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가족이 건넨 노란 리본을 달고 미사를 집전하고, '세월호 십자가'를 로마로 가지고 간다고 한다. 정작 국민들이 자신들을 보호하라고 뽑아 놓은 지도자인 '대통령'이라고 하는 이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절절한 요구들을 묵살하면서 생명을 담보 삼아 처절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유가족들을 마치 '비존재'인 양 취급하고 있을 때에, 세계적인 종교지도자로 간주되는 교황의 이러한 연대의 몸짓을 보면서 종교와 상관없이 감동의 눈물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인지 모른다.

교황의 방한 전후로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하고, 8·15에는 광화문광장에 3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연대의 집회를 하기도 하였다. 타자들의 고통에 함께하며 변화를 촉구하는 사람들의 연대의 몸짓들을 보는 것은 언제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인증샷'들은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어떠한 기능들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는 매우 복합적인 조명이 필요한 중요한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방한 기간 동안 교황이 보여 주는 따스한 연민과 연대의 몸짓을 보면서 한국 사회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들의 염원들이 SNS에 올라오곤 할 때마다, 매우 복잡한 착잡함이 내 속에 가득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세월호가 침몰한 직후 우연히 페북에서 보게 된, "하나님, 바다에 빠진 이들이 춥지 않도록 바닷물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세요"라는 기도를 보았을 때에 느꼈던, 마음 아픈 착잡함이다. 우리 각자는 사실상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절절하게 바라는 사건들을 우리 삶의 여정에서 늘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의 현실 정치 세계 속에서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변화'는 점진적이고, 복합적으로, 그리고 개인들과 집단, 제도들을 통해서 참으로 느리게 가능할 뿐이다. 일상사의 모든 영역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채 운영되고 있는 이 21세기를 살아가는 것-어찌 보면 기적 같은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 누구도 또는 그 어떠한 체제도 '위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의 다양한 정황 속에서 지금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변화를 위해서 갈망하며 일하는 이들이 놓치지 말고 부여잡고 있어야 할 것은 '고도의 인내심'이며, 동시에 '자신 속의 패배주의를 넘어서는 치열한 용기'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정체도 알 수 없는 '고도'의 등장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단순한 듯한 작품이 그렇게 강력하게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 인간의 운명과 같은 '삶의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종교의 이름으로 또는 정치의 이름으로 '고도'가 곧 올 것이라는 선언이 끊임없이 우리 인간에게 통보되고 있지만, 정작 고도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ㅡ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일은 피동적으로 나무 밑에 앉아서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고도에 대한 갈망'을 품고, '고도와 함께 성숙해 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은 팽목항 앞바다의 바닷물을 돌연히 따스하게 만들지 않으며, 그 바닷물에 빠진 사람들을 마술적으로 건져 내지도 않는다. 그 신은 자신의 '독생자'라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처절한 죽음을 고독하게 맞이했을 때에도 '침묵하는 신'이다. 교황의 따스한 감동적 연대의 몸짓이 별안간 한국에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할 '기적 같은 변화'를 가져오게 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이들이, 교황이 세월호 십자가를 로마로 가져가고 기도를 해 주는 일이 돌연히 '세월호 특별법'을 작동시키게 할 기적을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은 이들이, 교황 방한 이후 더 큰 좌절감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이 교황의 방한에서 바랄 수 있는 최대의 희망은, 그러한 지도자의 연민과 연대의 몸짓이, 한국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개별인들이나, 다양한 종교, 사회, 정치 집단들 속에 이전보다 좀 더 많이 그 '연대의 요청성'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기회로서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교황이 8월 18일 한국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한국이라는 운명과 뗄 수 없는 공간 속에 남겨질 우리는 각각의 삶의 터전의 모퉁이들에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무수한 크고 작은 일들의 상호 연관성들을 보면서, 어떻게 지혜와 연대의 힘을 모으는가, 그리고 무엇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바뀌어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성찰하면서, 너무나 늦게 오는 것 같은 변화에 대하여 고도의 인내심을 작동시켜야 한다. 그리고 담담히 그러나 끈기 있고 치열하게 연대의 삶을 실천하고, 인식 변화와 체제 변화를 이루기 위한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고도에 대한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기다림 속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주체로서 사유하고 행동함으로서 그 '고도와 함께 성숙하는 것'-이 과정 속에서 비로소 변화된 세계를 향한 '희망의 근거'가 보이게 보이지 않게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강남순 /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교수. 현재 'WOCATI: 세계신학교육기관협의회'의 회장이며, 최근 저서로는 <Cosmopolitan Theology>(2013)와 <Diasporic Feminist Theology>(2014, Forthcoming) 등이 있다.

*이 글은 강남순 교수의 페이스북에 실린 것으로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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