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한국 방문 

2013년 3월 제266대 로마가톨릭의 교황으로 취임한 프란치스코가 8월 14일 4박 5일 일정으로 사목 활동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번 방한 기간 동안에 청와대를 방문하고, 대전 월드컵 경기장, 당진 솔뫼성지, 충북 음성 꽃동네, 명동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초청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왕조 때 박해로 숨진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을 집전한다. 시복(諡福, Beatification)은 로마가톨릭에서 성좌(교황청)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복 절차를 거쳐 '복자(il beato / the Blessed)'로 인정된 모범적인 신앙의 증거자들을 말한다. 시복 절차는 사후에 행해지며,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식적 검정하에 성인으로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 경우 추천자의 신청에 의해 성인 추대 절차가 이뤄진다. 모든 검정 과정은 교황청의 심의 회의인 시성성(Congregatio de Sanctorum)에 의해 추진되는데 처음 단계를 지나면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고 '가경자', 그리고 '시복 시성'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Ⅰ. 교황의 역사 이해

또한 한국 천주교는 교황 방한에 앞서 '잠벌'을 없애 주는 전대사를 실시한다. 대사(大赦, Indulgentia)는 라틴어로 '은혜' 또는 '관대한 용서'라는 말로서 '대신 용서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에 의하면, 이미 용서받은 죄에 따른 벌, 즉 잠벌(暫罰)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현세에서 행하는 속죄인 보속을 치러야 하는데, 이를 일부 또는 전부를 감면해 주는 은사를 말한다. 죄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교회에 사실대로 고백하여 죄를 용서받은 다음 예수와 모든 성인의 보속 공로를 통해서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을 교회의 승인을 받아 면제받게 된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신성로마제국 지역의 경우, 마치 대사를 얻으면 이미 범했던 죄까지 사면되는 이른바 면죄부(免罪符)로 왜곡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이 문제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분열과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개신교회는 '잠벌'을 없애 주는 전대사와 같은 그런 제도가 없다. 사후 죽은 영혼을 위해 기도 봉헌을 하거나 성인으로의 추앙과 같은 이런 제도도 아예 없다. 장례식에서 어느 목사님이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했다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다.

교황, 포프(Pope)의 의미

'포프(Pope)'는 원래 '아버지'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포프'는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으로 사용되었다. 훗날 라틴어에서 이를 차용하면서 존칭으로 바뀌었다. 이후 그리스어를 사용하든 동구인과 라틴어를 사용하든 서구인 모두가 사제와 주교, 총대주교를 '포프'라고 불렀다. 그리스, 러시아, 동방정교회는 오늘날까지도 교구 신부들은 '포프'라고 부른다. 반면 라틴어권에서는 '포프'라는 단어 사용이 점차 제한되었다. 3세기 초기에는 고위 성직자를 일컫는 존칭으로 '포프' 또는 파파(papa)를 썼지만, 5세기 무렵에는 주로 로마의 주교를 일컫게 되었고, 8세기 이후에는 오로지 로마의 주교만을 일컫는 용어로 국한되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접어들자 이 용어에 대해 맹렬한 비난이 쏟아졌으며, 프로테스탄트(신교도)들은 '파파' 대신 '로마의 주교'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심지어 '포프'라는 단어만 듣고도 격분하는 신도들이 많았다. 1589년 출판된 한 영어사전(당시 영국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다)에서는 '포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사악한 집단의 수장으로 악마의 최고 대리인'이라고 기술한다.

