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가난한 자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과도 같은 레위기에서는 희년이 도래했을 때 토지 반환, 노예해방, 부채를 탕감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는 가난한 이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정당화시킬 뿐만 아니라 착취와 억압을 부추기는 반(反)성경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가계 부채 1000조 원이 넘는 시대, 극심한 채권 추심에 시달리며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생계형 채무 불이행자들이 100만이 넘는 현실 속에서 성경이 명하는 바와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연재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부채, 오늘의 현실 : 빚 독촉의 지옥 - 제윤경 대표(희망살림 상임이사)
2. 부채 탕감의 성경적 근거 - 정종성 교수(백석대 신약학)
3. 부채 탕감에 대한 교부들의 관점 - 김유준 목사(연세대 겸임교수)
4. 교회는 빚탕감의 실천공동체 - 방인성 목사(희년함께 공동대표)
5. ‘희년’과 부채 탕감의 근원적 해법 - 남기업 소장(토지+자유연구소)

작금의 한국 사회는 '가계 부채 경고음'이 도처에서 충격적인 지표로 확인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13년 6월 '가계 부채의 현황 및 대응 방안'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명목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2003년 73.9%에서 2012년 91.1%로 20% 포인트 가까이 급증했다. 특히 2013년 3분기 기준 991조 7000억 원을 기록한 한국의 가계 부채는 전분기보다 12조 1000억 원이 늘어나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2014년 1월 현재 1000조 원을 이미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는 2003년 12.6%에서 지난 2008년 말 149.7%로 늘었다가 2012년 163.8%, 지난 9월 말 169.2%까지 치솟았다.

이렇게 급증하고 있는 가계 부채가 한국 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뇌관이라는 지적이 계속 현실화되고 있다. 더욱이 청년 실업, 고용 불안, 전세 대란까지 겹치면서 원금 상환은커녕 이자를 갚는 것도 벅찬 한계 가구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경제를 벼랑으로 내몰 만한 시한폭탄의 초침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계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비책 마련이 매우 시급한 현실이다. 필자는 이러한 수치들을 근거로 공조직이나 국가의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의 대 국민적 조율 기능이 사실상 붕괴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앙 공동체는 과연 이 붕괴 위기 직전의 사회에 어떤 긴급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본고는 빚 탕감(debt-remission) 행위에 대한 성서의 몇 가지 용례와 당시 복음서의 세계를 비교하여 살피고, 동시에 그러한 결과 위에 현대 교회를 위한 해석적 적용 방안을 고찰하고자 한다.

누가복음 16장의 청지기 비유, '빚 탕감'의 복음적 당위성

눅 16:1-9의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는 해석자들의 다양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그 일치된 비유의 의미를 밝히는 데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앞뒤 맥락 속에서 비유의 주요 관점을 살피게 되면 결국 이 비유는 이 세상에서의 재물 즉,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비유 세계 속에서 청지기직의 박탈 위기에 있는 청지기가 소작인들의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는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많은 논란이 있어 왔는데, 주인의 칭찬을 해석의 중요한 한 축으로 삼는다면, 화자인 예수의 의도가 결국 소작인들의 빚 탕감을 적극 주문하는 것으로 비유의 의미를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빚 탕감의 주문이 굳이 이 맥락에서 강조되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비유의 원래 의미를 발견하는 것과 사실상 직결되어 있기도 하다.

누가복음 16장의 비유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주목하여 볼 때, 비유 자체가 당시 팔레스타인 사회의 엄청난 부채 문제를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특히 5절의 '빚지다'라는 동사는 당시 소작농들의 심각한 빚의 정도를 나타날 때 사용하는 보편적인 표현이며, '기름'과 '밀'은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주산물로서 빚을 갚는 주요 수단이었다. 비유 세계 안에 등장하는 소작인들이 각각 지고 있던 부채의 엄청난 규모는 당시 농민들의 삶이 얼마나 가난 속에 무너져 내렸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요세푸스와 필로는 당시의 경제 상황 속에서 반드시 빚 탕감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빈번하게 언급하고 있다.

