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문제는 한국교회를 진보·보수로 갈라놓는다. 대표적인 예가 6월 7일 서울 신촌에서 열렸던 퀴어 문화 축제다.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차세기연)를 중심으로 한 진보 기독교인들은 퍼레이드에 참석해 성 소수자들을 응원했고, 에스더기도운동본부·예수재단 등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반대 집회를 열며 동성애자들의 행진을 막아섰다.

7월 8일에는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성 소수자와 관련된 부분은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홍재철 대표회장)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한영훈 대표회장)은 7월 10일 논평을 내 후보자의 발언을 철회해야 한다며 김 후보를 비판했다. 헌법의 평등 이념에 따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사상·정치적 의견 등에 있어서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 금지법안은 한기총을 위시한 보수 교계 단체의 반대로 법안 상정이 번번이 좌절됐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곤 한다. 하지만 당사자인 동성애자들이 직접 나서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는 드물다. <뉴스앤조이>는 두 부류의 사람들, 신앙의 힘으로 동성애를 치유했다는 이들과 동성애자이지만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 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과 동성애 문제를 직접 들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신앙의 힘으로 동성애를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인터뷰를 고사했다. 이들은 신앙의 힘으로 동성애를 극복했지만, 자신의 과거 경력이 밝혀지면 제대로 된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 곽이경 씨는 전형적인 '교회 언니' 스타일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사회 운동가나 동성애자라는 이미지를 전혀 풍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삶과 신앙 여정은 평탄치 않았다. 그는 보수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뒤 신앙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육우당의 자살을 목격한 뒤로는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사진 제공 곽이경)
"성 정체성, 결코 기독교 신앙으로 바뀌지 않아"

7월 10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레즈비언이자 기독인으로 살아가는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곽이경 씨를 만났다. 곽 씨는 대학생 시절부터 인권 운동과 노동운동에 두루 참여했다. 비정규직노동센터 사무국차장,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고, 2월까지 동인련 대표직을 수행했다. 사회운동 판에서 잔뼈가 굵은 그인지라, 조금은 우악스러울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는 인터뷰 내내 수줍은 미소와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 갔다.

곽 씨는 반동성애 단체들이 조직화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 일이라고 했다. "2000년 후반에는 동성애허용법안반대국민연합(동반국)·동성애입법반대국민연합회(동방연)·참교육어머니회 등이 반동성애 운동의 선봉에 섰다. 겉으로 봐서는 교회와 별 연관이 없어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추적을 통해 모 교회에서 동반국에 1000만 원을 쾌척했다거나, 어느 교회에서 인력을 후원했다는 등 교회와 반동성애 단체들과의 유착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성적 지향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다. 자신이 변화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기독교 신앙으로 성적 지향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동성애자들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적 지향이 바뀐 척 행동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변화된 척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어요. 결국, 공포심이 만든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구원받을 수 없다는 공포심과 주위의 억압 때문일 것입니다. 성적 지향은 변화하기도 하고 단일하지 않은 범주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설령 자신의 성적 지향이 바뀌더라도 모든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성적 지향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동성애는 선천적인 게 아니라 전염이라고 말합니다. 치유해서 고칠 수 있다고 말이죠. 교회나 보수 단체들은 이들의 주장을 근거로 전환 치료를 시도합니다. 전환 치료를 경험한 청소년들이 자살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굉장히 폭력적입니다."

성 소수자 단체들의 연대체인 무지개행동은 해마다 LGBT 인권 포럼(성 소수자 인권 포럼)을 개최한다. 포럼 섹션 중 하나로 기독교와 동성애를 다루는 강의가 자주 열린다. 곽 씨는 대형 교회에 다니는 동성애자들이 많이 참석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목사들이 입만 열면 동성애를 저주하고 핍박하는 교회에 다니지만, 자신이 오랫동안 머문 공동체이기 때문에 차마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교회가 그들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교회는 그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내쫓기는 동성애자들

"작년 성탄절 이브에 한 20살 청년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 역시도 교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었죠. 교회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컸지만, 쫓겨나다시피 했습니다. 이후에 섬돌향린교회, 열린문공동체 등을 찾아갔지만 마음을 완전히 열긴 어려웠던 것 같아요.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 성 소수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고등학생 친구는 교회 수련회를 가서 "전도사님 너무 좋아요"하고 전도사를 껴안았어요. 둘 다 남자였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껴안은 게 아니었어요. 좋고 존경스러워서 껴안았는데, 전도사가 세차게 뿌리치면서 이것은 잘못된 거라고 말했어요. 그 친구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됐지요."

