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연구원 느헤미야(김형원 원장)가 7월 25일 백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포럼을 열었다. 한국교회가 현대사를 거치면서 어떻게 보수화했는지 짚은 김형원 원장의 기조 발제를 시작으로, 조석민·김근주·권연경 교수가 성서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정리했다. 배덕만 교수가 문창극 씨의 역사관을 집중 조명하고, 김동춘 교수는 개신교의 신앙적 언어들이 사회 공공성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설명했다. 박득훈 목사는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의 최종 배후가 '자본주의'임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수차례 문창극 씨의 발언을 옹호해 온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김영한 대표)에 공개 질의서를 발표했다.
포럼에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자리가 비좁았다. 특히 20~30대 청년들이 절반 가까이 됐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장시간 발제가 이뤄졌지만, 대부분 참석자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2014년 상반기,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가장 큰 두 가지 문제가 세월호와 문창극 사태라는 느헤미야 연구위원들의 설명은 빗나가지 않았다.

느헤미야의 허락을 받아 샬롬나비에 대한 공개 질의서와 각 발제문을 요약해 게재한다. <뉴스앤조이>가 게재하는 발제문은 원문의 절반 정도 분량임을 밝혀 둔다. 원 발제문은 곧 책으로 엮어 출간될 예정이며, 느헤미야(070-8260-0208)에서 예약 판매한다. - 편집자 주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여 식민지 삼았던 36년은 조선에게는 치욕적인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애써 부정되거나 모른 체 해서는 안될 역사이며,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살피고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문창극 씨의 문제가 되는 강연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일제 시기를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 민족을 영글게 한 시기로 해석하고 있으며, 애석하지만 상심할 필요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던 시기라고 풀이하고 있다. 일제와 분단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쓰시기 위해 허락하신 고난의 시기라는 식의 해석은 얼핏 들어 크게 문제가 될 것 없어 보인다.

사실 이런 식의 힘겨운 삶에 대한 해석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에 임한 고난과 고초를 해석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해석은 어쩌면 액면으로는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식민지 시절에 대한 이해 이면에 놓여 있는 것과 함께 고려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의 강연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고를 보여 주는 것들에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게으른 조선'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에 비해 '일본은 참 깨끗하구나'라고 보았다는 미국 선교사들의 생각에 대한 언급,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승만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묘사,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공산주의이며 미국을 통해 도우시려고 분단과 6·25를 경험하게 하셨다는 식의 표현 등이 있는데, 이러한 언급들은 그의 생각이 우리 민족 역사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몰상식, 노예 근성, 그리고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사고로 일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문창극 씨의 발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발언에 대해 교계 내에 지지하는 소리들이 꽤 있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소리들에는 여러 신학자들과 유명하다는 목회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문창극씨의 발언은 단지 개인의 의견을 넘어서, 한국 기독교가 이제껏 역사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사건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지난 4월 이래 온 국민의 슬픔의 근원이 된 세월호 참사 역시 종종 교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의 말로 언급되는 경우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험난한 시대 속에서 예수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살아온 삶을 신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시점에 오늘의 교회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망해 가는 나라에 살았던 예레미야는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는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촉구한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다니엘은 그렇게 망해서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을 대변하고 있으며, 역시 바벨론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바벨론 신의 이름을 따라 불리게 되는 것도 개의치 않아 보인다(단 4:8). 그들의 행동은 오늘 우리에게 규범이 되는가? 우리 역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약탈에 대해 예레미야처럼 다니엘처럼 묵묵히 순종하여 섬겨야 하는가? 여기에는 구약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해석학적인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

예레미야와 다니엘의 행동을 평면적으로 오늘을 위한 규범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가령 우리는 구약 곳곳에서 절기나 제의와 연관된 말씀을 만나게 되지만 오늘날에 그대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두 재료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는 규례를 보지만 오늘날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바울이 여성들은 교회에서 긴 머리이든지 머리에 무엇을 쓰든지 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해도(고전 11:1-16), 오늘의 교회는 전혀 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의 교회가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은 그때 그 시대의 의미를 깊이 드러내면서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심사숙고되어야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지나간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풀이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예레미야와 다니엘 같은 이들을 제국주의 체제에 충성한 사람으로 그리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제 시대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연히 그 모든 독립운동과 일제에 대한 저항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그렇기에 이 땅의 지배 기득권 세력들은 일제에 영합했다. 그리고 일본이 망하자 즉각 새로운 지배세력인 미국에 영합했고, 문창극 씨의 발언처럼 미국이 마치 구세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예수 믿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주어진 말씀인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추구하는 신앙, 심사숙고의 신앙이어야 한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주최한 긴급 포럼에서 발제자로 나선 김근주 교수는, 멸망의 때, 또 이스라엘이 지배를 받던 때에 살았던 예레미야와 다니엘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풀었다. 김 교수는, 하나님의 뜻은 정의와 공의에 선포와 그것의 실현에 있다고 짚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촉구한 예레미야

여호야김 4년(주전 605년) 느부갓네살이 애굽왕 느고를 갈그미스에서 쳐부순 이래(렘 46:2), 유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전역의 패권은 바벨론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까지 그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 외치던(렘 3:1-4:4)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4년 이래 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였다(렘 25:1-11). 예레미야에 따르면 시드기야의 유다가 해야 할 일은 바벨론에 저항하고 국가의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 항복하고 느부갓네살을 섬기는 것이었다(렘 27:12-15).