초기 교황 제도(64/68~604)

교황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 사이의 관계와 대화에서 비롯된다고 로마가톨릭은 주장한다(성경 마태복음 16장 13절~20절에 근거함).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도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우위의 위치를 한층 더 굳혔다. 그래서 교황들은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베드로와 동일시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초대교회에서 베드로가 차지했던 위치와 일치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초대교회의 당면 과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무관심과 적대감을 잘 견디고 살아남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청한 '로마의 주교'들은 점점 성장하고 있는 교회에서 수위권(首位權, primatus Romani Pontificis, 모든 주교 가운데 제1의 권한 즉, 교황이 가진 권한을 이른다. 이후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규율, 정치, 신앙, 도덕 문제들을 관할하는 절대권)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 세속 권력과 조화를 이루는 데도 애써 왔다. 그리고 그들은 속권(俗權, the secular arm, 교권에 대한 법원의 권력)의 중심지이자 베드로가 순교한 로마를 교권(敎勸, ecclesiastical authority)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과정에서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정치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어느 정도는 세속 권력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훗날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두 제국,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은 서로 나눠지고 분열했다. 동서 분열은 4세기 로마제국의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 313년)에 의해 자유를 얻은 이래 11세기까지 교회는 로마, 콘스타니노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다섯 개 교회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성립, 로마교회의 프랑크 왕국과의 연계 등으로 악화된 네 개 교회가 분열되었다. 이에 대해서 하나의 보편 교회 공동체에서 로마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동방의 시각과 로마 교황으로부터 네 개 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서방의 시각이 오늘날까지도 대립하고 있다. 이후 로마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회로, 나머지 네 개 교회는 정교회로 각각 분립되었다.

가변적인 세상에서 통합적인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존재는 교회 전체의 수장인 교황뿐이었다. 이렇게 되어 교황 레오 1세(440~461) 제위 중에 서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이 제국 내 다른 모든 주교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레오 1세가 사망한 후에는 이 우위권이 다시 도전을 받았다. 이에 후임자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의 베드로 후계자론

마태복음 16장 18~19절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16절에 언급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도 볼 수 있다.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이 말은 베드로를 교회의 청지기로 삼아 열쇠를 주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가 사도직을 맡을 것을 재확인하신 것이다. '매면 풀면' 이 말은 율법에 관하여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는 말인데, '맨다'는 것은 금지하는 것을, '푼다'는 말은 허락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특권과 책임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도 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씩이나 다짐을 하신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무덤에 찾아갔다가 빈 무덤임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베드로를 찾으셨다. 치유의 기적을 행한 최초의 사도이다. 그는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뽑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재판하기도 하였다. 43년 유대 왕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한다. 49년에는 예루살렘 교회 회의를 주재하여 이방인들을 굳이 유대교의 규정에 따라 할례를 요구하지 않고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안디옥(고대도시, 지금의 터키 소도시 얄바츠)로 가서 스스로 초대 주교로 선포했다고 로마가톨릭교회는 주장한다.

그 후 베드로는 로마로 갔다. 초기 교회 시절의 저술가들은 그가 로마에서 사역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하나같이 주장한다.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260년경~340년경)는 베드로가 네로 황제(54~68년) 시절에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그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된 64년경으로 보인다. 이 대박해는 로마의 14개 구역 중 3개 구역을 잿더미로 만들고 7개 구역을 크게 파괴한 대화제가 발생한 직후,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돌리면서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임을 예언한 바가 있다. "네 팔을 벌리리니…" 요한복음 21장 18절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가당치 않게 예수님의 죽음에 비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이 전승은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신학자 오리겐(Origenes, 184년경~253년경)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교황 바오로 6세는 성 베드로 성당의 지하 묘지에서 발굴한 한 남자의 유골을 베드로의 유해임이 확실해 보인다면서 신중하지만 최종적인 선언을 한 뒤(1968년) 그 유골을 정식으로 재매장했다.

베드로 이후 교황 리노(Linus, 66년경~78년경)부터 열두 사람의 교황 엘레우테리오(Eleutherius 174년경~189년)까지는 연대 표시 자체가 '년경'으로 정확하지 아니하며, 리노 교황부터 식스토 1세까지 6명의 교황은 출생지가 '이탈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로마' 등 부정확하며, 선출 시기와 재위 기간도 명확하지 못한 것이 특징이다.

