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가난한 자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과도 같은 레위기에서는 희년이 도래했을 때 토지 반환, 노예해방, 부채를 탕감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는 가난한 이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정당화시킬 뿐만 아니라 착취와 억압을 부추기는 반(反)성경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가계 부채 1000조 원이 넘는 시대, 극심한 채권 추심에 시달리며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생계형 채무 불이행자들이 100만이 넘는 현실 속에서 성경이 명하는 바와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연재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부채, 오늘의 현실 : 빚 독촉의 지옥 - 제윤경 대표(희망살림 상임이사)
2. 부채 탕감의 성경적 근거 - 정종성 교수(백석대 신약학)
3. 교회는 빚 탕감의 실천 공동체 - 방인성 목사(희년함께 공동대표)
4. 부채 탕감에 대한 교부들의 관점 - 김유준 목사(연세대 겸임교수)
5. '희년'과 부채 탕감의 근원적 해법 - 남기업 소장(토지+자유연구소)

2014년 3월 대한민국의 가계 부채는 1024조 원, 국가 부채는 1100조 원에 달한다. 개인 채무자가 35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2500만 명의 경제활동 인구의 비율로 본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빚더미에 깔려 허덕이고 있다는 말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채무와 헤어나지 못하는 빈곤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취약 계층이나 일용직, 비정규직과 같은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의 고충은 더욱 심각할 것이다.

빚에 허덕이는 채무자에게 그리스도인이 전해 줄 '복음'은 무엇이겠는가? 부채 탕감만큼 '기쁜 소식'(禧音)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일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은 다른 사람을 옥에 가둔 불의한 자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채 탕감 문제를 영적인 문제, 즉 죄 용서로만 해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통한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화가 이루어졌던 주후 4세기경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교부들(church fathers)은 부채 탕감을 비롯한 재산과 소유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 그들의 생생한 설교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삶의 깊은 울림과 공명이 되길 기대해 본다.

오늘날 소유권 개념은, 대다수의 가난을 볼모로 소수에게 집중되는 부의 축적을 합법화했다. 이는 로마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 당시 초대 교부들은 '합법적이지만 불의한' 로마법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기준에 비추어 강력한 비판과 도전을 했다. 특히 토지 불로소득이나 막대한 세습재산과 고리대금과 같은 불의에 대해서는 살인죄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천부인권마저 박탈하는 죄악이며,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로마 시대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들은 전쟁이나 귀족들의 횡포로 대부분 점점 더 깊은 빚의 수렁에 허덕였고 비참한 상황에서 생계를 근근이 유지해야만 했다. 그 당시 지주들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소작농들에게 보통 소출 중 2/3~3/4을 바칠 것을 요구했고, 대부분의 다른 지주들은 수확량의 50%를 요구했다. 게다가 소작료 지불로, 대토지 사유지의 소작농들은 지주들의 가족 농장에서 노동 봉사를 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4~407년경)는 마태복음 설교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주들은 농민들에게 점점 계속되는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소작료를 부과했고, 고된 노동을 요구했다. 농민들이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 내내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도 빈손으로 돌아오며 일과를 보낼 때보다 더 비참한 장면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부채로 인한 비참함이나 굶주림보다 더한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토지 관리인들, 압류, 독촉장, 체포,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강제 노동으로 고통을 받았다."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330~379년경)도 시편 14편 주석에서 만연된 부패에 대해 탄식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착복하고 있는 고리대금업자들을 통렬히 비판했다. "너의 의무는 사람들의 빈곤을 구제하는 것이었는데, 너는 가난에 허덕이며 버림받은 사람의 진까지 몽땅 빼앗고자 자신의 필요를 늘렸다. 마치 어떤 의사가 환자들을 방문해서 그들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체력마저도 빼앗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도 비참한 사람들의 불행을 소득의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농부들이 풍작을 위해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너도 너를 위해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이 빈곤과 궁핍에 처하도록 간구하는 것과 같다. 너는 네가 이득을 위해 계획함으로 너의 부를 쌓는 것보다 너의 죄악을 훨씬 더 많이 보태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가?" 또한 바실리우스는 차용인의 가난으로 이익을 취하면서, 차용인으로 하여금 드러나지 않은 엄청난 이자를 갚도록 요구하여 결국에는 생명을 담보로 노예에 이르게 하는 고리대금업자를 단호하게 책망했다. "너는 너의 부를 쌓는 것보다 너의 죄악을 더 쌓고 있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339~407년경)는, 부유한 소수가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반환해야 하는 마땅한 의무임을 강조했다. "땅 속에 황금을 묻어 둔 자는 그 마음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고 비판했다. 암브로시우스는 부채 탕감과 나눔과 같은 부의 재분배는 단순한 반환 행위로 보았다. 소수의 수중에 부가 집중되는 것은 다수의 가난한 자들의 타고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소유에 집착하고 있는 소유자들이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탄하면서, 재산에 노예가 되어 부자 청년처럼 재산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한 채, 무기력해져 있음을 지적했다. 재산에 대한 실질적 소유자, 진정한 주인은 바로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며, 부의 나눔을 촉진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암브로시우스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는 말씀을 통해 "재물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재물이지만,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악한 것"임을 밝혔다. 즉 "네가 공의를 위해 곳간을 열어 가난한 자들에게 양식을 주고, 궁핍한 자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며, 눈먼 자들에게 눈을 뜨게 하며,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준다면 그것이 재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는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준다면 하나님을 채무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11년경)도 이 말씀을 통해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공동 창고에 가져다 놓는 것이 구원을 베푸는 공의라고 했다.

