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7일 오전(한국 시각), 9일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222명, 부상자는 167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민간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 '제사장 나라'였던 유대인과 이스라엘, 현대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2013년 <복음과상황>에 연재했던 이인엽 박사의 글이 여전히 유효하여 <뉴스앤조이>에도 게재하고 나눕니다. 총 다섯 편의 글을 하나씩 올립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에서 이어집니다. -편집자 주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고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을 보며, 엄청난 핍박을 당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을 응원했었다. 그런데 국제정치를 공부하고 팔레스타인 현실을 보면서,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고 느꼈다. 유대인의 독립은 기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 천 년 이상 살던 아랍인이 집과 고향을 잃었고, 가자와 서안에서는 이스라엘의 가혹한 점령 정책이 지속되고 있다. 최근 가자 사태에서 보듯, 하마스(아랍 저항운동 단체)의 테러로 인한 이스라엘 인명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게 많은 아랍인이 이스라엘군에 살해됐다.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경험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가까운 이스라엘은 21세기에 찾아보기 힘든 인종주의적 점령 국가, 군사 국가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인종주의 군사 국가가 되었을까? 이는 건국 과정에 그 실마리가 있다.

로마제국에 의해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의 역사는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다. 반유대주의는 홀로코스트 이전에도 수 세기 동안 존재했다. 예수를 살해한 자들로 기억되고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의심과 핍박을 당해 온 것이다. 십자군 전쟁 때도 학살됐고, 기독교 개종을 거부해 처형·추방됐으며(유대인 추방령), 전염병이 돌면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거나 어린이들을 잡아다 피를 마신다는 소문도 돌았다(14세기 유럽의 흑사병 대참사 당시 그 책임을 유대인에 전가함). 중세에, 죄악시됐던 금융업에 많이 종사한 유대인들은 <베니스의 상인>에서처럼 탐욕스런 존재로 묘사됐고 유대 금융 세력이 역사의 배후에서 전쟁을 부추겨 돈을 번다는 주장도 있었다.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이후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고조되었다. 1894년 프랑스에서 유대계 장교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드레퓌스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를 취재한 유대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 국가 수립만이 해결책이라 주장, 유대 민족주의 운동인 시오니스트의 선구자가 된다. 그의 주도로 스위스 바젤에서 1897년 열린 제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조국 시온의 언덕으로 돌아가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는 선언을 채택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정점에 달한 홀로코스트에서 600만 인종 청소를 당한 유대인들은 극도의 피해의식과 트라우마가 생겼고 '종족 말살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안보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는 정신적 DNA가 형성됐다.

이는 현재 이스라엘의 억압적 팔레스타인 정책을 설명해 준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이 독립과 안보를 추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건국 당시 팔레스타인의 6.6%(아랍 87.5%)를 소유했던 이스라엘이 수차례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해 78%를 차지했다. 이에 더해 1967년 경계이자 남은 22% 영토인 가자와 서안까지 점령하면서 그 안에까지 불법적으로 정착촌을 만들고 있는 것은 "나의 '안전'이 너의 '기본권'보다 더 중요하다"며 안보를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 않겠다는 태도로 보인다. 팔레스타인에서 평화 활동가로 일했던 한 친구가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핍박받은 경험에 따라 아랍인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고 말할 정도다. 나치에게서 차별과 인종 청소를 당한 유대인들이, 그들도 역시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인 시오니즘을 형성해 자기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약자인 아랍인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시오니즘과 이스라엘 건국 과정

랄프 쇤만의 <잔인한 이스라엘>에 초기 시오니스트들의 생각이 잘 나타난다. 시오니즘의 대부로 불리는 테오도르 헤르츨은 1904년 향후 유대 국가의 모습을 '아시아에 대한 방어벽' '야만성으로부터 문명을 지키는 전방 요새'로 묘사해 인종주의를 드러냈으며 팔레스타인을 넘어 나일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의 영토(레바논과 요르단 전체, 시리아 3분의 2, 이라크 절반, 투르크메니스탄 일부, 쿠웨이트 절반, 사우디 3분의 1, 이집트의 포트사이드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카이로를 포함한 시나이반도 등 이집트 3분의 1)를 시오니즘의 목표로 제시했다. 랍비 피쉬만도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정할 때인 1947년 동일한 주장을 했다(97쪽). 블라디미르 야보틴스키는 1923년, 시오니즘의 교과서인 '강철벽(The Iron Wall)'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언 장면. 현대 시오니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 초상화 아래 서 있는 이가 벤구리온 이스라엘 초대 총리. (사진 제공 위키미디어커먼스)

