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비가 내렸다. 그날도 집을 알아보던 참이었다. 지난번 이사 때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던 부동산 사장님과 함께, 약속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며칠 전에는 이 아파트 다른 동을 봤었는데 입구 분위기는 그때와 달랐다. 같은 아파트라도 집마다 묘한 분위기 차이가 난다. 어떤 집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하고, 어떤 집은 오래된 듯하다. 이번 집은 후자 쪽에 가까웠다. 젊은 엄마와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문을 열어 줬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종교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벽에 성경 구절이 큼직하게 적힌 묵직한 나무 액자가 걸려 있다. 다른 여백에도 제각각의 크기로 액자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환해졌다. 같은 종교라는 것만으로도 유대감이 생긴다. 그러나 그 느낌은 길게 가지 못했다. 천천히 둘러보며 집주인의 분위기를 느꼈다. 어둡고 우울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가득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성구 액자가 무색했다. 내 주변 신자들도 집안 곳곳에 성경 구절로 도배가 되어 있지만 이렇게 어둡진 않았다. 억지일망정 웃으려 했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생기가 있었다. 어쨌든, 다 둘러본 후 씁쓸한 기분으로 가볍게 인사하고 나왔다.

 

전도를 하다 보면 여러 집을 방문하게 된다. 집마다 독특함이 묻어 있다. 그것은 집주인과 닮았다.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찬 집, 소박하고 시골스런 집, 필요한 것만 깔끔하게 정돈된 집, 책으로 둘러싸인 집 등등. 그 집의 사람이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예측해 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믿지 않는 사람들 집의 특징이 있다. 붉은색 부적과 큼직한 달마도 그림이다. 부적은 보통 현관 입구나 방문에 조그맣게 붙여져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달마도는 거실 넓은 벽 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커다란 눈에 한 점 콕 찍힌 눈동자, 툭 불거져 나온 배가 우스꽝스럽다. 그네들은 이것이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믿고 있다. 병이 낫고 행운이 오며 부자가 되고 마음도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어느 집사님의 부적에 얽힌 일화가 생각난다. 시어머니가 부적을 써 오셨다. 남편 베개 속에 고이 보관해 놓으라고 한다. 부드러웠지만 거절할 수 없는 무거운 지시였다. 일단은 시키는 대로 베개 속에 넣어 놓긴 했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해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기도 요청을 해 왔다. 함께 기도하며 남편과 시어머니 몰래 이 부적을 없애기 위한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곧 얼마 되지 않아 기도 응답처럼 쉽게 처리됐다. 집사님 목소리가 어찌나 탄력이 있던지. 꽃봉오리가 터지듯 생기가 돌았다.

 

반면에 나는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믿지 않는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무시 같았다. 이것저것 힘든 현실 때문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자 손수 부적을 챙겨 온 시어머니의 마음을 집사님은 보지 못했던 거다. 종교를 떠나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신에 대해서는 꼬치꼬치 알려고 애를 쓰면서 정작 사람에 대한 이해는 등한시했다. 사람은 실수가 많아서 하는 일마다 꼬이지만 신이 알아서 그 베베 꼬인 것을 선한 방향으로 바꾸실 거라는 꼼수로 정당화한다. 기독교에 대한 우월감에 쩔어 타 종교를 업신여기는 모양새다. 그러면서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부적이 무어라고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

 

믿지 않는 사람이 부적과 달마도에 불안한 마음을 의지한다면 신자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경 구절이 적힌 다양한 액자와 십자가 모형이다. 우리 집에도 여러 개 있다. 심방 올 때, 생일 때 등 특별한 날 선물로 받은 것들이다. 나도 선물할 일이 생기면 주로 이런 유로 하곤 한다. 그런데 부적과 달마도, 성구 액자와 십자가 모형, 무슨 차이가 있길래 우상숭배라 손가락질하는 것일까. 종교만 다를 뿐 마음의 원하는 바는 비슷한 것 같은데. 우리가 미신이고 우상숭배라 단정했던 다른 종교의 장식물과 우리네 장식물은 그 용도 면에서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점괘도 그렇다. 20~30대 때 철학관과 점집을 찾아 자주 갔었다. 불안한 현실이 답답했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지금보다 나아지기는 할는지. 주변에서 유명하다고 소문난 곳을 찾아다녔다. 한참일 때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가기도 했다. 용하다는 곳은 소문처럼 용했다. 마치 예배당에 발을 들이자마자 은혜받았다는 어떤 이의 간증처럼. 그런 점집은 과거 스토리를 까발려 움찔하게 만들었다. 눈이 동그래지고 앞에 앉은 점쟁이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덜덜덜 무서웠다. 그러나 미래는 똑 부러지게 알려 주지 못했다. 다녀 본 철학관, 점집 거의 모두가 두루뭉술하게 끝내 버렸다. 콕 집어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그냥 좋아질 거란다. 더 용한 점집은 없는지 또 찾아 나섰다.

 

이렇게 점집을 찾아 헤맸더니 교회가 보였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유는 같았다. 점쟁이 대신 목사님으로. 부적 대신 성구 액자로.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조심하라는 말이나 꿈에서 목사님을 만나서 충만하다는 말이나. 점을 치고 굿판을 벌여야 안정이 된다는 말이나 주일예배 드려야 은혜받는다는 말이나. 신년 운세 보는 거나 송구영신 예배 때 신년 말씀 뽑는 거나. 모양새는 다르나 이유는 하나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울타리 바깥에서는 우리를 이렇게 본다.

 

내가 하면 믿음의 증거고 남이 하면 미신이고 우상숭배인가. 폄하하고 업신여기기 이전에 교회는 안으로 신중함을 가르치고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다.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 말이다. 남을 존중하지 못하고 자기를 내세우기 급급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게 지금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울타리 안에 있을 때 나도 마찬가지 태도였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와 그 안을 들여다보니 가관이더라. 이른바 거룩한 울타리 안에 갇힌 사람들은 바깥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대적 기도도 모자라 땅 밟기까지 해댄다. 신념이 넘쳐 민폐다. 이게 보이니 집에 부적이 있든 십자가가 있든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것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 변화를 본다.

 

<태백산맥>7권째 읽고 있다. 마흔 넘어 뒷북이다. 늦게나마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 정하섭과 소화의 사랑 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정하섭은 빨갱이다. 당시 시선으로 악마란 말이다. 소화는 악마를 내쳐야 마땅한데 그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사상이나 신앙을 들이대지 않았다. 정하섭도 소화를 무당이라 폄하하지 않았다.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했다. 빨갱이도, 무당도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렇다고 사랑 때문에 빨갱이를, 무당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념, 사상, 신앙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거다. 존중하고 이해하려 했지 버리지 않았고, 버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짙게 밴 그들에게서 사람 냄새가 난다. 사무치게 절절하고 아름답다. 다르게, 무당다운 소화, 빨갱이다운 정하섭의 이야기는 사람을 죽이는 살벌한 전쟁 스토리가 된다.

 

이현미 / 로고스서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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