이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다의 패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 것의 결과이다. 예레미야는 그의 사역 내내 하나님의 명령을 증거하며 여호와께 돌아오라 외쳤다.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추상적인 표현의 실제적인 의미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임을 알 수 있다. '시드기야'는 히브리어식 발음으로 "찌드키야후" 즉, '야훼는 나의 공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이나 선언은 의미가 없다. 야훼를 신뢰하고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럴 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다윗의 의로운 가지는 '여호와 우리의 공의' 즉, "아도나이 찌드케누"라 불리게 된다. 이 이름은 시드기야의 이름에 대한 풍자가 반영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야훼를 나와 우리의 공의라 고백하는 것은 야훼를 따르는 정의와 공의의 삶에 기반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에 순순히 항복할 것을 촉구(렘 21:8-10)한 예레미야는 곧바로 정의를 행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미슈파트")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 21:11-12).

멸망은 확정되었다. 그러나 언제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돌아간다는 것은 정의 즉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던 시절, 그야말로 멸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 뜻밖에 노예 해방을 단행하였다(렘 34:8-10). 적어도 예레미야 본문상으로 노예 해방에 대한 아무런 명시적인 명령이나 촉구가 없었는데도 시드기야와 귀족들은 이 일을 단행하였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의 조치를 가리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라 칭하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을 행한 것이라 평가하신다(렘 34:15).

멸망은 확정된 것이로되, 그것이 지금 당장의 현실을 제약할 그 무엇이지 않다. 내일 예루살렘이 망한다 해도 오늘 마땅히 해야 할 일, 노예를 자유케 하는 일은 시행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각 사람들이 마땅히 누리게 되는 자유와 해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제국주의 패권국가의 신하로 살아간 다니엘

예레미야와 비슷한 모습을 다니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야김 3년에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다니엘은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바벨론의 관리로 살아가게 된다. 다니엘서 9장은 포로로 끌려 온 민족의 현실을 두고 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여기며 회개하는 다니엘의 기도를 보여 준다.

바벨론에 대한 이해: 시편 137편
구약 성경이 바벨론에 대해 일관되게 표현하는 바는 훨씬 강력하다. 특히 이것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이 바벨론의 강변에서 유다 포로들이 불렀던 시편 137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멸망할 땅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37:8-9).

저주의 기도는 기본적으로 철저하게 비폭력적인 기도이다. 137편의 표현 역시 철저하게 비폭력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말을 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사람을 짓밟는 세력에 대해 심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도리어 축복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보고 죄책감까지 느끼게 만들곤 한다.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며 약자를 짓밟는 이들이 바벨론이니, 그들을 향해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라.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힘이 있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힘없는 포로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구하는 기도뿐이다.

대적에 대한 저주의 말과 기도는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대적과 저주임도 명심해야 한다. 약자를 짓밟는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아울러 바벨론에 대한 시편 기자의 표현은 시편 기자의 참담함의 원인을 무조건 내부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대적에게서 찾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편 기자는 바벨론이라는 대적 세력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모든 문제가 나 자신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나 바깥에 있는 대적 세력에서 기인한 것이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도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그들이 게으르고 부족한 탓 때문이 아니라, 그들 바깥에 있는 잘못되고 불의한 사회 경제적 틀로 인한 부분도 크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신앙 공동체는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만 여기기 쉽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바깥이 아니라 오직 내부로만 시선을 돌리게 만들기도 한다. 시편의 기도와 저주의 기도는 우리 바깥에 있는 대적 세력을 명확히 인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제 시대와 하나님의 뜻

문창극 씨의 발언은 일제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의 시간을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 자체야 문제될 것이 없을 수 있다. 정작 문제는 그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반성할 것이며 어떻게 돌이킬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의 발언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그저 조선 민족의 게으름, 일하기 싫어함, 더럽고 지저분함에 대한 지적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역사를 반성한 것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지극히 천박한 이해를 반영할 뿐, 선교사들의 저술에 담긴 일방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반복한 사대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오히려 그의 발언에 있던 바, 구한말 양반 세력들의 게으름과 무능함에 대한 지적이 의미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과거에 대한 반성은 현재에 기득권 세력들이 다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유감스럽다.

힘겨웠던 일제 시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힘썼던 이회영선생 같은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일제를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는 것에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어떻게 돌이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과 숙고가 필수적이다. 나라가 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다. 심판이라면 고치고 바로잡으라. 예레미야는 멸망을 외치며 정의와 공의를 전했다. 다니엘 역시 바벨론 땅에 살면서 바벨론이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선포하였고, 이방왕을 향해 공의의 통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정말 죄로 인한 심판인 줄 안다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식민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전의 불의를 고치고 기득권의 이익 도모를 철폐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김근주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연구위원, 희년함께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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