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6:13-20] 8월 24일 와싱톤한인교회 주일 설교

1.
지난주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 동안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2013년 3월 13일에 교황으로 선출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 신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했습니다.

▲ 김영봉 목사 (사진 출처 김영봉 목사 페이스북)

저는 그 소식을 접하면서 조금 걱정을 했습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는 교황의 자리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부유한 귀족의 자녀였던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모든 부와 권력을 버리고 가난한 수도자로 살았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인 프란치스코를 교황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그를 모독하는 행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름값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나?"라며 염려했습니다.

그 이후로 교황에 대한 소식을 계속 접하면서 저는 처음의 우려를 접고 마음으로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으로서의 집무를 시작한 후, 최고급 교황 전용차를 사용하지 않고 30년이나 된 중고차를 타고 다닌다거나, 교황 궁에 마련된 숙소를 마다하고 '마르타의 집'이라는 수녀원의 작은 방에 주거하면서 버스로 출퇴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약간의 의혹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정도의 연출은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과 행동은 점점 그를 신뢰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황이 된 후 첫 '세족 목요일'(Holy Thursday)에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남성 10명과 여성 2명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매년 세족 목요일에 교황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예식을 행하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보통 다른 사제들의 발을 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죄수 열두 명을 초청했습니다. 그들 중 가톨릭교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무슬림이 두 명이었습니다. 교황이 여성의 발을 씻어 준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황청에서는 교황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가톨릭교인들이 교황을 부를 때 사용하는 특별한 호칭이 있습니다. Your Holiness가 그것입니다. 우리말로는 '교황 성하'라고 하지요. 대통령을 높일 때 '각하'라고 부르는 것처럼, 교황에게는 '성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에게 이 경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에 '호르헤 신부'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고 하지요. 자신을 소개할 때도 Pope 즉 교황이라고 하는 대신에 '로마의 주교'(the Bishop of Rome)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교황이 되고 나서 새롭게 시작한 일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행동해 왔다는 뜻입니다. 과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할 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교황이 되기 이전에도 프란치스코와 같은 정신과 삶을 흠모해 왔으므로 교황이 되고 나서도 더욱 그렇게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교황으로서 그의 마음은 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곁에 있었고, 가난의 질병을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경고하는 말들을 끊임없이 내어놓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이번 한국 방문 동안에도 많은 미담을 만들어 냈습니다. 공항 영접 과정에서 허례허식을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지요.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에 소형차만을 타고 다녔습니다. 음성 꽃동네를 방문했을 때 몇몇 사제들이 감격스러워 그 앞에 절을 하자 그들을 일으켜 세우며 그러지 말라고 말렸고, 환영식장 단상에 거대한 의자가 마련된 것을 보고는 작은 것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광화문에서 벌어진 시복식 행사에 무개차를 타고 들어가다가 세월호 진상 조사를 요구하며 단식 중인 '유민 아빠' 김영오 씨를 보고 차를 세우고 내려가 손을 잡아 주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자리에 서서 "나에게로 오라"고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손을 뻗은 그 행동은 복음의 정신을 오롯이 드러내 주었다 할 수 있습니다. 로마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어느 기자가 세월호 유가족에게 행한 이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황은 "형제자매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지요.

어떤 사람들은 교황이 내정 간섭을 했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가장 심각한 문제인 북한 인권 문제에 침묵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황이 4박 5일 동안 한국에서 한 말과 행동은 주님의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렇다고 해서 교황 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 제도와 교황에 대한 교리를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을 모든 인간의 정상에 세우고 그를 향해 대중이 열광하고 환호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의 눈살은 저절로 구겨집니다. 복음의 정신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 형제 교회입니다. 다만, 개신교인으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교리와 전통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교황 제도이지요.

