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윤리실천운동·성서한국·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 등 복음주의 단체들이 구성한 세월호참사를기억하는기독인모임과 촛불교회(최헌국 목사)가 7월 10일 대한문 앞에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촛불 기도회를 열었다. 150여 명의 그리스도인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자와 참가자들이 일곱 봉인을 떼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주고받았다. 세월호의 진실을 막으려는 자들의 심판과 밝히려는 자들의 신원을 기원하며 엄숙하게 예전을 진행했다.

설교를 전한 김형원 목사(하.나.의.교회)는 세월호 참사가 우리나라의 '위장된 평화'를 드러냈다고 말했다. 권력자들이 주입한 거짓 평화를 깨부수고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희생자 유가족들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철저하게 진상이 규명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원 목사의 설교문 전문을 싣는다. - 편집자 주

작년 말부터 시작된 평범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인사 문구 하나가 우리 사회를 강타하면서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안녕들 하십니까?'

이 말은 '잘 지냅니까', '별고 없으신가요', '평안하십니까'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는데 기독교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인사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샬롬', 즉 '평화를 누리고 계십니까'라는 유대식 인사말입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인사말에 안녕과 평화가 담겨 있다는 것은 '평화'가 우리들 삶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필수적인가를 잘 보여 줍니다.

평화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대개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소극적 평화'이며, 평화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개념입니다.

'적극적인 평화'는 '모든 것이 균형과 질서가 잡혀서 모든 사람이 안정된 삶을 영위하며, 모든 피조물 사이에 갈등과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평화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복 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 (사 65:19-23)

우리는 이런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가 국민소득이 높아져서 좋은 집에서 살고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고 멋진 자동차를 타고 최신형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둘러선 거대한 빌딩 숲 이면에 드리워져 있는 그늘을 세밀한 눈으로 둘러보면,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재기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거리로 나앉은 노숙인들, 부당하게 쫓겨나 건물주와 그들만 보호해 주는 법을 원망하고 있는 세입자들, FTA로 호재를 만났다고 환호하는 대기업 뒤에서 무너져 가는 농어촌의 현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 취업의 길도 막막하지만 정작 취업했다고 해도 언제 다시 실업자 신세로 내팽개쳐질지 모르는 계약직에 고용된 청년들, 부당 해고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 후쿠시마의 재앙이 언제 이 땅에서 반복될지 모르는 불안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원전 주변 주민들, 대도시의 불을 밝혀 주기 위해 머리 위로 거대한 송전선이 지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고통스럽게 받아 내야만 하는 노인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평화는 먼 나라의 일로 여겨집니다.

기득권자들의 거짓 평화 선언

▲ 김형원 목사가 7월 10일 열린 촛불 기도회에서, 지금 세월호를 잊고 평화를 얘기하는 것은 '위장된 평화'라고 설교했다. 김 목사는 철저한 진상 규명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정한 삶 속에서 신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권력을 틀어쥐고 '이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마치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꾸미려고 합니다. 실제로는 전혀 평화롭지 않지만 겉으로는 평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일컬어 '위장된 평화'라고 합니다.

그들은 관제 언론들을 총동원하여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외치게 합니다. 또한 화려한 번영의 겉모습을 보여 주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단물로 대중들의 혀를 달콤하게 적셔 주면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반면, 숨겨진 불의와 고통을 지적하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를 무너뜨리는 불순분자, 종북 세력, 반국가 세력이라고 낙인찍으며 온갖 압박을 가합니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평화는 강자가 폭력으로 약자를 억눌러 그들의 부르짖음과 최소한의 저항조차 허용하지 않는 거짓 평화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위장된 평화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권력자들은 억압과 불의가 가득했던 상황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시대를 평화의 시대라고 선전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팍스로마나'는 오직 로마의 시민들에게만 평화의 시대였습니다. 노예, 외국인들, 그리고 여자들에게는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혀 평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팍스로마나는 위장된 평화입니다.

