성도들이 연보를 함으로써 오히려 소유가 줄면 줄었지 현실적으로 기대할 만한 큰 대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보 행위를 통해 현세나 내세에 받을 복이나 혹시 모를 재앙 방지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연보란 오로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이웃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과 사랑과 염려로만 가능할 수 있는 행위였다.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에서 묻어나는 주술적 의도를 걷어 내자

매년 대학 입시 때면 전국 방방곡곡의 절간과 예배당, 성황당에는 학부모들이 자녀의 대학 합격을 기원하며 자신들이 믿는 신들을 향해 바치는 간절한 기도들과 헌금들로 넘쳐 난다. 각자 간구의 대상이 되는 신들의 명칭도 다르고 기원의 장소도 다르다. 그러나 종교를 막론하고 그 모든 기원에서 드러나는 무속적인 사사로운 의도들은 분명하고 동일해 보인다. 그 수다한 기원들 중 교회에서 드려지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헌금이라 해서 다른 신앙들이 보여 주는 주술적 목적성에서 자유롭다 할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헌금에 대한 인식 선상에선 말이다.

혹시라도 지금 교회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그 이름을 외치면서도 재산 증식과 보다 풍족한 물질적 토대 구축의 염원을 가지고 있는가. 차라리 그 간절한 염원을 리스크 대비 수익률 높은 펀드나 채권이나 아니면 이율 좋은 생계형 적금에 쏟아부어 보라. 언제 닥칠지 모를 재난과 액운에 겁먹어 하나님께 얄팍한 헌금 봉투를 내밀고 있는가. 차라리 순수보장 비갱신형으로 괜찮은 보험을 여러 개 들어 봄이 어떨지. 현실적으로 더 큰 위안이 될 것이다.

성도들의 기복과 액땜 신앙으로 인해 갈 곳을 잃은 헌금이 교회의 대형화와 세 불리기에 적극 투자됨으로 오용되고 있다. 여전히 이 땅엔 핍절과 궁핍함 가운데 근근이 연명하며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백성들이 넘쳐 난다. 구제 헌금이라는 명목의 생색은 교회를 더욱 부끄럽게 할 뿐이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주머니를 털어 더 가난한 이웃에게 내밀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헌금 인식을 겸허히 따를 때다.

끝으로 목회자들이여, 축복과 재앙을 당근과 채찍 삼아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내니 어쩌니 하며 성도들을 회유하고 겁박함으로 교회 재정을 불리는 짓은 이제 그만둡시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은 물질 드림의 여부가 아닌 끔찍스런 자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종들의 모습에 천기누설의 대가로 복채를 바라는 박수가 오버랩 된다면 예수님의 못 자국 난 두 손이 얼마나 민망하실까.

복음의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곧 복이시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곧 예수님의 복을 누리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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