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즉 비트와 리듬에 무심하던 고래가 칭찬으로 인한 내면의 각성으로 잠자던 댄스 본능이 깨어나 신명난 춤꾼이 된다. 뭐 이런 내용인가? 칭찬을 통해 일어나는 잠재 능력의 탁월한 활성화 작용을 일컫는 말인 듯하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소리를 즐겨 한다. 긍정적 말 한마디로 위축된 심리가 기세를 얻고 자기 확신의 근거가 부족했던 마음이 풍성한 자부심을 부여받는다.

쓴소리의 순기능이 작동해야 할 때

반면에 양약고구(良藥苦口)란 말도 있다.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뜻으로 인생에 좋은 충고는 귀에 거슬린다는 의미이다. 기원전 209년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경쟁하며 진나라 수도 함양에 입성해서 궁궐의 호화로운 재보와 아리따운 궁녀에 혹해 주저앉으려 하자 장수 번쾌(樊噲)가 전쟁이 앞에 있는데 어찌 영웅이 쾌락에 발길을 멈추냐며 쓴소리를 했다. 이에 유방이 불쾌해하는 것을 본 군사(軍師) 장양(張良)이 이리 말했다.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이롭고, 양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습니다."

사람은 때로 가슴 아픈 질책을 통해 냉정히 현재를 자각하고 이성적인 판단과 분별의 과정을 거쳐 본분을 잊지 않는 현실적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질책에 내포된 깨달아야 할 진실을 외면한 채 자각의 턱을 넘지 못하고 단순히 불쾌함과 거슬림만을 품고 또 다른 누군가의 현실감 없는 무심한 찬가를 기대하며 돌아선다.

인생의 깊이 있는 한 단계를 넘어 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타인의 자신을 향한 마음 긁는 쓴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로 투사된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는 겸허함을 보여 준다. 칭찬은 고래의 댄스 본능을 일깨우지만 질책은 고래로 하여금 자신이 댄서가 아닌 바닷속 거대한 포유류임을 깨닫게 해 댄스를 멈추고 호흡에 신경 쓰게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듣기 좋고 하기 좋은 달콤한 말들이 축사와 위로의 외피를 입고 난무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성을 외면한 칭찬이 잔인한 희망 고문이 되어 결코 긍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현실을 희망적 날조로 덮어 버리는 비극을 초래한다. 사회적 오류와 실책에 눈 감고 밝은 면만을 칭송하는 과도한 긍정이 각성 없는 시대를 낳고 있다. 비판과 질책은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이분법적 갈림길에서 부정적 범주에 처박혀 어두운 면만을 들춰내는 악심 품은 파파라치의 전유물이 되어 성토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고래를 춤추게 할 칭찬보다 춤바람 난 고래를 바다로 돌아가게 할 애정 어린 꾸짖음이 간절한 시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법적 테두리 안에서 신속하게 단속되고 처벌된다. 지도층 인사들도 요즘 웬만한 권력에 기대지 않고선 법적 처벌을 피해가기 힘든 시대다. 그러나 법적 처벌로 춤바람 난 고래를 저수지에 구속 수감할 순 있지만 다시 바다로 돌아가도록 설득할 순 없다. 잘못을 저지른 지위 고하를 막론한 사람들이 법적 단죄를 통해 죗값을 치르든 안 치르든 저지른 죄의 욕구가 분출되는 그 지점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다.

권위자가 내뱉는 과오를 바로잡을 힘 있는 쓴소리

권위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죄 된 욕구를 억누르지 못해 결국 사고 치게 되는 지점을 벗어나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들을 사회적 단죄를 통한 위협과 겁박이 아닌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엄으로 꾸짖어 돌이켜서 떠나게 만들 만한 권위를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죄 짓던 관성에 떠밀려 가는 이들에게 악습을 파하고 돌이키라는 단호한 질책마저 숙연하게 전달할 수 있는 권위를 덧입은 사람이 필요하다.

지극히 대단히 권위적인 시대에 권위주의적(authoritarian) 인사들은 넘쳐 나지만 권위 있는(authoritative) 사람이 부재한 시기이다. 사회에 명망 좀 있다 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감투와 자리가 제공하는 권위주의적 위치에 머묾으로 해서 권위 있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심각한 착각이다. 권위는 디즈니랜드의 미키마우스와 같이 순식간에 감투와 자리에 의해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위는 사람과 진실 된 관계를 맺으며 빚어진 신뢰와 감화, 이로 비롯된 인정(認定)이 그 사람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아우라와 같은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권위를 앞세운다. 이들에게는 세력이 권위요 명패가 권위다. 권위 있는 사람은 권위를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어 둔다. 지나온 삶이 권위요 사람을 대하는 진심어린 태도와 겸손한 자세가 권위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질책은 누구에 의해서냐에 따라 악의적인 힐난(詰難)으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다. 권위 있는 이의 진정성에 여과된 비판과 질책은 그제야 비로소 누군가의 과오를 바로잡을 힘을 지닌 위엄 있는 꾸짖음이 된다. 권위 있는 사람의 이러한 쓰디쓴 꾸지람이 절실한 때다.

