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탈교황적 교황'으로서의 교황 프란치스코

내가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하여 개인적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의 교황 취임 이후 역대 교황들과는 달리 찬란한 예복, 호화스러운 집, 또는 좋은 차를 거절하고 아주 검소한 생활 방식을 택했다는 미디어에서 보여 주는 그의 '기이한' 행적들이 아니라, 그의 '얼굴'과의 조우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얼굴'이 담고 있는 따스한 '연민의 시선'과 순전한 '웃음'이 전해 주는 그의 '인간 됨됨'의 모습이다. 어느 분야이든 소위 '높은' 직제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상실하곤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간의 얼굴'이라는 것을 늘 아쉽게 느끼던 터였다. 

그의 '탈교황적 교황'의 모습, '인간의 얼굴'을 한 웃음과 만나는 이들을 향한 따스한 연민의 시선은 제도화되거나 또는 상투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인간 됨의 깊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가식적 연기'나 또는 그 어떤 외적 요소들에 의하여 상실되는 것이 아닌, 교황 되기 이전부터 일생 동안 그가 살았던 그의 삶과 존재 깊이에서 묻어나는 부정할 수 없는 '존재의 내음'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이러한 나의 그에 대한 인상은 매우 주관적이며 감정적이어서 그러한 느낌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런데 인간 개별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표지로서의 '이름'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그 유일한 '얼굴'의 중요성을 강조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나 자크 데리다는 아마 이러한 나의 매우 주관적인 느낌을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나는 교황의 방한이 주고 있는 '객관적인' 역사적 또는 신학적 의미를 논의하는 데에 이 제한된 지면을 채우고 싶지 않다. 그러한 것들은 이미 다양하게 발표되었고,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독자들이 접할 수 있기에, 이 글에서 나는 커다랗게 두 가지 측면, 내가 우려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2. 교황 방한에 대한 우려

1) 첫째, '개신교 대 가톨릭'의 극단적 대립화
가톨릭 교황이 어느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가장 예민하게 경계의 촉각을 내세우는 집단은 다름 아닌 '개신교회들'이다. 이는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이미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교황 방한 반대'라는 주제를 건 대대적인 집회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이러한 소식들을 접하게 될 때마다 우선적으로 염려하게 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맹목적 반대 집회에 동원되는 교인들에게 이런 집회가, 가톨릭교회만이 아닌 매우 복합적 집합체인 '그리스도교 일반'에 대하여 또한 더 나아가서 다양한 종교들에 대하여 '신학적 오류들의 절대화'를 삼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교황 방한 반대 집회를 결사적으로 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가톨릭을 '이단화'하거나 '악마화'하고 있으며 '적그리스도'라는 극도의 왜곡된 신학적 오류를 서슴지 않고 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교황의 신격화·우상화'에 반대한다고 하나, 실제적 이유는 그러한 집회를 구상하고 진행하는 이들의 '종교 권력의 확고화'라고 나는 본다. 그러한 집회를 통해서 일부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창출되며, 그러한 공공의 적의 창출은 그러한 집회를 주도하는 개인들과 그 교회/교단 안에서 그들의 위상과 권력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교황의 방한으로 "개신교 세력이 약화될 것이다"라고 외쳐 대는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신학적·종교적 왜곡됨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나는 교황 방한 이전과 방한 중에, 그리고 이후에 무수한 개신교회들의 강단에서 그러한 신학적 왜곡으로 점철된 설교들이 '신의 이름으로' 전달되며, 그러한 설교에 '아멘'을 외치며 기도할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하여 우려한다.