곽 씨는 교회를 떠난 성 소수자들은 교회에서 당한 모욕(안수기도당하고 성수를 뿌리는 행위들)이 큰 상처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동성애를 반대한답시고 시위하는 교인들과 목사들을 보면 예전에 받았던 상처들이 다시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외로 다시 한 번 교회를 통해서 그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 역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함께 해줬던 손은정 목사와 성문밖교회 교인들을 통해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해 농성 투쟁할 때, 성 소수자들이 일주일 동안 밤을 새우며 투쟁했어요. 하루는 인권 조례에 성적 지향이 빠질 것 같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다들 침통해했죠. 그때 매일 현장을 지키고 있던 임보라 목사가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성 소수자들이 참석했죠. 참석한 이들은 임 목사가 아이처럼 펑펑 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진정성을 느꼈고,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동성애자들은 내쳐진 경험이 많아서 본인을 받아들이는 의외의 경험을 할 때 엄청나게 마음을 쏟아요. 그래서 최근에 우리가 정말 이상한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해요. 주변에 교회 다니는 동성애자들이 정말 많아지고 있다고 말이죠. 어느 날 보니까 다들 길찾는교회에 가서 앉아 있고, 어디서 세례받았다고 하고, 섬돌향린교회에 우후죽순 모이고 그럽니다. 종교의 좋은 기능 중 하나가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인데, 성 소수자들이 교회를 통해서 위로받고 신앙심이 깊어지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 곽이경 씨는 성 소수자들이 교회에서 겪는 어려움을 설명해 줬다. 교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성 소수자들을 정죄하고 판단하지만, 당하는 성 소수자 입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라고 했다. 그는 성 소수자들은 내쳐진 경험이 많아,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의외의 경험을 할 때 엄청나게 마음을 쏟는다고 했다. (사진 제공 곽이경)
육우당 사건 때는 교회 증오해

곽이경 씨는 어렸을 적부터 가족을 따라 보수적인 교회에 출석했다. 청소년 시절에는 자신이 동성에게 끌린다는 것과 신앙의 간격을 이기지 못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교회에 완전히 발을 끊었다. 그러다 2003년 4월,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난 그것만으로 죽는 게 아깝지 않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육우당의 시신을 정욜(동인련 창립 멤버)이 발견하게 된다. 그 뒤로는 그에게 있어 교회는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가족들이 보수적인 교회에 다녔어요. 나 역시도 4~5살 때부터 주일학교에 나갔죠. 예전에는 가정 예배도 꼬박꼬박 드렸습니다. 기도할 때 눈 뜨면 눈을 꿰매 버린다는 꾸중을 들을 만큼 엄격했습니다. 주일날 돈을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죠.

 

90년대 초반에는 동성애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동성애자들 역시 자신을 수면 위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정체성 고민을 시작하면서부터 교회에 대한 고민도 함께 시작했어요. 이전까지 교회는 주일날 으레 가는 곳이었고, 가야만 하는 곳이었죠. 당시 그런 걸 자주 봤습니다. 예전 성인 중에 남색에 빠졌다가, 구원받아 성인이 된 어거스틴 등의 전기를 말이죠. 그 시기에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동성애는 나쁜 거고, 나는 죄인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멀리하게 됐죠.

 

대학에 가서는 교회를 계속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한동안은 기독교 동아리 선배들을 따라다녔어요. 성경을 과학적으로 가르쳐준다고 해서 굉장히 끌렸죠. 성경을 과학적으로 구명한다는 논리에 끌렸던 게, 스스로 교회 교리에 어긋나는 존재라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기독교 안에서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찾아보려고 했지만, 답을 찾기 어렵고 답을 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대학교 2~3학년 때 사회운동에 뛰어들면서 유물론·마르크스주의를 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는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죠."

그의 커밍아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대학 시절부터 사회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그인지라,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하면 그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가 나온다. 주변 사람들이 모를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니에겐 제대로 커밍아웃하지 못했다. 곽 씨의 어머니는 이름만 대면 누구든 알 수 있는 대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한동안 어머니에게 끌려서 교회에 나간 적이 있어요. 한 시간만 앉아 있다 나오자는 생각으로 따라갔지만, 한 시간 남짓한 예배 시간이 너무나 힘들었어요. 어머니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인권 운동을 한 지도 오래되고 해서 나를 거의 내버려 두셨죠. 주변 사람들 중에는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커밍아웃이란 게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에요. 여러 번 해야 하죠. 그때마다 사람들의 당황한 표정을 대하는 건 정말 곤욕스러운 일이에요."