비유 세계 안에서 각 소작인들은 50%와 20%의 빚 탕감을 허락받는데, 그러한 엄청난 빚 탕감 규모와 비율은 수치상으로는 오늘날 한국에서 법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개인 워크아웃'이나 '개인회생' 등의 제도와 매우 유사한 탕감 규모다. 당시 로마의 농작물에 대한 세금 부과는 어떤 경우 심지어 50%까지 부과될 정도로 억압적이며 수탈적이었다(눅 3:13-14, 20:22, 23:2 등은 그러한 억압적 수탈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 비유에 직접적으로 나타나고는 있지 않은 이러한 억압적 수탈은 막 12:1-12 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 공민권을 박탈당한 소농민들과 중간 관리 엘리트 그룹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날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100% 완전한 탕감이 아닌 것에 대하여 우리는 누가의 신학이 농민들의 급진주의를 다소 완화시키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교훈의 화살이 결국 채무자보다는 항상 채권자들을 향하기 마련인데, 그들을 다소 부드럽게 권고하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누가의 권고 논리 역시 결코 극단적이지 않고 매우 설득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무엇보다 누가 신학에 있어서의 빚 탕감은 빚 탕감 행위의 당위성과 근거를 분명히 제시해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빚 탕감에 대한 설득의 근거는 매우 근본적인 것으로 자신들의 부 축적이나 행복한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상기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써, 누가의 빚 탕감 주문이 결코 사회구조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자들을 추방하는 급진적 방식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마음을 힘없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돌리기 위한" 부드러운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결코 채권자들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나눔의 미덕"이라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누가의 빚 탕감은 당시 초기의 신앙 공동체에게 가족적인 나눔이라는 근거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행동에 옮기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복음서보다 약간 앞서 기록된 필로(Philo) 역시 탕감이나 안식년 휴경까지도 민족적 관계나 종교 공동체적 연결 관계를 뛰어넘어, 빚에 눌린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보다 '보편적인 인도주의적 정신'에 호소하는 특징을 이미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특징은 그레코-로만 사회의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에 함몰되는 대신, 즉 당시의 지배적 관계 구조인 '후견인 제도에 입각한 교제'를 뛰어넘으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비유의 화자인 예수는 공동체 내의 부유한 바리새인들에게 '계산적인 균형적 나눔'을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아무런 대가의 기대 없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진정한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 61:1-3을 인용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취임 설교'에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나라 복음'의 핵심으로 반복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설교(눅 3:10~14)와 삭개오 사건(19:1~10), 그리고 다른 많은 말씀과 사건들을 통하여 일관되게 부각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정확하게 갚아 줄 '최고의 후견인'이요(눅 6:35b, 14:14), 가난하고 소외된 공동체 구성원들 역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막 10:29~30).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이 비유가 말하고 있는 빚 감면은 가족 관계 같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당시의 기초 경제 품목에 대한 재분배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심각한 문제로 발전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왕의 비유, '빚 탕감'의 신적 명령