2) 둘째, 교황 방문의 정치적 이용
교황이 이 세계 곳곳의 나라들을 방문할 때마다, 그가 '누구'를 만나는가는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서 '신학적 선언'의 의미를 지닌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 방문하는 공간들은 교황의 개인적 기호만이 아니라, 가톨릭교회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 세계에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4년 6월, 교황은 중동을 방문하면서 팔레스타인 대통령과 이스라엘 대통령, 그리고 정교회 수장을 기도회에 초청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교나 유대교 지도자들도 바티칸으로 초청했다. 이러한 초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황의 이러한 초청은 그들의 존재들을 '모두' 인정하면서 적대적 관계가 아닌 평화적 공존을 '지지하고 격려'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이번 방한에서 교황이 만나게 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보면서, 이러한 교황의 만남들을 정치적으로 역이용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을 우려한다. 대표적인 예로, 교황이 '의전상' 만나게 될 대통령과의 만남이 현 정부의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 정치, 도덕적 오류들과 불의함들을 무마시키는 '정치적 지지나 보증'의 의미로 이용될 가능성에 대하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3) 셋째,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교회에 대한 맹목적 미화
'종교'의 존재 의미란 사실상 '제도'도, '교리'도, '조직' 그 자체도 아니다. 진정한 종교는 자신을 사랑하듯 타자를 향한 연대, 환대,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의 다양한 가르침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들이다. 예수는 '종교'에 대하여가 아니라, 타자를 향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책임과 연대에 대하여 가르쳤는데, 정작 등장한 것은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교회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 교회들은 '타자들'을 향한 폭력, 무관심, 정죄와 배제를 자행하면서 무수한 '죄의 역사'를 반복해 오고 있다. 나는 개신교회, 정교회, 가톨릭교회, 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떠한 종교들에 몸담고 있는 '종교인들'은, 성별, 종교, 인종, 계층, 성적 성향 등에 근거하여 다양한 얼굴의 '타자들'에 대한 다층적 폭력과 배제를 일삼아 온 '죄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과제를 지닌다고 본다.

그 어떤 특정한 '교회'나 '종교'도 이러한 '비판적 성찰'의 요청 (그리스도교적 표현으로는 '회개')의 과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제도화된 종교'는 언제나 '플랜 B'일뿐 그 자체로 절대화된 완전성을 주장할 수 있는 '플랜 A'는 결코 아니며,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든 제도로서의 오류와 한계를 늘 지니고 있는 집합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황의 방한이 어떤 특정한 교회나 또는 종교 집단들이 지니고 있는 무수한 교리적 또는 실천적 오류들의 가능성들까지 미화되고 이상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황'은 그 '화려하고 높은' 직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여타의 제도화된 종교들은 인간의 '해방과 억압'이라는 상충적 기능을 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한 종교적 직제나 구조들을 단순히 자신들과 다르다고 이단시하고 정죄하거나, 또는 반대로 맹목적으로 미화하고 절대화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3. 교황 방한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들

1) 첫째, 종교를 종교 되게 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지난 2014년 4월 교황은 부활절 전의 '세족식'을 거행할 때에 이전의 교황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혁명적 세족식'을 거행했다. 그는 12명의 '장애인(disabled)'들의 발을 씻기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다. 어찌 보면 연례행사로서의 한 상투적 예식일 수도 있는 이 세족식이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그가 선택한 12명의 사람들 때문이다. 우선 그들은 소위 '비정상인'들이었으며, 더구나 '여성'들과 '이슬람교도'가 포함되었다. 이 세족식의 장소가 '소년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 장애인들이었다는 사실, 남성만이 아닌 여성도 포함되었다는 사실, 그리스도교인만이 아니라 이슬람교도도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초청자들의 나이도 16살부터 86세까지 있었다는 사실—나는 이러한 사실에 매우 중요한 신학적·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질문에서 그가 답한 "신이 아닌 인간인 내가 도대체 누구를 정죄할 수 있는가?(Who Am I to Judge?)"라는 의미의 선언은 교황이 현대 사회에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억압과 배제의 문제에 경종을 던지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현대 세계는 상상할 수 없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이루어 내고 있지만, 여전히 성별, 인종, 종교, 육체적/정신적 장애, 종교, 나이, 또는 성적 성향에 근거한 차별과 억압들이 더욱더 복합적인 양태로 존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 주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들과 주변인들에 대한 관심은 그의 다양한 '기이한' 행보와 말로서 이미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으며, 좁게는 가톨릭교회 넓게는 종교 일반과 사회에 종교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게 한다. 즉 종교란 무수한 사회적 약자들, 작은 자들(the Least), 주변인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 한국 사회에 가장 절실한 문제로 남아 있는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 가족들이 한국 정부에 보내는 절절한 요청이, 교황과의 접견을 통해서 보다 거국적인 관심사로 부각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한국의 종교들이 그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재설정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2) 둘째, 진정한 에큐메니즘으로의 전환점이 되기를
'교회들의 하나 됨'이라는 우선적 목표를 가지고 전개되어 온 에큐메니컬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인류의 하나 됨(unity of humanity)'이다. 이 '일치'란 개념은 '획일성(uniformity)'라는 말로 혼돈되거나 또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WCC(세계교회협의회)나 NCCK(한국교회협의회) 등과 같은 특정 기구들에 의해서만 주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제한된 이해이다. 한국은 이러한 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인 '교회들의 일치'의 단계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영어로는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을 모두 아우르는 용어인 'Christianity'가, 한국말로 쓰일 때에 개신교는 '기독교', 가톨릭은 '그리스도교'라고 표현하면서 그 용어조차 이미 서로의 존재를 배타적으로 구별하게 한다.

