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연구원 느헤미야(김형원 원장)가 7월 25일 백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포럼을 열었다. 한국교회가 현대사를 거치면서 어떻게 보수화했는지 짚은 김형원 원장의 기조 발제를 시작으로, 조석민·김근주·권연경 교수가 성서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정리했다. 배덕만 교수가 문창극 씨의 역사관을 집중 조명하고, 김동춘 교수는 개신교의 신앙적 언어들이 사회 공공성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설명했다. 박득훈 목사는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의 최종 배후가 '자본주의'임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수차례 문창극 씨의 발언을 옹호해 온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김영한 대표)에 공개 질의서를 발표했다.

포럼에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자리가 비좁았다. 특히 20~30대 청년들이 절반 가까이 됐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장시간 발제가 이뤄졌지만, 대부분 참석자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2014년 상반기,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가장 큰 두 가지 문제가 세월호와 문창극 사태라는 느헤미야 연구위원들의 설명은 빗나가지 않았다.

느헤미야의 허락을 받아 샬롬나비에 대한 공개 질의서와 각 발제문을 요약해 게재한다. <뉴스앤조이>가 게재하는 발제문은 원문의 절반 정도 분량임을 밝혀 둔다. 원 발제문은 곧 책으로 엮어 출간될 예정이며, 느헤미야(070-8260-0208)에서 예약 판매한다. - 편집자 주

내 맘대로 갖고 노는 '하나님의 뜻'

익히 아는 우스갯소리를 생각해 보자. 두 수녀 사이에서 차를 타고 가던 신부님이 못생긴 수녀 쪽으로 차가 기울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하고 기도하고, 예쁜 수녀 쪽으로 기울면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했다는 이야기다. 가톨릭 비난하는 게 될까 봐 주인공을 목사님으로 바꾸고 싶기도 한데, 그러면 개그가 그냥 다큐가 되는 것 같아 오히려 부담스럽다. 

이런 허구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하지만 그건 내 앞의 보험 중개인이 자신이 어떤 교회 집사임을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나의 삶이나 우리의 역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해석의 틀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의 역할은 최근 세간에 관심사가 된 몇몇 사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나중에 다른 분이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 나의 역할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지침으로 삼아, 선악이 뒤엉키는 인간의 역사를 두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한 가지 실험적 유비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조명'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을 조명하는 해석의 틀이라는 점에서 그리 빗나간 유비는 아니다. 조명에는 전체 조명이라는 것도 있고 집중 조명이라는 것도 있다. 하나는 전체를 밝히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특정 부분을 더욱 명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다. 빛을 비추는 대상이 아무 굴곡이 없는 평면이 아니라면, 전체 조명이 모든 평면을 골고루 밝히는 것은 아니다. 표면에 굴곡이 존재할 경우, 오히려 그 조명은 어떤 부분에는 어두운 그늘을 만들기도 할 것이다. 그 부분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그늘진 부분에 맞추어진 부분 조명이 필요하다. 물론 그 부분 조명으로 전체를 볼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모두가 다 우리 삶을 밝히는 방식들이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

원론적으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한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뜻'이라 말할 수 있다. 출애굽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만큼이나 바벨론 포로도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이야기를 하자면, 일제 36년의 아픈 역사도 하나님의 뜻이고, 남북 분단과 전쟁의 고통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다. 이때 하나님의 뜻은 사실상 하나님의 '섭리' 개념과 다르지 않다. 이런 관점은 말하자면 신학적 '전체 조명'에 해당한다. 인간의 삶과 역사를 큰 호흡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

하지만 이 포괄적 조명이 우리 삶의 모든 구석을 밝혀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걷는 삶의 구석구석에는 이런 '전체 조명'으로는 밝혀질 수 없는, 아니 오히려 더 어두운 그림자가 지는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도덕적 굴곡이 존재한다. 문제는 전체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위치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위치는 아니라는 점이다. 

구체적 삶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삶이란 대개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대결의 구도 속에서 펼쳐진다. 이 구체적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경우, 이는 언제나 우리 삶의 도덕적 상황을 밝혀 줄 도덕적 조명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당면한 상황 속에서 선악을 선명하게 구분함으로써 내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지, 관조적 태도로 이 모든 상황 배후에 놓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권연경 교수(숭실대)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긴급 포럼에 참여해 발제를 했다.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로 비추어 본 한국교회와 신학'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서 권 교수는,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 갈래로 나눠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바울서신의 경우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의 뜻은 자주 등장한다. 우선 섭리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언급이 종종 나타난다. '하나님의 뜻(경륜)'이라는 개념 아래 구원 역사 전체를 조감도처럼 조망하는 에베소서 1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이방 그리스도인들)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나,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것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되는 일이다(1:4~5, 11). 

하지만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피조물이요 구원의 수혜자인 우리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향한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일이 간단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신약성경이 거론하는 하나님의 뜻은 실천적 삶의 문맥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 그러니까 우리가 분별하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요구로서의 뜻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물으며 살아가라는 요구다(롬 12:1~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한 삶이다(살전 4:4). 혹은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의 태도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살전 5:18).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이 두 가지 하나님의 뜻을 분리하기는 어렵다. 우리를 구원하는 경륜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이 서로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에베소서 1장의 언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여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하며 기도한다(골 1:9).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그의 구원의 계획을 깨닫는 것을 넘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하는 기도로 이어진다(1:10). 물론 이런 삶의 태도는 우리를 구원하고 세계를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핵심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골 1:9~23). 

