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회갑을 고비로 나는 과중한 사회 활동에 지치고 있었다. 2014년 봄에 얻은 6개월 동안의 안식년은 진실로 내 자신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기회였다. 헨리 나우웬의 충고에 따라 사막의 영성을 맛보기로 마음먹었다. 모하비 사막 입구의 도시에 거처를 정하고 어떻든 사막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독과 침묵과 기도의 삶"은 참 어려웠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고독과 침묵과 기도는 실천하기도 전에 끝이 났다. 조금은 허무하지만 사막의 영성에 대해 서로 함께 나눌 만한 약간의 독서와 묵상을 얻었다.

사막은 나에게 겸손을 요구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겪은 한낮의 파괴적 폭염과 긴 밤새 불어젖히는 광풍은 그 무엇도 견디기 어려웠다. 사막에서는 시시각각으로 생존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겸손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달포 전에 해리포터 시리즈의 배우 데이브 르게노가 사망했다. 섭씨 49도까지 열이 치받는 자브리스키 포인트를 도보로 여행하는 만용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매우 건강한 장정이었지만 생존을 거부하는 사막의 열기를 견딜 수 없었던가 보다.

위대한 종교의 기원은 사막이라는 게오르그의 말이 생각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광야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돌이켜본다. 밤이 되어 아내를 천막에 누이고 사막 한 가운데에 자리를 깔아보았다. 나도 옛 선조들처럼 멋진 광야의 기도를 실천해 보리라. 그러나 곧 이 행동이 만용에 가까움을 발견했다. 날이 서늘해지자 전갈과 방울뱀들이 도처에서 출몰했다. 코요테들이 우리 천막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검은 실루엣을 뿌리고 있었다.

사막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삶의 모든 조건을 거부하는 사막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모든 자신감과 교만과 허울을 내려놓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찾게 된다. 진정한 코람데오의 시간이 찾아온다. 사막은 인간과 전능자를 연결하는 가장 긴밀한 공간이다.

겸손은 그 자체가 영을 분별하는 은사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항상 자신들을 아직 시작도 못한 자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났다. 사막의 교부들에게 마귀는 종종 천사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교만을 부추기는 여러 말로 그들의 타락을 유도하였다. 그때마다 사막의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아직 시작도 못한 자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귀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배덕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사막은 나에게 깊이 뿌리내릴 것은 권고한다. 사막의 소나무는 생존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자기 키의 다섯 배나 땅 속으로 파고든다. 사막에서 표면의 화려함을 추구하다가는 쉽게 소멸된다. 지표면에서는 자신이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푸르름을 유지하고 아래로 아래로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 치열함이 그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풍요한 환경에서 자라나 조그마한 고통과 시련도 이겨 내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는 자들은 사막의 소나무에게 삶의 치열함을 배워야 한다.

사막은 나에게 절제를 강요한다. 욕망의 무한한 만족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바를 잘 보전하는 영성이다. 사막에서는 최소한의 음식과 의복, 그리고 간소한 주거로 만족하고 하나님과의 교류에 전념할 수밖에 없다. 사막에서 풍요를 꿈꾸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사막에서 소비를 설교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자신의 노동이 주는 가장 작은 보상으로 생명을 유지하였다. 그러면서도 106세까지 장수하면서 진정한 성도의 본을 보일 수 있었다. 루시우스는 잠시도 쉬지 않고 갈대를 물에 적셔 새끼를 꼬아 팔았다. 세 푼 정도를 벌어서 두 푼은 문밖에 두고 한 푼으로 자신의 음식을 구하는 데 썼다. 그에게 노동은 곧 기도였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사막은 나에게 가장 귀한 것조차 가장 치명적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소금은 인간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물질이지만 사막의 절망과 함께 있었다. 사막의 열기는 모든 생물로부터 물기를 앗아간다. 삶의 근본인 물기를…. 그리고 돌과 자갈의 땅을 남긴다. 또한 소금이 남는다. 소금 골짜기, 소금 호수, 그리고 끊임없이 모래와 함께 써그럭거리는 내 몸의 소금. 모래언덕을 지나다 보니 악마의 옥수수밭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옥수수밭에 소금을 뿌려 두면 이런 현상이 나올까? 아, 그 옥수수밭 옆에 소금으로 절여진 폐허가 있었다!

사막은 나에게 나그네 환대를 가르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지혜로운 자가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배웠다. 또한 그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환대하고 자신과 똑같은 것으로 대접했다. 사막 여행은 항상 목숨을 거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나그네를 귀히 여기고 환대하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금식을 하고 있었다면 금식을 깨고, 비록 이단 종파의 나그네일지라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해하려 오는 사람조차도 시종여일하게 대접했다. 종교적 규례의 실천보다는 환대의 이웃 사랑을 더 중시하였다. 요한은 나그네의 발을 씻어 주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인 사막에서의 나그네 환대는 서로 마음을 열게 하고 누구든 평등하게 만들어준다.

사막은 고독을 통해 공감을 이끌어 낸다. 사막은 인간이 혼자 사는 게 불가능함을 보여 주는 학습 현장이다. 이웃과 공감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다. 나우웬이 정리한 바처럼, 공감은 고독의 열매이다. 끊임없이 판단하고 정죄하고 성급히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에게는 자기충족적 예언의 불완전한 분노만 남게 된다. 판단과 결정을 잠시 멈추고 잠깐 고독해 볼 필요가 있다. 고독이란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죽는 일이다. 그러므로 고독이 공감을 낳게 된다. 우리가 이웃에게 섬김을 베풀기 위해서는 이웃에 대해 죽어야 한다. 진실하고 깊숙한 고독이 이 섬김을 가능하게 한다.

사막의 교부들이 나타난 때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끝나고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로 편입하던 때이다. 초대교회의 신앙이 무너지고 교회가 부와 권세의 그늘로 들어가던 시기였다. 급속히 돈과 권력에 물들고 있는 한국교회도 이제 사막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니 사막의 영성은 교회 개혁과 기독교 윤리 실천과 생명 사역을 관통하는 영성이었다.

백종국 / 경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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