미국은 독립 이후 엄청난 번영을 누리면서 세계의 최강국으로 부상합니다. 사람들은 그때를 '팍스 아메리카나', 즉 미국의 평화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누구를 위한 평화였습니까? 오직 백인들만을 위한 평화였습니다. 수천 년 동안 평화롭게 살던 고향 땅에서 쫓겨나고 대량 학살당한 아메리칸 인디언들, 그리고 노예로 잡혀 와서 죽을 때까지 농장을 벗어나지 못한 흑인들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불의와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땅의 권력자와 기득권자들은 '팍스 코리아나'를 선전하면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위장된 평화의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청소년 학력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1~2위를 다툰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10대 청소년들은 매일 한 명씩 자살하고 있고, 5명 중에 1명은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는 상태입니다. 매년 세월호 희생자만큼의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것입니다. 무역규모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이라며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그 업적은 세계 최고의 산재 사망률로 매년 2000명(10만 명당 18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죽어 가면서 흘린 피 위에 세운 것입니다.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어가면서 장수 대국을 성취했다고 뿌듯해하지만, 100만 명이 넘는 노인들이 홀로 외로운 삶을 가까스로 영위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통치자들은 '평안하다, 평안하다' 외치고 계속 이 길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위장된 평화를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장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화와 갈등과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가짜 평화입니다.

'평화의 왕'은 왜 불을 던졌나

▲ 복음주의 단체들이 구성한 세월호참사를기억하는기독인모임과 매주 목요일 대한문에서 촛불 기도회를 하는 촛불교회가 연합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중간 중간 기도와 찬송을 올렸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위장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화가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민들에게 이 사회가 아무 문제없다고 믿게 하려고 약자들의 권리를 뭉개고, 그들의 울부짖는 목소리를 철저히 틀어막아, 결국 그들이 이 사회를 저주하면서 죽어 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24명의 죽음이 이것을 웅변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결국 위장된 평화를 선전하는 사회는 안에서부터 생겨난 상처로 인해 점점 허약해져서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위장된 평화는 깨부숴야 합니다. 그 실체를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곪은 부분을 도려내고 상처를 치유하여 참된 평화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턱대고 평화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위장된 평화 속에서 착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불을 던져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위장된 평화를 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마 10:34)

평화의 왕이 왜 칼을 던진 것입니까? 위장된 평화가 제거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롭게 사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너는 죄인이다'고 선언하면서 그들의 삶을 흔들었습니다.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열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에게 현실을 일깨운 것입니다. 위장된 평화를 깨닫게 한 것입니다.

또한 정치와 종교를 장악하고 있었던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서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그들은 기존 정치·종교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었지만, 주님은 그 질서가 깨져야 하나님의 참된 평화의 복음이 세워질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의 핵심이 희년의 전복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21)

희년의 선포는 위장된 평화 속에 안주하려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선언입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질서를 흔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압제했습니다. 그들을 '세상을 혼란케 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평화를 깨는 자들이라고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평화를 깨는 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위장된 평화를 위해서 참된 평화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저주하고 그들의 체제를 뒤엎으시면서 위장된 평화를 제거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이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할 때인가

세월호 사고는 우리 사회를 포장하고 있었던 '위장된 평화'를 잘 드러내 준 사건입니다. 생명보다도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장사치들, 자신이 맡은 자들을 보호하지 않고 위기 상황에서 혼자 살아 보겠다고 뛰쳐나가는 무책임한 일꾼들, 권력의 감시자로 출발했지만 자신의 소명을 저버리고 오직 권력에만 충성을 다하는 언론들, 슬픔을 당한 유가족의 눈물이 아니라 대통령의 눈물만을 닦아 주는 데 혈안이 된 권력의 충복들, 사고의 핵심을 해결하기보다는 희생양을 찾고 꼬리 자르기만을 하면서 권력의 주구가 된 사법기관들. 이들은 과거에도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외치면서 거짓 평화, 위장된 평화를 선전해왔는데, 이제 그 모습이 세월호 사고로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세월호 사고가 난 지 세 달 가까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6·4 지방선거를 치르면서, 월드컵을 보면서,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면서, 이제는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할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고 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유가족들은 여전히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유가족들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위로한답시고 던지는 '이제는 그만 잊으라'는 말입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딸을 잃은 어느 엄마는,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이 유가족들한테는 제일 큰 상처"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 사회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로 빨리 돌아가게 하는 것, 그렇게 포장하는 것은 모두 '위장된 평화'를 위한 시도입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이제 세월호 사고가 드러낸 상처들이 치유되었는가? 그래서 진정한 평화가 회복되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지금도 속속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6·4 지방선거 이후 표변(豹變)한 권력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지 않습니까? 세월호 유가족에게 '가만있으라'고 망언을 하는 국회의원을 또 다시 보게 됩니다. 유가족이 아니라 VIP를 지키고 위로하는 게 최고의 사명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유가족들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어느 유가족은 이렇게 말합니다. "국민들이 더 이상 같이 우울해할 필요는 없지만, '참사 원인을 밝히는 일에 함께하겠다',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그런 말들이 우리들한테는 힘이 된다." 아직 평화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평화를 선포하는 것은 '위장된 평화'를 선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상 규명은 정의를 세우는 일