'하나님의 뜻'과 관련한 혼란

여기서 전체 조명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섭리)'와 부분 조명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요구)'은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얽힌다. 성경은 결코 사람이 저지르는 악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 일상의 행보를 놓고 늘 선과 악을 따지며,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을 짜면서도, 그 틀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삶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겪는 어려움의 한 차원은 서로 연결되지만 구분되어야 할 두 가지 하나님의 뜻을 성급하게 뒤섞은 잘못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비극적 상황 앞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를 묻고,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묻는 대신, 이 상황 자체는 이미 완결된 과거로 치부하고 그 배후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큰 뜻을 물으려 한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언사에 대중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적 언사 자체가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언사가 실제로는 도덕적 무책임 혹은 심지어 비도덕적 행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두 가지 하나님의 뜻

물론 성경에서도 이 두 가지 하나님의 뜻이 얽히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큰 호흡으로 역사 배후에 놓인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 표면에 드러나는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이미 예고된 일이라는 점에서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준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행전의 문맥에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할 '죄'는 일반적 의미의 죄라기보다는 그들의 메시아로 오신 분을 거부하고 그를 죽게 내어주었다는 구체적 사실과 관련된다(행 2:37~38, 3:17~19). 또한 유대 지도자들이 이방 세력과 결탁하여 사도들을 박해하는 일 역시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지만(행 4:28), 이는 결코 그들의 '위협'을 정당화하려는 논리가 아니다(4:29). 

바울에 의하면, 성도들의 고난은 하나님나라를 위한 고난, 곧 그들이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는 의도의 표현이다(살후 1:5). 하지만 이런 '신앙적 역사관'은 동시에 상황 자체에 대한 엄정한 도덕적 판단과 결합된다. 성도들의 고난은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시'이기도 하며, 따라서 성도들을 환난을 야기한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아 주시고, 환난을 받는 성도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결합된다(1:5~9). 

요셉 이야기

이집트의 총리가 다름 아닌 자기들의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형들은 보복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요셉이 처음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 요셉의 말은 "나는 당신들이 애굽에 팔았던,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하는 것이었다(44:4). 여기서 요셉은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된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다. 형들의 행위에 대한 대안적인, 혹은 '신앙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45:5). 다시 말하면, 요셉을 이곳으로 보내신 이는 요셉의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44:8). 그가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이었다(44:7).

아버지 요셉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금 불안이 고개를 든다.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형들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했다는 아버지의 유지를 거론하며 요셉의 선처를 호소하며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50:17, 50:18). 

여기서 요셉은 다시금 자신의 삶에 대한 신앙적 관점을 재확인한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50:19)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행해진 악에 대한 보복은 하나님의 몫이지 요셉 자신의 몫이 아니다. 요셉은 분명 악을 '당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그 악을 보복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요셉의 형들은 분명 악을 의도했고, 요셉은 그 악의 희생자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이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요셉의 고난은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런 신앙적 관점이 인간적 삶의 도덕적 차원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의 형들은 분명 악을 의도했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악은 여전히 악으로 남지만,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의 악한 행동을 '선용하셔서' 이스라엘 집안을 건지는 수단으로 활용하신 것이다. 물론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자로서는 당연한 행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악은 여전히 악이다. 악을 악으로 규정한 후, 그것을 용서하는 것과 악 자체를 부정하거나 덮으려 하는 태도는 같을 수 없다. 

우리의 상황과 하나님의 뜻

우리가 겪는 혼란은 많은 부분 이런 두 용법의 혼란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희생을 야기한 불법적 행태에 분노하며, 그에 대한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느낀다.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부분 조명을 끄고, 보다 느슨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한다. 이 큰 틀 속에서 사건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곧 하나님께서 (무고한) 학생들을 희생시키셨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배후에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고"라는 해석이 붙는다. 

이런 해석의 의미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순간, 그 사건과 관련된 도덕적 책임을 묻는 일은 중단된다. 대신 우리는 더 이상 그 희생 자체에 집착하지 말고, 이런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기회에 마음을 모으고,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런 논리의 실질적 기능은 이런 불행한 사태와 관련된 '불편한 도덕적 물음'으로부터 서둘러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문창극 씨의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일제 36년의 고통스런 역사와 남북 분단 및 동족상잔의 비극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틀 속에서 해석했다. 한국 현대사의 이런 아픈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현재적 상황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이런 도덕적 차원을 사뿐히 건너뛰고, 큰 호흡으로 이 불행 배후에 놓인 하나님의 뜻을 논하려 한다. 그리고 이 '뜻'의 사례들로 종래의 미개함과 누추함 대신 서구의 발달된 문명이, 한반도의 공산화 대신 분단이라는 다행스런 결과가, 그리고 일본과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경제성장이라는 축복들이 거론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전체 조명 속에 많은 진실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분노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을 통해 더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권연경 교수 / 숭실대학교 성서학·신약학,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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