죽음 앞둔 파트너의 요청으로 찾은 교회…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공동체
▲ 성문밖교회는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다. 1958년에 창립됐고, 손은정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한 2002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영등포노회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70, 80년대 노동자들의 보금자리가 됐던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파생된 교회로, 생협 운동·노동운동·다문화 운동·환경 운동을 펼치는 대안 교회다. 현재는 김희룡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다. (성문밖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그가 다시금 신앙을 회복한 계기는 파트너의 죽음을 통해서였다. 뇌종양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던 파트너가 교회에 나가 보고 싶다는 의사를 곽 씨에게 전했고, 곽 씨는 거동이 불편한 그를 이끌고 성문밖교회를 찾았다. 성문밖교회 손은정 목사와 교인들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보살펴 주었다. 파트너는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죽음을 얼마 앞두고 손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를 교회를 통해 치유했고, 교회는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공동체라고 고백했다.

당시 성문밖교회에는 손은정 목사가 담임으로 있었고, 교인들은 40~50명 정도였다. 교인 중 성 소수자 커플을 처음 본 이들이 많아 처음에는 굉장히 낯설어했다. 하지만 손 목사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손 목사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본인이 판단하거나 캐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곽 씨는 지금도 손 목사를 가장 믿고 따른다고 했다. 손 목사를 만나기 전에는 목사라는 사람을 존경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연지 언니(가명)가 세례를 받고 싶어했어요. 세례를 받기 위해 손 목사님과 셋이서 성경 공부를 했어요. 연지 언니는 뇌종양이어서 배운 내용을 계속 잊어버리지만, 손 목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명해 주었어요. 연지 언니는 병세가 심해져 끝내 병원에 입원했죠. 손 목사님은 성탄절 교회에서 연지 언니에게 세례를 해 줬어요. 그 뒤로도 손 목사님은 병원에 자주 찾아와 우리를 보살펴 줬습니다. 당시에 파트너 가족들과 마찰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손 목사님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보듬어 줬습니다.

 

한번은 새로 온 전도사 한 명이 손 목사님에게 동성애자들을 돌볼 수는 있지만, 그들의 관계를 인정하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얘기를 했었죠. 그랬더니 손 목사는 "그냥 보아라. 사랑하는 사람들이지 않냐. 그거면 됐지 않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벽이 완전히 허물어졌어요. 몸으로 직접 부딪히니까 됐죠. 그 이후로 교리라는 것이 사랑과 생명 앞에서는 큰 벽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연지 언니 장례식에도 교인들이 정말 많이 왔습니다. 이런 일련의 경험이 없었다면 교회에 계속 다닐 일이 없었을 것 같아요. 교회에 대한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죠."

성문밖교회는 유아 세례받는 아이들과 교인 한 명을 멘티와 멘토로 맺어 준다. 곽 씨 역시 세례 멘토인 친구가 있다. 요즘 그의 가장 큰 낙은 그 꼬마 친구의 성장을 지켜보고 혼자 흐뭇해하는 것이다. 신촌에서 열린 퀴어 문화 축제 때도 꼬마 친구 가족이 찾아와 응원해 줬다고 말했다. 그는 교인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게 정말 즐겁다고 말했다.

악순환의 고리 끊자…"교리보다 중요한 건 생명"

성문밖교회는 섬돌향린교회나 열린문공동체와 같이 성 소수자들을 위한 사역을 전문적으로 하는 교회가 아니다. 동성애자는 곽 씨 한 명뿐이다. 하지만 곽 씨가 교회에 나온 뒤로, 성문밖교회 교인들은 연대 활동에 참여하는 식으로 성 소수자 인권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모든 교인이 거리낌 없이 성 소수자들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처음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라고 했다.

"한국교회 중 조금 열려 있다는 교회들 역시 동성애 문제에서만큼은 여전히 보수적입니다. 성 소수자들은 신앙과 성 정체성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고통을 받지만, 공동체에서 쫓겨날까 봐 아무런 티를 내지 못해요. 교인들은 자신의 주변에는 동성애자들이 없다고 지레 짐작해 스스럼없이 동성애자들을 정죄해요. 악순환의 반복이죠. 어려운 일이지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교리보다 중요한 건 '생명'이에요."

곽이경 씨는 성 소수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교회라고 했다. 한국교회가 고착된 시각으로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한, 앞으로도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다며 동성애를 죄의 개념이 아닌 인권의 차원으로 접근해 주길 원했다. 그는 교회에서 성 소수자들을 내쫓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지 고민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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