마태의 주기도문(6:9-12)은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은 물론 현재에 속히 이 땅에 임하게 해달라는 예배 의식의 공동체 기도문이다. 이 공동체는 분명 하루의 양식(혹은 '내일의 양식', 누가의 '오늘의 양식' 혹은 '매일의 양식')을 심각하게 간청해야 할 만큼,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빚더미에 갇혀 있는 가난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온통 자신들을 짓누르는 빚의 무게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구현되고 있는 공동체 식탁에 함께 앉아서 먹어야 하는 자들이다. 이 짧지만 간절한 탄원의 기도문에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 되심'을 근거로 비인간화의 덫인 빚을 탕감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 청원(11~12절)'은 이들의 엄청난 부채의 구조 속에서 이득을 보는 당사자가 바로 공동체 안에 혹은 아주 가까운 바깥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 당사자(들)는 곧 시험(혹은, 유혹)의 장본인(들)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예수가 빚 탕감(혹은 죄 사함)의 절박한 간청을 기도문 내에 포함시킴으로써, 지금 직접 "예수가 부채로 인한 엄청난 억눌림 상태부터 가난한 자들을 풀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틀림없이 공동체 안에서 혹은 밖에서 특권층으로 인정받고 있는 부자(채권자)일 그 사람(들)은, 기도문의 끝부분에서 '악'으로 불리고 있는 자(들)일 것이며, 그들의 위선적 지위가 현재 두드러진 주목을 받고 있거나 그 지명도가 예수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극한 상황에서의 보호와 개입을 간청하고 있는 이 기도의 대상자인 정의로운 아버지는 결국 최종적인 심판자임을 예수는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23-35에 나타난 예수의 용서에 대한 긴 비유 이야기는 마태 공동체의 내부적 규율을 위한 하나의 윤리적 패턴을 제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 18장의 교회 강화는 마태 공동체의 내부적 문제 즉, 치리와 용서의 격렬한 논쟁 혹은 갈등을 반영하고 있는데, 예수는 '죄 용서'의 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빚 탕감'이라는 경제적 유비를 사용하고 있으며, 죄 용서의 의미가 빚 탕감의 이미지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 비유는 한 가정의 엄청난 부채 문제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 가정이 가진 모든 소유는 물론 심지어 '그의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모두 팔려 갈 정도로 부채가 극심함을 말하고 있다. 엄청난 부채의 무게로 인한 그 관원의 위기는 오직 왕의 '불쌍히 여김'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비록 그 관원은 지극히 환상적이고 낙관주의적 의사 표현을 통해 자신이 모든 빚을 갚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러나 왕은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고, 오직 왕의 은혜로 그는 풀려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탕감해 준 빚의 액수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만 달란트로 오늘날 화폐 가치로는 대략 6천만 달러(즉, 약 6백억 원)에 상당하는 액수이며, 한 관리가 다시 갚기에는 거의 불가능할 만큼 큰 액수다.

그 관리의 탕감된 천문학적인 빚의 액수는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빌려 주었던 극히 소액의 돈(1백 데나리온, 약 1천만 원)과 정반대의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 점이 예수가 비유를 말하는 초점이 되고 있다: 그 관리는 "왕의 관대함을 본받았어야 했다." 이와 유사한 빚 탕감의 언급은 특히 신명기 15장에서도 발견된다. 비록 빚 탕감에 대한 논조의 초점이 '왕의 관대한 빚 탕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주었다"는 사실에 맞추어진 점만이 다르지만, 그러나 엄청난 은혜(즉, 탕감 혹은 해방)를 입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특히 마태복음 본문과 신명기 본문에는 공통적으로 공동체적 언어 표현이 매우 두드러진다. 즉 '형제'와 '동료'라는 관계 언어가 반복 사용되고 있으며, 신명기 텍스트 역시 동일하다. 특히 신명기 본문의 '이웃'은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사실상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가족적인 책임감을 확대하여 적용하려는 '형제애로의 촉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빚 탕감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본문과 신명기 본문 사이의 공통점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빚 탕감 이행에 대한 명령이 어느 규정보다 매우 강력한 '신적 명령'이라는 점이다. 신명기의 경우 9절에서 빚 탕감은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고 있다는 위협(threat)을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이로써 부자들의 빚 탕감 행위가 단순한 법적 요구에 의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부자들의 탕감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 '직접' 호소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신적 명령의 무게를 강화하기 위하여 10절에서는 부자들의 관대하고 풍성한 빚 탕감을 통해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모든 일과 사업에 반드시 보상해 줄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한 관대한 빚 탕감이 실현되는 실질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나님은 '너의' 궁극적인 후견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빚 탕감 명령이 단순한 자선(charity)을 촉구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것이 공동체 안과 밖에서 사회적 정의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9절은 사회적 정의 문제가 곧 예배 종교의 본질(즉, '죄' 문제)로 귀결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빚 탕감을 하지 않는 부자들을 겨냥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 권한'마저 있음을 텍스트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불이익이나 착취를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차단 조치인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의 결론 18:34-35는 빚 탕감과 관련한 신명기적 충고를 예수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더욱 강력한 '위협'의 선포를 하고 있다. '죄 용서'로 번안된 '빚 탕감'은 여기서 가장 과격한 형태인 '하나님의 복수(revenge of God)'로 나타나, 가난한 자들에게 빚 탕감하지 않는 부자에 대한 압박이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특히 비유의 결론은, 만일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베푸심과 같은 동일한 자비 베풂이 공동체의 동료들 사이에서 수행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비 베푸심도 결국 그들에게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주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빚 탕감 언어는 먼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교훈으로 나타나면서, 동시에 그것은 '인간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라는 현실적 구조망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늘나라 건설을 구체화시키는 방편으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과 18장의 비유는 빚 탕감이 하나님의 은혜/용서와 관련된 '서술문(indicative)'이면서 동시에 '명령문(imperative)'이며, 이 서술문과 명령문은 두 본문에서 상호 필요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결론과 제안: 온전한 탕감을 위하여

