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좁고 약한 어깨 위에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부모와 가족의 기대, 주위 분들과 친지 및 선생님들의 기대가 힘에 겨웠다. 그러나 예수는 내게 삶의 의미와 방향을 알려 주시고 내 삶의 기반이 되셨다. 그리하여 나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으나 약한 마음, 의혹에 찬 신앙, 부족한 경험, 소극적 성격 등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었다.(308쪽)"

▲ <욥을 위한 변명> / 안석모 지음 / 두란노 펴냄 / 332쪽 / 1만 3000원

서평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읽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의실에서의 그의 표정, 말투, 목소리, 그리고 안경 너머의 형형한 눈빛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분의 마지막 6개월을 담은 투병 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엮여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특별한 인연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다. 다만, 그는 여러 학생들의 이름과 함께 내 이름을 기억해 주었고, 교정에서 마주칠 때마다 특유의 환한 미소로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무심한 탓에 지척에 있으면서도 나는 그분이 떠나시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 주셨던 분이 떠나시는 길에 나도 이름을 불러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고 죄스럽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에 대한 기억이 산 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친구 혹은 한 치 건너 두 치… n치의 이웃을 위하여(21쪽)" 남겨 놓으신 故 안석모 교수의 병상 일기는 그가 번역하여 소개한 스승 찰스 거킨(Charles V. Gerkin)의 책 제목처럼 '살아 있는 인간 문서(Living Human Document)'가 되어 우리 곁에 남았다.

2.

"돌봄과 상담을 가르치는 교수가 돌봄과 상담을 직접적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에 빠졌을 때의 그 당혹감(30쪽)"은 이 책의 고유한 가치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일평생을 돌봄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위로하는 목사로 살아온 그가 돌봄과 위로의 대상이 되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 즉 개인이 겪는 실존적인 아픔의 체험 속에서 해석과 공감의 경계가 무너진 새로운 해석학적 지평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점에서 <욥을 위한 변명>은 실존의 고통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돌봄과 위로의 길에 나서려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를 주는 책이다.

그는 "죽음이나 한계라는 신학적 개념보다는 메스꺼움이나 구토와 같은 신체적 고통이 더욱 현실적이고도 실질적인 것임을 실제로 경험한" 까닭에 "그것들(신학적 개념)이 신체적으로 어떤 의미나 실질적 내용을 지니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깨닫는다(35쪽)"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환자들의 무엇을 토닥여 주어야 하는 것일까?(35)"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실존의 고통의 체험과 더불어 "인간의 한계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63쪽)"에 이르게 된 때문이다.

"사랑의 은유요 대속의 상징이었으며 삶의 실상에 대한 기호(63쪽)"에 머물렀던 십자가와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몸소 체험하면서 그는 "예수님도 몸을 가지신 존재였다는 사실(64쪽)"을 확인하고, "몸을 통하지 않는 진실은 거품에 불과한 것(64쪽)"이라는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 점에서 "몸이 생명이고, 몸이 진실이고, 몸이 하나님(65쪽)"이라는 그의 고백은 여전히 관념에 확고한 자리를 내주고 있는 신학과 신앙에 경종을 울리는 말이라 해야 할 것이다.

3.

그의 수업에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 Ross)의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을 소개받아 읽었던 적이 있다.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그리고 수용(Acceptance)이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5단계의 반응이라는 것이 책의 골자였다. 그 역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앞에서 부인(否認)과 이인(離人)의 심리를 경험하였고, 두려움과 공포, 소외와 기피, 그리고 수치와 빚짐 의식으로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학생들에게 가르쳐 온 이론이 공허한 내용이 아니었음을 체험을 통해 입증한 것이다.

기억에 남은 또 한 권의 책은 랍비 헤럴드 쿠시너(Harold Kushner)의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이다. 고통은 신실한 신앙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성숙한 신앙은 고통과 더불어 고통을 넘어서는 데 있다는 정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으로 어스레한 기억 속에 남은 책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시 헤럴드 쿠시너의 이름을 보았을 때 나는 당신의 수업에 들어온 모든 학생에게 쿠시너의 책을 읽도록 한 교수님의 요청이 그 자신의 성숙한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성경과 말씀, 찬송과 기도, 위로가 암 투병을 하는 내게 참으로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만 믿고 신앙으로 이겨라' 하는 충고는 참으로 엉뚱한 것이다. '하나님이 더 크게 쓰시려고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이라는 위로와 설명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믿고 기도하면 치유된다'는 언명은 내가 믿음이 없어서 이런 질병에 걸린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신앙과 종교가 내게 힘이 되고 의미가 있는 것은 오히려 이 질병을 통하여 삶을 보다 깊이 있게 보고, 생각하고, 고통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한다는 데에 있다. 아니, 그런 길 자체가 신앙이고 종교이다. 그것은 삶을 '방어'하는 진지(陣地)가 아니라 삶을 '탐색'하게 하는 문(門)이다(99쪽)."

'삶을 탐색하는 문'으로서의 신앙은 또한 "헛된 꿈에 매달려 생을 탕진하고 있다는 사실, 남의 눈에 들기 위해 자기를 속이면서 허세와 위장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용납하지 못하고 언제나 꾸며진 자기를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174쪽)"로부터 '몸'을 돌이켜 예수를 쫓아 나서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생에 대한 낙관을 포기할 수 없는 모순과 양면성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넉넉히 보여 주었고, 나는 그것에 감사한다.

"내게 믿음이란 '어김없이 내일도 해가 뜰 것을 알고, 수긍하고, 수용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없이도' 해가 계속 뜰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수용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 믿음이란 나를 포함한 만물의 운행이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의 긍정을 말한다. 설령 내 신체가 아파서 고통스럽더라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수긍하고, 의지로 아픔을 이겨 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163~164쪽)."

4.

故 안석모 교수님은 모교 도서관에 책을 가장 많이 주문하고 기증하는 교수로 학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선생이 공부 못하는 학생을 한눈에 알아보듯, 학생은 공부 안 하는 선생을 한눈에 알아본다. 어쩌다 교수라는 직함을 얻게 될 수는 있어도,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연구자로서 은퇴하는 교수는 참으로 드물다는 사실을 대학 주변에 있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 점에서 안 교수께서 일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신 것은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은 그가 '살아 있는 인간 문서'가 되어 생의 마지막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는 사실이다. 일평생 돌봄과 위로를 가르쳤던 교수이자 목사였던 한 사람이 어느 날 돌봄과 위로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어 남긴 6개월간의 생생한 기록은 그를 따라 돌봄과 위로의 길에 나서려는 이들에게 값진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삶이라는 재미없는 농담과 마주쳐 길을 잃어버린 이들, 반복되는 좌절과 허무 구렁텅이 속에서 삶을 그저 견뎌내면서 지내고 있는 이들에게 '욥 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가슴에 요동치는 서늘한 좌절을 딛고 "오늘도 살아봐야겠다(327쪽)"고 말하는 욥 씨의 이야기를.

홍정호 / 신반포감리교회 담임목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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