교황좌와 교황무류성

교황좌는 교황무류성(敎皇無謬性, Papal infallibility)과 관련된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에서 교황이 전 세계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교황좌에서 엄숙하게 정식으로 결정을 내릴 경우(excathedra), 그 결정은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며 결단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교리이다. 교황무류성의 사상 자체는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전통이라고는 하나, 교리로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것은 1870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부터이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의 교황무류성은 교회가 지니는 네 가지 불가류권(不可謬權)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며 사상적으로 발전해 왔다. 흔히들 교황무류성에 대한 오해를 많이 갖지만 교황무류성에 성립할 만한 발표는 거의 없으며 그것이 지닌 중대함 때문에 앞으로도 거의 행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선언이 아닌 회칙이나 칙서 등은 무류성을 지닌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교황무류권(敎皇無謬權)이라고 하기도 한다. 제한된 공간이므로 여기에서 교황무류의 성립 조건은 생략한다.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라 primatus 영 primacy)

수위권은 모든 주교 가운데 제1의 지위인 교황이 가진 권한을 수위권이라고 한다. 이 수위권은 교회의 창설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권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교회의 반석이라고 부르고,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마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런 약속은 부활하신 후 이루어졌다. "내 양을 돌보아라"고 세 번씩이나 당부하셨다. 이러한 베드로의 수위권은 그를 계승한 후임 교황들에게 전수되었다.(출처 : 가톨릭대사전)

교황 레오 1세, <서한집>, 11쪽(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칙령을 인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와 우리 제국의 유일한 방어책은 하나님의 보호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숭고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교들의 으뜸이신 성 베드로의 권위와 로마교회의 지도자적 위치, 그리고 신성한 교회 회의의 권위 이 세 가지 권위가 보장해 주는 사도좌(使徒座, Apostolic See, '교황좌'라는 뜻)의 수위권에 어느 누구도 도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전체가 그 수장인 교황의 권위를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전 세계의 모든 교회에 평화가 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서한에서 잘 나타난 '교황좌'에 대한 교황 레오 1세의 견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로마법에 정통한 학자로서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개념을 기존 로마 상속법의 관점에서 명확히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각 교황은 로마 상속법에 따르면 전임 교황이 아니라 초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를 계승하며, 따라서 사도 베드로의 권위를 물려받는 셈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이러한 견해는 교황직을 교황좌에 앉는 개개 인물과 분리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에 따라 교황의 위신과 권위는 어떤 특정 교황의 개인적인 실수나 미덕에(적어도 법적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주장이 성립되었다. 다시 말해 교황은 교황직의 집행자이며, 교황 개인의 인격은 사도 베드로에게서 직접 상속받은 교황권 집행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大)교황 레오 1세(440~461)

레오 1세는 무방비 상태의 로마가 가이세리크 왕에게 포위되었을 때 교황 레오1 세가 성문 밖으로 나가서 왕에게 선처를 호소했고, 그 결과, 로마를 수중에 넣었던 터인지라, 온 도시를 삽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은 방화나 학살, 처벌을 삼갔다.

레오 1세의 설교집(semon) 10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친애하는 여러분! 자선을 행해야 행복한 삶을 산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구호품을 기부함으로써 자기 몸을 깨끗이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몸이 청결하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구제는 죄를 씻어 주고 죽음의 권세를 깨고 지옥의 유황불을 끕니다."

자선이나 구제, 기부 행위가 선한 일인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죄를 깨끗이 하고, 자신을 청결케 하고, 죄를 씻어 주고 죽음의 권세를 깨고 지옥의 유황불을 끈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대(大)교황들이 이러하니 다른 분들은 어떠하겠는가?

