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따가운 한낮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려 우물가를 찾은 여인에게 물을 달라던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을 거치고도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살고 있는 이 가련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한 사람에게 온전히 머물지 못하는 사람의 정으로도 육신의 욕구로도 채워지지 않을 삶의 깊은 목마름이 있음을 짚어 주셨다.

북이스라엘 저주받은 땅 사마리아에서조차 손가락질당하던 그녀의 깨끗지 못한 행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 삶의 목마름을 채워 줄 생수 된 이, 바로 그리스도가 당신임을 증거하심으로 그녀의 가련한 인생과 피곤한 맘을 품어 주셨다. 사람들의 낯을 피해 인적 드문 때를 좇던 여인은 오히려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자신을 옥죄던 삶의 갈증을 이해하시고 보듬으신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어찌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가. 뽕나무 가지 위에 숨어 예수님을 엿보다 졸지에 예수님께 불려 내려와 자신의 집까지 모시게 된 세리 삭개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못 견딜 지경이지만 당장 눈앞에서 인자하게 웃음 짓고 계시는 예수님 뵙기는 더욱이 감당이 되질 않았다. 세리랍시고 세금 명목으로 동족의 돈을 뜯어내어 로마 정부에 갖다 바치며 더불어 자기 배를 불리던 지난날이 낯 뜨겁게 뇌리를 메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질타도 정죄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계셨다.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내면에 그득한 괴로움과 외로움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안타까운 삶을 깊은 공감과 위로로 끌어안으셨다. 삭개오는 그런 예수님의 사랑 앞에 허물어져 가진 재산 절반의 기부와 사람들에게 등친 것의 네 배의 되갚음을 약속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음을 드러냈다. 그는 그렇게 잃어버린 자에서 돌아온 자가 되었다.

모태 신앙인으로 태어났지만 반항적 불자(佛者)로 십대의 후반을 소모적으로 보낸 나는 십대의 아슬아슬한 끝자락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때 만난 예수님은 나 때문에 나보다 더 아파하시는 분이셨다. 치기 어린 위악(僞惡)으로 충혈된 날들을 질주하던 내게 미련하다 질책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진심 어린 공감 앞에 나는 제정신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를 이해할 수 있었고 나를 용서할 수 있었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 여인이나 키 작은 세리 삭개오나 필자인 나나 모두가 다 모질게 악하지도 해맑게 선하지도 못한 혼란스러운 삶을 살면서 스스로를 왜곡된 시선으로 비난하며 세상과 사람들의 이해와 위로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아무런 바람도 아무런 기대도 없는 것처럼 차갑게 세상을 밀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 우리 모두가 감춰진 본심과 외부로 드러난 액면의 또 다른 본심이 충돌하는 분열적 삶의 교차로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의 온전한 사랑과 공감의 감화력 앞에 이렇다 할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린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한국을 방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소탈한 성품을 바탕으로 한 서민적인 행보로 종교적 정체성을 초월한 대다수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와 관심 속에 있으며 그의 소박한 일상의 언어로 표현된 어록은 각종 책으로 출판되어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이러한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한국 기독교계에선 다양한 반응과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모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4월 초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 기독교계 주요 교단장 몇 명이 모여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문제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 대화 중 "30년 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교회가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지 모른다. 교계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란 말이 나왔다 한다.

이렇듯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바라보는 교계 지도자들의 심기가 대체로 편치만은 않은 것 같은데 가뜩이나 종교 신뢰도에서 심각한 하락세를 보이는 한국교회가 '프란치스코 효과'로 인해 더욱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인함인 듯하다. 대중들은 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열광하는가? 무엇이 대중들로 하여금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각종 부조리와 부패 등 가톨릭교회 내부의 깊게 뿌리박힌 치부를 다스릴 때 매우 단호하고 강경한 자세를 일관되게 보여 준다. 그에 반해 세계 곳곳에 암묵적으로 형성된 계급의 하층에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대할 때는 ‘가난한 이들의 벗’이란 별칭이 아깝지 않을 만한 따끈한 자애로움과 그들의 애달픈 심정에 다가서는 깊이 있는 공감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중들에게 있어 열광할 만한 종교계 인사가 프란치스코 교황만은 아니다. 불교계 인사인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은 국민 멘토라 불리며 즉문즉설이란 특유의 소통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그러나 각자에겐 너무나 큰 고민들을 진지하게 들어주며 불교 특유의 허공을 부유하는 선문답이 아닌 위로하듯 때로 격려하듯 그 상황을 공유하며 공감하며 치열한 고민의 틈바구니에 한줌 쉼 쉴 공간을 열어 주는 듯 친숙한 그만의 특유의 어법은 또 다른 의미의 공감 능력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법륜 스님이 대중과 소통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대중이 감화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대중을 향한 몇 마디의 말은 제자리에 꿈쩍 않고 머물러 힘겹게 공회전하던 일상을 툭 건드려 한 걸음 나가도록 밀어 주는 듯한 전환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가치 없는 고민에 묶여 무의미한 정체(停滯)를 겪고 있다 여겼던 시간들이 오히려 회복과 성숙의 기회일 수도 있음을 넌지시 찔러준다.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아 방기(放棄)됐던 마음을 인정해 주고 토닥여 주는 따뜻한 말과 눈빛에서 감정적 정서적 정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이들의 말 토씨 하나하나까지 곱씹어 의미를 되새기며 가슴에 품고 손과 발에, 삶에 체화시키려 노력한다. 이들이 불특정 다수에게 또는 특정 개인에게 씨익 미소 지으며 던지는 조언이 듣는 이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제공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삶을 이해해 주고 진정성 있게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뭐라 뭐라 방법을 제시해 주지 않아도 굳이 답을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아도 같은 마음으로 들어 주고 순간을 공유하는 것으로 내면에서 배설되지 못한 정서적 찌꺼기들이 일상 밖으로 배출되고 마음이 회복되고 안정된다. 나아가 쓰디쓰게 고착됐던 하루에서 조금 더 나은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 감화력은 결국 인간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과 이해와 공감에서 비롯된다.