예수의 '너희는 하나 되라(요 18:21)"라는 것은 특정한 교회나 종교들 안에서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하나 됨'에 대한 요청이다. 따라서 에큐메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교회의 하나 됨'만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진정한 의미의 정의와 평화, 평등'이 사람들 간에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미 그의 다양한 행적에서 보여준바, '인류의 일치'라는 커다란 비전을 가진 그의 방한이, 한국 사회의 크고 작은 공간들에서, 교회들의 일치만이 아니라 진정한 에큐메니즘의 목표인 '인류의 일치'를 향해 새로운 발걸음들을 내딛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3) 셋째, '포괄의 원'의 점진적, 급진적 확장—조용한 혁명의 바람이 되기를
어떤 '사건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출되고 만들어가야 하는 '지속적인 프로젝트'라고 보기에, 나는 교황의 방한 그 자체가 이미 고정된 어떠한 '절대적 의미'를 저절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방한의 유의미성이 지속적으로 확보되는 것은, 가톨릭교회는 물론이고, 개신교회, 다양한 종교들, 한국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의 방한을 지켜보고 있는 전 세계에, '종교'의 존재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를 상기시켜 주는 의미로서 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진정한 종교가 무엇이며, 올바른 종교 지도자는 어떠한 '얼굴'과 '시선'을 지니고 타자를 향해 끊임없이 포용하고 환대하는가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통해 새롭게 부각되고, 재확인되고, 새로운 도전으로서 남게 되기를 바란다. 그의 방한 의미는 교황을 '종교적 권력' 절대적의 화신으로 확인하는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보이고 있는 '종교 권력의 상대화', 그리고 '교황의 탈교황화' 등의 행보들이 지닌 복합적인 의미들이 하나의 지속적인 '프로젝트'로 한국교회, 종교 들 그리고 사회에 남게 되어야 한다.

'권력·힘'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확장하고, 영구화하고, 절대화하는 것으로 그 권력을 남용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교황'의 자리가 하나의 종교적 권력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이해되고 있는 점을 보다 긍정적으로 활용하여, 교황 방한을 통해서 한국교회, 종교, 사회에 무수한 주변인들의 정의·평등·평화를 확산하는 데에 쓰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라는 울타리가 성별, 계층, 교육 배경, 종교적 배경, 또는 성적 성향 등에 의하여 그 '포괄의 원'을 배타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때까지 그 '포괄의 원'을 조금씩 넓히는 작업들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종교의 존재 이유란 두 가지, 즉 '나'의 삶의 의미 물음, 그리고 동시에 '나'를 넘어서서 타자들을 향한 책임과 연민의 과제가 아닌가. 이러한 두 가지 과제들에 충실한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경계를 넘어서서 '포용·연대·책임의 종교'로의 비전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조금씩 가능해질 것이다.

종교 권력의 확장을 위한 담론과 실천을 양산하는 데에 주력하는 '제도화된 종교'의 담을 홀연히 넘어서서, '종교 없는 종교', 즉 타자에 대한 연민, 책임, 연대라는 '생명 확장의 종교'로의 이행을 하는 데에 이 교황의 방한이 한국교회와 사회의 작은 귀퉁이들에서라도 조용한 혁명적 바람을 일으키기를 염원한다. 이미 그 연대의 바람, 정의의 바람이 "눈물 흘리는 사람 내쫓고 시복식 열 수 없다"는 강우일 주교의 최근 선언에서처럼 광화문 광장과 같은 한국의 작은 모퉁이들에서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불기 시작하는지 모른다. 교회와 세계를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정의와 평화, 평등이 확장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여정에 찾아오는 조용한 '혁명의 바람'-이것이 교황 방한에 내가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의미가 되리라.

강남순 /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교수. 현재 'WOCATI: 세계신학교육기관협의회'의 회장이며, 최근 저서로는 <Cosmopolitan Theology>(2013)와 <Diasporic Feminist Theology>(2014, Forthcoming) 등이 있다.

*이 글은 강남순 교수의 페이스북에 실린 것으로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가톨릭뉴스지금여기>에도 게재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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