대(大)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

그런 가운데 초기 교황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황 중의 한 사람인 그레고리오 1세(590~604) 때에 이르러 쇠약해지고 있던 교황의 권위와 힘이 비로소 회복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귀족 출신이다. 그는 로마의 행정관(572~574)을 지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후 수사가 되었다가 부제로 승진하였다. 수사 출신으로 처음 교황이 된 인물이며 '대(大)'라는 칭호를 받은 2명의 교황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동로마제국의 마우리키우스 황제(582~602년)에게 자신의 교황 선출은 불허해 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수포로 돌아가, 590년 9월 3일 교황에 즉위하게 되었다. 그레고리 1세는 '엑스 카테드라 ex cathedra'라는 글귀를 처음으로 사용한 교황이다. 이 글은 "교황 좌의 모든 권위로 선언한다"는 뜻이다. '카테트라'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를 일컬었지만, 먼 훗날에는 교황좌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스식의 교황 이름 표기

초대 교황들의 이름은 왜 대부분 그리스식이었을까? 그럼에도 그들 대부분이 그리스인이라는 설명은 거의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교황 연대표) -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교황 전기 모음집으로 최초의 전기는 6세기 초에 씌었다 - 는 초기 교황들 중 7명은 로마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출신이고 1명은 시리아인이라고 기술한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그리스식 이름으로 바꿔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도 그리스식 이름으로 바꿨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리스식으로 개명하는 이런 관행은 제13대 교황 엘레우테리오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았고, 심지어 중세에도 '그리스식' 교황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시대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리스식 이름을 택하는 관행의 중요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화란 Leiden 대학, 도서관에는 800년경 '성 아만도 성당'에 기록된 교황 연대표가 있다.

대립교황(僭稱 로마교황, antipope)

대립교황이란 정당한 권위 없이 교황직을 주장하거나 수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대립교황이 존재한 때는 추기경단의 소수파들이 정식으로 당선된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별도로 새 교황을 선출한 경우와 선출 규정이 확립되어 있지 않거나 명확하지 않는 혼돈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여러 교황이 선출된 경우, 또 정통 교황이 폐위되거나 추방되어 새로운 교황이 선출된 경유였다. 그렇지만 콘스탄티노(constanine, 767년)라는 대립교황처럼 순전히 무력으로 대립교황이 된 경우도 있었다. '대립교황'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192년경으로 추정된다.

로마제국의 분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4년에 로마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새로 재건한 도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고쳐 불렀다. 물론 이렇게 한 이유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마당에 이교도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곳에서 새 그리스도교 수도를 설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나날이 팽창하고 있던 제국의 형평상 일반‧군사 행정의 중심지를 좀 더 동쪽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도 이전 결과, 제국은 서서히 분열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행정이 분열되더니 나중에는 황제와 종교 전통도 갈렸다. 6세기 즈음 5명의 주요 그리스도교 주교들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주교- 들이 다른 주교들의 우위에 섰고, 칭호도 '총대주교'로 바뀌었다. 그리고 로마 주교에게는 이 칭호를 쓰는 대신 '교황'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이 제국의 새 수도로 부상했기 때문에 그곳의 총대주교는 스스로를 로마의 교황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은 교황이 줄곧 주장해 오던 수위권과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주교의 반목은 불가피했다. 이 갈등은 결국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리로 이어졌다. 물론 그 사이 불화를 해결하려는 소소한 시도들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로마가톨릭의 동서 교회의 분열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교황 제도와 여러 교황들

사제독신주의 바람직한가

로마가톨릭 사제들의 독신주의 문제는 정상적인 애정 관계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가톨릭 뉴스>가 보도한 바가 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 사제 독신제를 다시 한 번 발표하였다.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동정의 상태'에서 십자가에 희생하시기까지 당신 사명을 실천하셨다는 사실은 라틴교회의 이 전통을 지키는 의미를 이해하는 확실한 준거점이 된다면서 사제 독신제가 여전히 의무라고 말했다.