▲ 참가자들은 길 건너 서울시청 합동 분향소를 조문하는 것으로 기도회를 마무리했다. 합동 분향소에 오랜만에 긴 줄이 생겼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교만함입니다. 그러나 알려는 노력도 하지도 않고 묻어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태도는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의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재판에 관여하여 누가 진정한 범죄자인지 판별해 주기도 하셨고, 백성들이 고난을 당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 주기도 하셨습니다. (배교, 우상숭배, 율법 무시 등)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래야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 있고, 누가 잘못을 했는지 밝힐 수 있고, 그들에게 정당한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더 중요하게는, 동일한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군가 살해당했을 때 수사관들이 그 사람이 왜 죽었고, 누가 죽였는지 밝히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사야는 "공의의 열매는 평화요, 공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고 선언합니다(사 32:17). 정의가 평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진정한 평화는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의의 한 축은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여 정당하게 보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가 세워질 때야 비로소 참된 평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시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야 합니다.

통치자의 제1의 사명은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명의 귀한 생명들이 바닷물 속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간 사건에 대해, 유족들과 시민들이 진상 규명 촉구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기 전에, 먼저 정부에서 진상 규명을 위해 믿을 만한 움직임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통치자들을 세우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상한 현상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진상 규명은 정부가 해야 마땅한 일인데, 왜 유족들과 국민들이 나서 진상 규명을 요청하면서 서명운동을 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사고 후 얼마나 긴 기간 동안 정부가 미적거리고 애먼 사람을 추적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으면, 이렇게 국민들이 일어나서 진상 규명을 제대로 하도록 촉구하겠습니까?

세월호 사고도 큰 불의요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지만, 그것보다 더 큰 악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고 원인에 대한 책임 있는 조사를 회피하는 것, 불의를 저지른 자들을 합당하게 처리하지 않는 것, 사고 원인 조사 과정에서 진실을 은폐하고 몸통과 꼬리를 뒤바꾸면서 본질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악한 이유는, 세월호 사고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덮어 주면서 우리 사회가 새롭게 되는 길을 막고, 결국 악의 세력이 완전하게 우리 사회를 장악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생자에 대한 모욕이요, 희생자 가족에 대한 조롱이요, 역사에 대한 반역이요, 슬픔과 분노를 삼켜야 하는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테러입니다.

평화의 사도들이 치러야 할 대가

예수님은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마 5:9)

우리는 평화의 사도로 부르심받았습니다. 그래서 평화가 깨진 이 땅의 모습, 고통 속에서 피울음을 삼키는 희생자와 가족들을 보면서 평화를 회복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세월호 희생자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함께 울고, 위로하면서 평화를 회복해야 합니다. '공감'은 치유와 정화의 능력, 평화를 회복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위장된 평화를 선포하기 위해 사고의 진상을 덮거나 왜곡하려는 권력자들의 비열한 시도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를 이루는 자의 또 다른 사명은 세월호 사고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밤낮으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들의 수고에 동참해야 합니다.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 활동이 제대로 진행되도록 감시하고 압력을 가하는 한편,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도록 힘을 모으고, 세월호참사 국민대책위원회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명이 필요하다면 서명하고,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내고, 세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면 현장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위장된 평화를 몰아내고 참된 평화가 세워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를 원치 않는 악한 세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이루는 일은 결코 쉽지 않고 반드시 희생이 요구됩니다. 이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스스로 화목제가 되어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겨야 평화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또는 무엇인가의 대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위장된 평화를 깨부수고, 진정한 평화를 세우려는 평화의 사도들 역시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고 원인을 숨기느라 급급한 세력이 어느 순간 숨겼던 발톱을 세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진상 규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는 우리들은 언젠가 그들의 발톱 앞에 서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평화를 만드는 일에는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그 발톱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사고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여 다시 정의와 평화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의 씨앗을 던져 주셨습니다. 이제 그 씨앗으로 꽃을 피워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부르심받은 우리는 위장된 평화를 깨부수고 진정한 평화를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마 5:9)

김형원 / 하.나.의.교회 목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원장, <복음과상황>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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