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일부 교계 단체가 가톨릭과 교황을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8월 12일에는 일산 킨텍스에서 대규모 반대 집회가 열린다. 이들의 반가톨릭 인식은 어디서 비롯했을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실장은 선교 초기 근본주의 신학을 지닌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초기 개신교와 가톨릭은 공동 사업을 위해 손을 맞잡기도 했지만, 교세와 교리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진 제공 에큐메니안)

지난 7월 22일, 광주 겨자씨교회(나학수 목사)에서 가톨릭과의 일치 운동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앞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김영주 총무)와 한국 가톨릭은, 체계적·공식적 신학 교류를 통해 교회 일치 운동을 벌이자는 취지로 5월 22일, 한국그리스도교신앙과직제협의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호남 지역 목회자와 교인 1500여 명은, 가톨릭과의 일치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자 배신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교회를 지키자고 다짐했다. 로마가톨릭&교황정체알리기운동연대(운동연대) 송춘길 조직위원장은 종교개혁 500년사와 한국교회 130년사에 종지부를 찍는 위험한 일로 규정했다.

한국 개신교의 반가톨릭 역사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기 시작한 18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본주의 신학을 등에 업은 선교사들은 가톨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국가권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개신교를 한국 사회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미국 종교로 소개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개신교보다 100년 일찍 선교해 온 가톨릭은 제국주의 종교로 부각했다.

기본적으로 미국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에게는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이 깔려 있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 종교계는, 유럽에서 대거 유입되는 가톨릭계 이민자들로 인해 적개심을 가지게 됐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실장은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출발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가톨릭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특히 다른 교단과 달리 근본주의 색채가 강한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한국 개신교에 반가톨릭 현상이 자리한 것으로 봤다.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1892년 토론토에서 열린 제5차 장로교 총공의회에서 가톨릭이 선교지의 왕궁과 친밀을 도모하고, 권력층이나 세도층과 결탁해 정사나 조정의 문제에 수시로 개입한다고 비판했다. 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한국어에 능통한 신부들과 높은 인쇄술, 부지 매입에 적극적인 가톨릭을 언급하며 로마 가톨릭교회가 한국을 손에 넣으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개신교인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훗날 불신자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인을 회심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잇달아 방한하자 가톨릭은 교세 확장을 우려했다. 가톨릭 제7대 조선 대목구장인 블랑 주교는 "오류를 설교하는 신교 목사들이 활보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미묘한 관계 속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은 대외 사업을 위해 손을 맞잡기도 했다. 전염병 퇴치 사업과 1889년 발생한 기근 대책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구호금 분배 문제로 갈등을 빚으며 사이는 멀어졌다. 갈등은 신도 간 충돌로 이어졌다. 1900년,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신자에게 성당 건축 기금을 강요했는데, 응하지 않자 성당에 끌고 가 구타를 했다.

교리 논쟁도 일어났다. 1907년 가톨릭이 개신교 비판을 위한 책을 펴내자, 이듬해 감리회 신학자 최병헌이 번역한 <예수텬쥬량교변론>(정동예수교회)에는 교황 무오설, 고해성사, 마리아의 중개자 역할, 신부의 독신 생활 등을 언급하면서 가톨릭이 성서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해방 이후 개신교 지도자들은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 야당 부통령 후보로 장면이 출마했는데, 여당은 장면이 가톨릭이라는 이유를 들며 공세를 퍼부었다. 당시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 사무장이었던 박영출 목사는 선거 연설에서 "가톨릭 교인인 민주당 부통령 입후보 장면 박사가 당선되는 날에는 우리나라를 바티칸의 교황청에 팔아먹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장을 역임한 전성천 목사는 1956년 4월 <한국기독시보>에 가톨릭 신자가 집권할 경우 한국이 교황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면서 개신교 신자는 장면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썼다.

불신과 대립으로 얼룩졌던 개신교와 가톨릭의 역사는 1960년대 이후 교세 확장에 치중하면서 직접적인 충돌에서 벗어나게 된다. 로마 가톨릭은 1964년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기독교 분열의 책임을 인정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후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1977년 공동번역성서를 출간했다. 

신학자들은 가톨릭 반대 운동을 우려한다. 김진호 실장은 전 세계 그리스도교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계를 회복해 가는 추세라면서 이웃 종교와 대화를 나누는 게 시대정신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가톨릭 반대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고도 했다.

채수일 박사(한신대학교 총장)는 가톨릭 반대 운동은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이라고 말한다. 교황과 가톨릭을 반대하는 신학적인 논리와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가톨릭은 이단이고, 적그리스도라는 일부 단체의 주장은 16세기 논리라며, 오히려 지금은 무례한 공격에 가깝다고 했다. 채 박사는 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종교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면서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으로 종교 지도자가 많은 도전을 받고 각성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주요 참고 문헌
<1950년대 중후반 이승만 정권, 개신교와 천주교의 갈등> (강성호, 성균관대, 2014)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류대영,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천주교와 개신교 : 만남과 갈등의 역사> (신광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정정합니다. 기사에서 언급되었던 피터 언더우드를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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