교황 알렉산데로 6세(1492~1503)는 여러 명의 여인들 사이에서 여섯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그의 정부와 사생아들 모두는 최고 권력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높은 직책에 앉거나 유력한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여러 교황들

인간이 만든 여러 제도에는 대개 스캔들을 통해 대중의 마음에 각인되곤 한다고 역사가 P. G. Maxwell-Stuart 은 말한다. 이는 교황 제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여교황' 요안나는 허구의 인물에 불과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아비뇽'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러 명의 교황이 동시에 나타나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주장했던 시대를 떠올리기도 한다. '보르지아 가문' 하면 악명 높은 교황으로 '독(毒)'이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교황 포르모소(891~896)는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스스로 '준수한 사람(formosus)'이라는 뜻의 이름을 택했기 때문에 오만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실제 그는 지적인 사람이며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교황에 선출된 직후 "하나님은 나에게 교황직을 주셨다. 그러니 마음껏 즐기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후하고 관대한 성품을 가져 로마인들이 그를 교황으로 선출한 것을 반겼다고 한다. 그리고 르네상스 문화의 열렬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한편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점성가를 데려와서 테헤란 궁전에서 대규모의 마법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교황들에 얽힌 흥밋거리는 특정한 교황 제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교황 제도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면서 서서히 얼개가 짜여 진다. 서로마제국이 5세기에 몰락한 후에도 역시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지는 여전히 로마였다. 로마의 주교(후일 교황으로 불림)가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이후에도 교황은 종교와 정치에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교황은 일종의 군주로서 이탈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다스렸으며, 이러한 관행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교황이 주도한 십자군 원정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가져왔고, 서구 그리스도 세계와 중동 이슬람교 세계 사이에 문화 교류의 장을 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교황은 학문을 권장하기도 했고,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서 벗어난 혁신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기도 했다. 교황은 예술의 적극적인 후원자로서 수세기에 걸쳐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교회에서 마음껏 재능을 펼치도록 도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화가나 조각가, 건축가의 이름을 한번 대 보면 그들 대다수는 교황에게 기용되었거나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교황의 후원을 받았다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통계가 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와 우르바노 6세에 조언을 해 주었고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뛰어난 미모의 줄리아 파르네세도는 알렉산데르 6세의 연인이 되기도 했다.

베네딕도 16세 및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의 교황들은 264명의 교황과 39명의 대립교황(적법한 선거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황직을 주장하거나 수행한 사람)이 있었다. 78명의 교황과 2명의 대립 교황이 시성(諡聖,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8명의 교황이 시복(諡福, 복자로 추앙)되었다. 교황의 출신지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177명(그중에서 로마 77명), 프랑스 14명, 그리스 11명, 독일 7명, 시리아 6명, 시칠리아 3명, 사르데냐 2명, 스페인 2명, 아프리카 2명, 영국 1명, 네덜란드 1명, 포르투갈 1명, 폴란드 1, 아르헨티나 1명(14개국)이며, 직분상 특기할 만한 경우는 수사 출신 22명, 탁발 수도사 16명, 평신도 2명, 은둔자 1명이 있었다. 5명의 교황이 중도 사퇴하였고, 5명이 투옥되었으며, 4명이 살해되었고, 1명이 암살당했고, 1명이 면직 당했으며, 1명이 대중에게 몰매 맞아 죽었고, 1명이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었고, 1명은 무너진 지붕에 깔려 죽었다.

교황은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난 2000년 동안 선포나 칙령을 통해 또 더러는 방문을 통해 단기간이든 장기간이든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지 아니한 지역은 거의 없다. 교황은 최고의 성직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하나님의 종들 중의 종, 그 칭호는 다양하다. 교황은 영적 지도자로 출발했지만, 점차적으로 세속 권력을 손에 거머쥐면서 극도로 세속화 되었고 타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정치적인 역할이 줄어들면서 물질적인 과시욕을 떨쳐 버리고 가톨릭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16세기의 위조문서(성 말라키의 예언)는 첼레스티노 2세 이후 110명의 교황이 더 선출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 예언대로라면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1명의 교황이 더 선출되고 나면, 교황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교황 제도는 수많은 풍랑과 스캔들을 견디면서 존속해 왔고, 성 말라키의 예언을 거뜬히 뛰어넘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밀레니엄이 도래할 즈음에도 교황 제도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세속인들이 그 제도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교황 제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Ⅱ. 결론