"우리와 아랍 민족 사이에는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 자발적인 화해를 위한 어떤 토론도 있을 수 없다. …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아랍 민족의 국가에서 유태인이 다수로서 지배하는 국가로 바꾸려고 하기 때문이다. … 원주민의 동의를 얻어 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사례를 단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가. … 식민지화는 팔레스타인 아랍 민중의 의지에 반해 진행되어 왔고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모든 식민지화 과정은, 그것이 아무리 제한된 형태라 하더라도, 원주민들의 도전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식민지화는 강철 벽을 포함한 무력의 호위 속에서 진행되고 발전될 수밖에 없다. 강철 벽은 원주민들이 결코 돌파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대아랍 정책이다.(32쪽)"

야보틴스키의 '강철'이라는 표현은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상이라는 점도 중요한데, 시오니스트 역시 인종주의자들인 남아공의 식민주의자들과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협력 사업도 진행했다(30쪽).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홀로코스트 당시 시오니스트들이 적극적 유대인 구출 노력에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시오니즘 대변자였던 랍비 스테픈 와이즈는 1943년, 팔레스타인의 식민지화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 유대인 구조법안에 반대 증언을 했다.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헤임 바이즈만은 "당신은 600만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니라는 뜻을 밝히며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젊고 유능한 인물들을 구출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부다페스트 유대인구조위원회의 루돌프 카스트너 박사는 1944년, 나치 아돌프 아이히만과 맺은 비밀 협약에서 600명의 저명한 유대인을 살리는 대신 80만 유대인 학살에는 침묵했다. 이런 점에서 시오니스트들은 동족 구출보다 시오니즘에 따른 유대 국가 건설에만 집중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테러를 적극 활용한 시오니스트

과거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나 현재 하마스를 테러 단체로 비난하고 평화 협상을 거부한 시오니스트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 테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스라엘 6대 총리 메나헴 베긴은 시오니즘 테러 조직 '이르군'을 이끌던 중 영국 총독부가 1939년부터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제한하자, 1946년 총독부와 헌병사령부가 있던 예루살렘의 다윗 왕 호텔을 폭파했다. 이 테러로 91명이 사망했다. 1940년까지 '이르군'에 참여한 이츠하크 샤미르는 1943년 '레히'라는 조직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당시 유엔의 중재자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하던 스웨덴 외교관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이 극우 시오니스트들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자, 그는 유엔 차량을 공격해 암살하는 등 여러 테러 사건에 관여했다. 샤미르는 후에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들어갔다가 1983~84년과, 1986~92년까지 7대 총리를 지냈다. 이렇듯 극우 시오니스트는 자신들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동족 테러와 암살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과거를 생각할 때, 이스라엘 건국 초기보다 더 극심한 점령과 식민 통치하에 있는 아랍인들의 저항 폭력을 유대인들이 단순한 테러로 비난하며 협상을 거부하는 것은 모순이다.

1947년 유엔의 분할안이 공포되자 '이르군'과 '하가나' 같은 시오니스트 민병대들은 아랍인과의 공존을 말하는 일부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영국의 암묵적 지지하에 팔레스타인 아랍인 추방을 위해 조직적 테러를 시작했다. 특히 1948년 3월부터는 'D계획(공식 명칭 여호수아 계획)'이라는 학살과 추방 작전을 시작했는데, 그해 4월 9일 데이르야신(디야신)에서 254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로 인해 75만 명 아랍인들은 '이르군'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떨며 팔레스타인을 떠나 피난민이 됐다.

그 배후에 있던 초대 총리 데이비드 벤구리온은 1936년에 쓴 편지에서 "분할된 유대 국가는 마지막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과 주변 국가에 우리가 정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1938년에는 "나는 (아랍인들의) 강제 이송을 지지한다. 그것은 전혀 부도덕하다고 보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 책임자였던 요세프 바이츠는 1940년, "우리는 두 민족이 이 나라에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 작은 나라에 아랍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아랍 주민들을 모두 이웃 국가들로 이주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마을 하나, 부족 하나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48쪽).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나자 시오니스트들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하는데, 이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는 대재앙의 날이다. 미국은 다음 날 즉시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이후 팔레스타인은 10월 1일 열린 1차 팔레스타인 민족 회의에서 국가를 선포했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계속)

이인엽 / 미국 조지아 주 University of Georgia에서 '미국의 대북 외교 정책'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 기독인연합운동(서울대기독인연합)에 참여했고,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며 공부 중이다. godnation@gmail.com, www.facebook.com/inye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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