교황의 한국 방문 중에 가톨릭이 이단이며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식의 글이 수없이 유포되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그런 글을 적어도 한두 개 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과거에 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를 '열교'(inferior religion)라고 부르며 가톨릭교회로 돌아오지 않는 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지속된 제2 바티칸 공의회(Vatican Council II)에서 이 입장을 수정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개신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가톨릭 사제와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개신교인들 중에도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며 가톨릭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가톨릭의 이단성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고 강단에 서신 목사님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가톨릭이 이단이라면 개신교회가 시작되던 16세기 이전까지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종교개혁이 봇물처럼 터지고 여러 종류의 개신교회가 생기던 시기에 가톨릭은 심히 타락해 있었습니다. 교황들 중에는 정말 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때로 교황이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개혁해 왔고 지금도 개혁해 가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속한 교단은 과연 어떻습니까. 지금의 개신교회는 처음 시작했던 정신과 전통을 심하게 잃어버렸습니다. 영어로 개신교회를 Protestant Church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개신교회'(改新敎會)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제대로 번역한다면 '저항교회'(抵抗敎會)입니다.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인 것들에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개신교회가 설교하고 있는 내용과 행동을 보면 얼마나 복음에서 멀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가톨릭을 나무랄 입장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톨릭의 모든 것을 인정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것이 왜 다른지를 알아 내가 믿고 행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배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연합감리교회는 가톨릭교회를 형제 교회로 인정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면, 이번 기회에 깊이 생각해 보시고 또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렉셔너리에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은 공교롭게도 교황에 대해 가톨릭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본문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오래 전에 정해진 성서 일과인데, 마치 오늘 이 시점에 우리가 겪을 문제를 미리 알고 정한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설교자들은 경외심을 느낍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대해 넘어가기 전에 '교황'이라는 용어에 대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요즈음 개혁적인 가톨릭교인들 사이에 '교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어의 Pope는 헬라어 papas에서 나온 말로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교황'(敎皇) 즉 '교회의 황제'라는 말을 만든 것입니다. 교황의 의복이나 예전을 볼 때, 외형적으로 '황제'라고 부를 만합니다.

이 번역을 거북스럽게 느낀 가톨릭교인들이 있었습니다. '황'(皇) 자를 주의 종에게 사용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종'(敎宗)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교종이라는 칭호가 더 잘 어울립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빌립보 지방에 있는 가이사랴라는 마을로 잠시 휴양을 떠나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13절)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그들의 보고를 다 들으신 후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고 물으십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16절)

베드로가 3년 정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지낸 결과 얻은 결론입니다. 베드로가 보기에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 그분의 눈빛과 숨결, 그분의 인격과 성품은 베드로의 생각을 한 방향으로 인도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분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였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7-19절)

4.
바로 이 말씀이 교황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가장 중요합니다. 가톨릭교회는 베드로를 제1대 교황이라고 주장합니다. 베드로의 권위가 교황을 통해서 2000년 동안 이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황은 교회의 반석 즉 기초가 됩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하늘나라의 열쇠'가 교황에게 전해져 내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결정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여깁니다. 교황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황이 결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승인하신다는 뜻입니다. 교황은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papal infallibility)의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때로 교황의 말이 성경 말씀보다 더 큰 권위로 작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이 본문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을 거부합니다. 교회가 세워진 반석, 즉 기초는 인간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하늘나라의 열쇠는 베드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며 또한 교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개신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지난 500년 동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이 본문을 두고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간격은 좁혀지지 않고 각자 자신의 주장만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 문제는 이 본문에 대한 해석에 있지 않습니다. 교황 제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금세 드러납니다. 잠시, 교황 제도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강의를 하겠습니다. 개신교인으로서 알고 있으면 좋은 상식 수준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교황 제도가 베드로 시대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였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사도'(an apostle)였지 '주교'(a bishop)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시대 이후로 교회는 오랫동안 각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장로'(elder)라고도 불렀고, '감독' 혹은 '주교'(bishop)라고도 불렀습니다)이 자신의 지역을 관리하는 체제로 유지되었습니다. 로마의 주교는 로마제국의 위상으로 인해 다른 도시의 주교보다 영향력이 컸지만, 다른 지역의 주교들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가들에 의하면, 지금과 같이 로마의 주교가 다른 모든 지역의 주교들에게 지배권을 가지게 된 것은 1073년에 로마의 주교로 선출된 그레고리 7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서서히 그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지배권이 인정된 것은 이떄의 일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체제를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사제들은 성경을 뒤지기 시작했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소위 '베드로 수위권'(the supremacy of St. Peter)의 근거를 읽어 냈고, 그 수위권이 로마의 주교에게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거부한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교회들이 그랬고, 러시아 교회들이 그랬으며, 아프리카 교회들이 그랬습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 세계는 크게 둘로, 즉 서방 가톨릭교회(the Western Catholic Church)와 동방 정교회(The Eastern Orthodox Church)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500년 후에 가톨릭교회 내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생긴 것이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회입니다.