로마가톨릭의 교황제와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의 발단은 로마가톨릭의 교황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종교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루터는 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종교개혁의 시발은 부패한 교회에서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독일에서는 루터,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 제네바에서는 칼뱅이,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의 제자 낙스가 개혁교회의 신학을 전파함으로써 장로교 전통을 심었다. 지금도 스코틀랜드의 국교는 장로교이다. 이후 개혁자들의 성경관은 그들의 사상으로 five solas 와 도르트 총회를 통한 칼뱅의 5대 강령(TULIP)이 개혁주의 신학으로 자리 잡았다. 주요 문서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 기독교 강요, 제네바 성경이 있다. 수많은 주의 종들은 '성경적 교회'를 세우기 위해 숱한 노력과 전투적 삶의 결실로서 오늘 우리 개혁주의 교회가 태생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로마가톨릭의 실체, 근본적인 문제

교회사 전체를 두고 보면,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 성직 제도로서의 사제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대한 교부들이나 신실한 총대 주교나 사제들이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교황제 도입 등을 통한 교권 확립 차원에서,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교회 제도를 비성경적으로 정립함으로 말미암은 점차적인 폐단은 교권과 세속 권력이 서로 결탁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그 이상의 수위권을 주장함으로써, 결국은 하나님의 권위와 신적 지위까지 점(occupy)해 보겠다는 심산(intention)은 베드로의 후계자로 군림하려는 것들이라고 본다. 아직도 성경 외적 요소들을 가미한 신앙과 신학을 주장하는 로마가톨릭교회는 진정한 '성경적 교회'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중섭 신부가 설명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교리에 의하면, 고해성사의 기원은 마태복음 4:17의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교부 시대는 참회의 성사를 하였으나, 1546년 트렌트 공의회 이후는 고백성사라고 부른다. 고백성사는 성찰, 통회, 고백, 보속 순으로 진행된다. 사제의 성사권은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한 말씀에 근거하고, 재정은 요한복음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한 말씀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너무 단순한 주해의 산물이 아닌가 한다.

마태복음 4:17은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음을, 즉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으므로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그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며,

마태복음 18:18은 교회의 권세와 징벌의 위엄을 보이신 말씀으로 교회에 부여한 특권을 의미한다. 마태 16:19가 베드로에게만 적용된다는 견해는 타당치 않다. 요한복음 20:23은 제자들이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구하는 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본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교리는 구원의 필수 조건을 7대 성사로 견진성사, 고해성사, 혼인성사, 성품성사, 병자성사 그리고 만찬과 침례라고 가르친다.

저명한 브라질의 로마가톨릭신학교 철학 교수 헤르만 헤거 신부가 "고해성사는 사제의 임무이고, 로마가톨릭교회 권력 구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략적 기반이며, 평신도가 사제에 종속된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사제는 심판석에 앉는다. 사제는 사죄 여부를 두고, 천국과 지옥을 놓고서 판결한다"고 한 것이야말로 저들의 실체와 진심과 속마음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은 개혁자들이 그렇게 불렀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도 나와 있다. 구약 신학자 홍반식 박사는 "가톨릭이라 하지 말고, 반드시 로마교회 또는 로마가톨릭이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그리고 로마 교황은 말세의 적그리스도라고 지목한다.

특히 이광복 목사와 같은 사람이 세대주의적 종말론 입장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본다. 세대주의(Dispenstationalism)는 인류 역사를 7세대로 구분하고 그 때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다르게 다스린다는 신학 사상을 주장한다. 또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이광복 목사 같은 자의 주장에는 섣부른 공감을 표하기 보다는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Bibleinfo.com에 보면 헬라어 원어상 적그리스도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기술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즉 어떤 사람이나 세력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을 대적한다는 의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즉 어떤 사람이나 세력이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 또는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을 뜻한다.

교황제의 문제점은 인식하나, 우리 시대에 생존하고 있는 전임자 리칭커 베네딕도 16세나 현 교황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고 복잡한 것 같다.

김영수 장로 / 고려신학대학 Midwest Univ. 수학. 고신대 前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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