고대사회는 지배 계급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다. 우열적 서열을 따라 다양한 신들을 만들어 내고 그 신들을 삶의 여러 영역에 배치했다. 이 신들의 대리자로 신관(神官)층을 형성해 백성들 앞에 세웠다. 신관들은 지배자의 정치, 사회적 의도를 신탁(神託)을 통해 신의 뜻으로 영성화(靈性化)해 백성들에게 하달했다.

그렇게 고대 지배자들은 신관을 앞세운 신탁을 이용해 전지적 신(神)의 시점에서 다양한 메시지를 시의적절하게 쏟아 내어 백성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대로 울고 웃고 무릎 꿇는 마리오네트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이때 고대 신관들이 보여 준 종교적 권위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것이었다. 설사 그 권위가 지배적 정치 이념의 영적 변환 과정을 통해 두려움에 기초 한 조작으로 세워졌다 할지라도 이들이 베푸는 신탁에 의해 백성들 삶의 관성적 습관과 태도가 그 흐름을 달리하게 될 만큼 이들의 종교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교회가 상실한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쓴소리

잡스런 귀신 나부랭이들을 섬기던 고대 신관들조차 기본 장착했던 위엄 충만의 종교적 권위를 이와 같은 분이 없다 하는 참하나님을 섬기는 지금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까. 글쎄 자기 나와바리(?) 안의 성도들에게 권위적 존재일진 모르겠지만 권위는 둘째 치고 그냥 양심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시시껄렁한 연예인들도 휘말리면 몇 년씩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성추문에 휩싸이고도 떳떳하게 목회를 이어 가는 목사들,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태가 만천하에 드러나고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올곧은 목사들.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목사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질책해 반성하고 자숙케 할 권위를 가진 교계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교계에서 이들에게 씌워 준 각종 감투와 매주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물질과 교인 수를 기반으로 한 세력화에 감화되어 모두가 입 다물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교계 화합과 회개를 주제로 한 연합 기도회에선 각종 구설수의 당사자들인 교계를 대표하는 두 목사가 위장된 미소로 각자의 치부를 적극 가린 채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당신이 나보다 목회 잘한다며 서로를 향한 진실을 저버린 칭찬 배틀을 벌임으로 세상으로 하여금 헛웃음을 더하게 만들었다.

고대사회에서 신탁의 실제적 주체는 정치적 지배자였다. 그러나 성경 역사 속 신적 계시의 주체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선 시대마다 당신의 사람을 세워 대언자로 삼으셨다. 아브라함과 대면하셨고 모세와 소통하셨으며 때에 따라 사사와 제사장을 세우시고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이들을 통해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지엄한 의중을 전달케 했다. 이들의 입술로 선포되는 예언적 쓴소리는 백성들의 자성과 회개를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예언이란 무속신앙의 주술적 미래 예측을 말하는 것이 아닌 지금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정 어린 권면과 그 권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완악한 백성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를 담은 것이다.

요나의 쓴소리는 죄악이 관영했던 니느웨로 하여금 왕으로부터 한낮 미물인 지나가는 강아지까지 굵은 베를 입고 금식하게 만들었다. 미가야의 쓴소리는 거짓된 승리의 예언을 일삼던 선지자 시드기야와 거짓 선지자의 예언에 혹하던 남 유다 왕 여호사밧과 북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바 패배와 죽음의 예언을 선포했다. 엘리야의 쓴소리는 나봇을 죽이고 그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갈취한 아합에게 멸망의 예언을 함으로써 옷을 찢고 회개하게 만들었다. 신적 계시의 권위가 충만했던 이 선지자들의 쓴소리에 맘을 조아린 이들은 돌이킴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예언에 속한 경고의 실체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매주 수만 명의 목회자들의 입술에서 성경에서 비롯된 선포들이 터져 나오지만 지금의 한국교회에 세상의 불의한 이기심과 악한 행실을 향해 쏟아 낼 거룩한 권위를 갖춘 예언자적 쓴 소리가 존재하는가. 교회가 잃어버린 이때를 향한 예언자의 일갈(一喝)을 되찾아야 할 때다. 한국교회의 짧은 세월에 걸친 괄목할 만한 성장과 번영에 대한 세계 교회의 갈채에 귀를 닫자. 교회 성장의 롤 모델로서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정중히 사양하자. 종교개혁의 주체에서 종교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금의 처지를 인정하자. 권력 투쟁의 주변부를 맴돌다 하나님 뜻 운운하고 자의적 축복과 축사를 남발하며 안수하던 거짓 된 더러운 손을 씻어 내자.

듣기 좋게 귀에 착착 들러붙는 칭찬의 달콤함에 의존해서 추는 춤은 찬사에 조건반사 된 피동적 무희(舞姬)를 등장시킬 뿐이다. 진정 자신의 춤을 추는 무희의 몸짓은 대중의 온갖 질타와 비판의 쓴소리를 겸손히 수용해 자신의 춤사위를 다시 돌아보고 개선함으로 완성된 인고의 고결한 실체다.

그래, 잠시 하락한 자존감으로 우울할 때 누군가의 선의의 위로와 칭찬에 피곤한 마음을 맡겨도 좋다. 그러나 갈 길을 어지럽히는 들릴라(Delilah)의 찬사는 단호히 거절하자. 나의 춤을 추자. 내가 들어야 할 말을 듣자. 내가 해야 할 말을 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권고하심으로 내 입술을 열자. 그분의 권고는 언제나 옳지만 때로 쓰고 아프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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