▲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감화력 레벨 지수를 보여 주는 이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아닌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개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감화력을 잃은 것을 슬퍼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사진 제공 위키미디어 공용)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감화력 레벨 지수를 보여 주는 이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아닌가.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 여인, 세리 삭개오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제자로 발탁된 열두 명의 갈릴리 무지렁이들부터 해서 간음하다 딱 걸린 여인, 문둥병으로 발 딛는 곳곳에서 돌 맞던 병자들, 각종 귀신 들려 자아를 상실했던 자들, 자식과 형제를 잃고 가슴을 쥐어뜯던 이들, 이런저런 죄로 동족에게 왕따당하던 사람들까지 이들 모두가 다 각자의 힘들고 고달픈 현실 속으로 어느 순간 불쑥 들어와 자신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시고 감싸 안으신 예수님의 감화력 앞에 속절없이 무장해제 된 사람들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에 있어 예수그리스도의 감화력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역사적으로 한국교회의 대표자들은 불의한 정권 찬탈로 권좌에 오른 군부 또는 사회적 기득권을 움켜쥔 권력의 실세들에게 심도 높은 감화력을 보여 왔다. 세월호 참사 때 온 국민이 심정적 국장을 치루며 유족의 눈물을 닦아 주려 애쓰고 있을 때 한국교회의 대표자들은 우는 사람 뺨을 후려갈기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발언들을 경쟁적으로 쏟아 내며 박근혜 정부를 위시한 권력자들의 눈물을 닦아 드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 번 틀어쥔 권력은 다시 놓고 싶지 않고 그 권력에 따르는 책임에선 또 웬만하면 자유롭고 싶은 이 나라 지도자들의 이율배반적 행태에 고개 끄덕이며 깊은 공감을 표해 왔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법륜 스님이 수준 높은 공감 능력으로 대중과 소통하며 깊은 감화력을 보여 왔다 해서 카톨릭 교회나 불교계의 모든 성직자 또는 스님들이 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법륜 스님 같은 감화력을 소유했다고는 생각지 않듯이 한국교회의 대표자들이 백성들에 대한 공감이 결여된 권력 지향적 감화력으로 꾸준히 일관성 있게 대중들을 실망시켜 왔다 해서 한국교회의 모든 지도자 내지는 구성원들이 다 이 낯 뜨거운 감화력의 주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피해 가족들을 돕다 고열과 패혈증으로 쓰러져 투병중인 문명수 목사가 있고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평화 활동을 하다 수감된 송강호 박사와 임보라 목사와 기독인들의 연대인 제주 평화 순례단이 있다. 우리에게는 세월호 참사 당시 임시 유가족 대표를 맡았다가 사기꾼이라 누명을 쓰고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위해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425.46km를 걸은 송정근 목사가 있으며 청도 23번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동네 할머니들을 지키는 백창욱 목사가 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친히 백성 무리에 섞여 말씀하시며 행동하시며 보편적 정의로 드러내셨던 하늘의 의가 우리가 살아가는 기막힌 이 땅에서도 또한 명백히 구현되리라는 믿음을 품고 사회의 기저(基底)를 훑으며 민심을 돌보고 백성의 쓰라린 심지를 부둥켜안고 그들의 혹독한 하루를 공유하며 공감하는 예수그리스도의 감화력 앞에 무릎 꿇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액면은 '프란치스코 효과'에 교세 위축이나 걱정하며 수세적 방어선 구축에 열중하는 옹졸한 모습일 뿐이다. 한국 기독교의 연관 검색어에 정의나 존중, 화합, 상식, 사랑, 사회적 약자 보호, 소수자 인권 등의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개독, 배타, 종북 타파, 비윤리, 부도덕, 성장, 탈세, 배임, 횡령, 간음, 성추행, 독선, 권력 지향 등등의 무슨 구원파 유병언에게나 연관될 것 같은 자극적인 단어들이 줄줄이 따라붙는다.

주일이면 전국 수만 개의 교회 강단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이신 감화의 행적이 선포되고 그 행적을 따르리라는 아멘이 울려 퍼지지만 정작 현실에선 몇몇의 그러나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자부할 만한 인사들의 자충수에 가까운 언행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민낯은 위선의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로 권력과 물질과 성공과 성장에 감화된 한국교회의 현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감화력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한국교회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프란치스코 효과'도 '법륜 효과'도 아닌 그 존재의 의미조차 희미해진 '예수그리스도 효과'의 상실이다.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법륜 스님 같은 탁월한 감화력을 갖춘 대표 인사의 등장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기단으로부터 상층부까지 곳곳에 자리 잡은 예수 그리스도께 감화되어 그의 의를 따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감화력이 그 힘을 발휘할 '예수 그리스도 효과'의 주체로서 자신들의 평범한 일상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천천히 주위 고단하고 피곤한 인생에게 다가서 그 삶의 고민에 공감하고 한 사람의 마음을 돌보는 소박한 실천이 필요하다.

어떤 자리에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선을 행한다는 것은 짓밟힌 한 사람을 일으켜 주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이고 그 삶에서 절망과 좌절을 걷어 내 주는 것이다. 예수의 사람들이 그렇듯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감화케 하심을 본받아 각자의 일을 감당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예수 그 이름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기대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눅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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