따라서 오늘 읽은 본문에 대해 어떤 해석을 하든, 그것이 교황의 수위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교황의 무오설을 뒷받침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교황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의식 있는 가톨릭 신학자들은 더 이상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이어온 전통이기에 그냥 묵인하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다행히, 최근의 역사에 등장한 교황들은 과거의 교황들에 비해 영성과 인품이 훌륭했습니다. 그랬기에 교황 제도와 교황에 대한 교리에 문제가 있어도 그대로 묵인한 것입니다. 만일 교황들이 문제를 일으켰다면 가톨릭교회 내에서 변화의 목소리가 높았을 것입니다.

5.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교황 제도와 교황에 대한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저입니다만, 그래도 인간 프란치스코에게는 감동하고 또한 도전을 받습니다. 교황의 자리가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리로 오용된 적이 많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그를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드는 모습이 보기에 거북스럽지만, 프란치스코는 그 자리를 섬기는 자리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떠받들지만 그는 부단히 낮아지려고 힘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교황무오설'을 주장하고 있지만, 프란치스코 자신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나도 연약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에게 부여되는 특권들을 사양하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정신과 상반되는 제도 안에서 복음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복음의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서로 높아지기 위해 힘쓰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안에 그것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마 20:25-28)

인간이 만든 제도와 조직에는 복음의 정신과 어긋나는 요소들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제가 오늘 교황 제도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드린 이유는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에 대해 너무 지나친 주장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 제도는 완전하다고 주장할 마음은 없습니다. 감독 제도에도 문제가 있고 노회장 제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사제 제도에도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요소가 있고, 개신교회의 목사 제도에도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복음의 정신에 딱 맞는 조직이나 제도를 찾으려는 사람이라면 천국에나 가야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교단, 교리 그리고 제도에는 언제나 허점과 약점과 오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복음의 정신에 더 가까운 교단과 조직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제도와 조직 안에서 복음의 정신을 따라 살도록 힘쓰는 것에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의 정신을 따라 자신을 비우고 낮추고 섬기고 희생할 길을 찾아 왔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하니 복음의 정신이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 결과,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요소들이 에워싸고 있음에도 그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복음의 빛이 다른 것들을 가려 버린 것입니다.

개신교회 안에도 그렇게 복음의 정신을 따라 자신을 낮추며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대중에게 노출된 개신교 유명 인사들이 복음의 정신을 거슬러 자꾸만 높아지려하기 때문에 다 그런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복음의 정신을 따라 낮아지고 작아지고 섬기는 길을 올곧게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복음은 2000년 동안 살아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행동을 통해 깊이 영향 받고 또한 도전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도전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만 그 기준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여기에 가톨릭 신학과 개신교 신학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은 사제들에게는 일반 신도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부름이 주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신학은 목회자에게나 평신도에게나 같은 소명이 주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겸손하고 검소하게 살며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소명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교회 조직과 제도 안에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요소가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이 일하는 직장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기준으로 삼고 그것을 따르려고 노력은 합니다. 하지만 일반 직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철두철미하게 세속적이고 비인간적인 조직에서 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의 정신을 따라 살라는 것이 여러분이 받은 부름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자리가 주어져 있다면 그 자리를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로 만들라는 것이고, 어떤 권력이 주어져 있다면 그것을 섬기는 도구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낮아지기를 소망하고 낮아지는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복음의 빛이 우리를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의 길을 따라 아래로 향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이루십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로 인해 유명해진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의 창설자인 장 바니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풀어 썼습니다.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슬퍼하고 침울해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특히 가장 가난하고 가장 나약한 사람들과 인생을 함께하라.
나는 그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으니
그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그들은 그대의 돌같이 차가운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꿔 줄 것이다.
그때 그대는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고
나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6.
오늘의 기도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골리오 신부가 모델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으로 대신합니다. 노래로도 만들어져 많이 불리고 있는 '평화를 비는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저로 하여금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소서.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주님이시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소서.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소서.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김영봉 /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목회멘토링사역원 원장,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사귐의 기도>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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