"가난한 자들의 마음 안에 재물을 쌓을 것"을 촉구한 암브로시우스는 가난한 자들의 탄식을 외면하면서 궁전같이 화려한 건물과 재산을 늘리고자 해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부자들을 비판했다. "너의 벽을 화려하게 장식할 때, 너는 사람들을 헐벗게 한 것이다. 헐벗은 사람이 너의 집 앞에서 탄식할 때, 너는 그를 외면한다. 그가 탄식할 때, 너는 어떤 대리석으로 네 마루를 깔아야 할지에 열중하고 있다. 가난한 자가 돈을 빌리려 할 때, 수중에 돈이 없다고 한다. 어떤 이가 양식을 구걸하는데도, 네 말은 황금으로 만든 재갈을 채워 놓으면서 값진 장식품으로 즐거워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한 알의 곡식도 갖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는데도, 너는 네 곳간을 닫아 놓는다. 사람들은 비참하게 울부짖고 있는데도, 너는 보석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네 손가락에 끼고 있는 보석으로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00여 명의 유태인을 구했음에도 자신의 반지를 보면서 방탕을 후회하며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지 못했음을 통탄스럽게 여기며 눈물 흘린 쉰들러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권력과 결탁하여 화려한 건물과 외형에 치우쳤던 중세 교회처럼, 오늘날 한국교회도 수많은 돈을 들여 화려한 건물을 지으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그 당시 부자들이 양심도 없이 자신의 재산을 자랑하는 것에 대해 통렬하게 비난했다. 소수의 부에 대한 집착으로 대다수의 계속적인 빈곤이 초래되는 것이다. 암브로시우스는 그들의 사치가 다른 이들을 헐벗게 만들어 내는 인과관계에 주목했다. 부자들의 터무니없고도 호화스러운 삶은 단지 가난한 자들에게 이전부터 계속되는 상처와 박탈감을 증가시키는 모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성직자들의 직무론에서 가난한 자를 향한 자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네가 헐벗은 자를 입힌다면, 너는 스스로 공의로 옷을 입는 것이다. 네가 나그네를 네 집으로 영접하고, 네가 궁핍한 자들을 공급한다면, 그 사람은 너로 인해 성인들과 교제를 하게 되고 영원한 안식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의 필요, 그리고 곤궁한 자들의 고초를 이해하는 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심판의 날에, 그들은 주님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비의 빚을 지신 분이 될 것이다."

크리소스토무스는 "너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가? 네가 주는 것은 네 것이 아니라, 네 주님의 것이며, 너뿐만 아니라 너와 함께 사는 종들 모두의 것"임을 강조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막대한 재산 축적의 기원은 필경 불의에 기인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온종일 탄식과 눈물, 수만 가지 역경에서 살아가는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을 정죄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 고소하는 자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강하게 질타했다. 특히 크리소스토무스는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재물을 풍족히 주신 것은 "구제를 풍성히 하고 공의로 분배하는 부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소수의 수중에 축적된 재산은 부채 탕감과 기부를 통한 사회정의를 성취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로 불리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경)는 부자들에게 강조했다. 세습재산을 통해 자녀들이 창조주보다 재산을 더 의지하지 않게 해야 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남는 재산을 함께 나누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이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많은 수도원 나눔 공동체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구빈원을 세워 가난한 자들의 빈곤 문제를 해결했으며 재물을 공의롭게 사용하도록 힘썼다.  

[부채 탕감 프로젝트 후원하기]
굿펀딩 : http://goo.gl/8et6NZ
계좌 이체 : 우리은행 1005-602-539056 (예금주 : 희년함께)

김유준 / 은진교회 담임목사,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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