빚 탕감과 관련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본문은 그 표현의 강도와 내용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공통적인 지향점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도리'와 그리고 '가족적인 나눔'의 실행을 통해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각성이다. 특히 빚 탕감 제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 개념으로 삼는다는 '주의 은혜의 해(the Year of the Lord, 눅 4:19)' 즉, 안식년 혹은 희년 제도의 선포는, 사회의 최하위 계층으로 떨어져 있거나 고리대금의 수탈적 압박에 짓눌려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종교적 안전장치임에 틀림없다.

이미 누가복음의 청지기 비유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이러한 사람들의 처절한 울부짖음과 하소연이 그 배경에서 암울하게 맴돌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물론 억압과 수탈에 항거하는 목소리는 종교 공동체 내에서 제의적 기도와 탄원으로 '영성화(spiritualization)'되어, 물리적으로 자신들의 생존권 탈환을 위해 저항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복음서는 그러한 혁명적 저항을 촉구하고 있지는 않지만, 비유 세계나 기도문 속에는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탕감 촉구와 그에 따른 신적 경고를 다양하게 함의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공공 부문과 가계(개인 사업자 포함)가 지고 있는 빚의 총합이 사실상 2000조 원을 넘어섰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다양한 빚 탕감 프로젝트를 정부 차원에서 시행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그러한 노력들은 잠시 몇 가지 통계 숫자의 놀음을 마친 뒤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회성 조치들일 뿐이며, 경제적 악순환에 걸려 넘어져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러한 조치들이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만드는 수탈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을 뿐이다.

앤드류 니콜 감독의 2011년 영화 '인타임(In Time)'은 대기업과 금융권의 악의적 수탈이 어떻게 국가를 마비시키고 인류 공동체를 붕괴시키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빚 탕감이 진정 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마치 미국의 '롤링 주빌리(Rolling Jubilee)' 프로젝트처럼 사회단체들이 주체가 되어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단순히 사회복지 제도를 보완하는 수박 겉핥기식의 일시적 처방전이 아니라 근본적인 공동체 회복의 실질적 수단이 되기 위하여, 필자는 오늘날 금융권의 탐욕과 정부 정책의 지속적인 실패를 극복하면서, 개인과 가계의 부채 문제를 '인간에 대한 존중과 형제애'의 정신에 입각하여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기본소득 보장'이 빚 탕감과 재분배의 온전한 형태라고 판단한다. 아울러 각종 신용회복 프로그램의 시행, 노동 시간의 단축, 노동력의 탈 상품화, 금융의 공공화, 그리고 토지의 공공화 등이 이행되어야 한다.

제자로서의 교회의 정체성은, 탐욕을 버리고 공동체의 빚(죄)을 탕감(용서)해 주어야 하는, '나눔의 청지기'다. 특히 신앙 공동체는 공동체 안팎의 구성원들의 공공 행복을 위하여, 지구적 재분배의 보편적 실행을 복음 전파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내면화하는 '청지기 사건(눅 16장)'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육신적 삶이다. 오늘날 교회는, 움베르트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외친 것처럼, 이 세계가 "피와 광기의 폭풍 속으로 깊이깊이 가라앉고 있는데도 교리나 달달 외우고 있으면서" 공동체 붕괴의 책임에 대하여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그래서 치명적 경고를 받아 쫓겨날 위기에 처한, '불의한' 청지기는 아닌가.

정종성 / 백석대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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