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4일 한국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기독교 금식 기도원인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한 무리의 불교 승려와 보살님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짜고짜 대성전 안으로 진입해서는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40일 금식 중이던 한 목사님이 나서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게 웬 무례냐며 이들을 만류했다. 그러자 그 불교 승려는 부처님의 자비를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안타까워 불법을 전하는 것이라며 주위 기독교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 읊기를 멈추지 않았다.

굳이 기독교인들의 대표 군락지에 대담하게 침투해 불법(佛法)을 전하는 불교인들의 과감한 행동을 보고 듣던 그 현장에서 과연 부처님의 자비하심을 깨달아 감동에 젖어 들었을 기독교인들이 몇 명이나 됐을까? 물론 위 상황은 가상의 상황이다. 그러나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황만은 아닌 듯하다. 위의 가상의 상황과 똑같은 일이 2014년 7월 4일 인도의 불교 성지이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종교만 서로 뒤바뀐 채로. 그 상황은 다음 날 5일 동영상 사이트 YouTube에 '구원이 뭡니까?'라는 제목의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 올라왔다. 그 영상에는 한국인 남성 2명과 여성 1명이 사원 내부에서 기타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이들은 이들의 행동을 저지하는 한 한국인 스님에게 '하나님만이 오직 구원이다,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불쌍해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라며 대꾸했다고 한다.

영상 속의 기타 치며 두 손을 모으고 불교도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이 세 청년들의 모습 속에 드러나는 진정성은 참으로 숙연하기까지 하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 중 이들의 행동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의 갑론을박은 있을 수 있을지언정 어느 누구도 이들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신앙적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많은 목회자 내지는 성도들이 젊은 사람들이 장하고 용기 있는 일을 해냈다며 어깨를 토닥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순진무구한 세 청년들은 자신들이 세계적인 불교 성지에서 용맹하게 펼쳐 보인 종교적 진정성이 무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일그러진 초상으로 귀결되었음을 알고나 있을까? 과연 누가 이 세 청년들에게 이들의 순진한 신앙적 열정이 어리고 자라지 못한 연약함에서, 무지함에서 비롯되어 그들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을 종교적 우월주의를 지나 인격적 결례의 안타까운 지점에서 멈춰섰음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그저 지금은 이들이 귀국해서 각종 언론이나 온·오프라인상의 비난 여론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그 난처한 상황을 거룩한 순교자적 체험으로 착각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삼사 년 전 나도 역시 신앙적 열정에 불타오르던 열혈 기독 청년이었다. 밤이면 밤마다 뜻을 맞춘 형제 몇 명과 지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을 뿌리째 뽑아 불쏘시개로 쓰고 불교 사찰 주변의 불자들이 치성을 드리던 돌탑들을 때려 부수고 대웅전을 감싸고 있던 아름드리 전나무들 중 덜 자란 어린 전나무를 뿌리부터 베어다가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했다. 덕분에 지역 신문 사회면에 신원을 알 수 없는 문화재 훼손 용의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의 완벽한 실행 후 밀려 오는 우상타파의 선봉장이 되어 영적 전쟁에서 뜻 깊은 승리를 이룬 듯한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찬 감동으로 마무리되곤 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들이 종교적인 객기요 치기 어린 폭력이었을 뿐임을 깨달은 것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당시 주위의 어떤 목회자도 신앙의 선배들도 나의 행위가 자라지 못한 유아적 신앙의 옹알거림에서 비롯된 것임을 짚어 주지 않았다. 성숙한 신앙인의 온전한 복음 전달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태도로 어떤 방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준 사람도 없었다. 그저 전도는 영적 전쟁이었고 받든지 안 받든지 구원을 담은 찌라시를 뿌려대는 것이었고 듣든지 안 듣든지 욕을 하든지 말든지 군중이 밀집된 곳에서 목이 터져라 찬양을 하며 구원을 외치는 열심이었다. 그 전도란 것은 엄밀히 말해 전하는 자와 전달 받는 자 상호 간의 인격적 교감이 배제된 우리의 열심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우리들만의 외침이었다.

지난 2009년 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 축복기도를 새들백교회의 담임목사인 릭 워렌 목사가 맡았다. 그의 기도는 이렇게 끝맺음되었다. "나의 삶을 바꾸게 한 예슈아와 이사(Isa), 헤수스, 그리고 지저스의 이름으로 아멘." 마지막에 언급된 이름은 모두 같은 사람으로 예수를 뜻한다. 예슈아는 히브리어이고 이사는 아랍어이며 헤수스는 스페인어다. 지저스는 물론 영어겠다. 각기 다른 언어로 예수를 발음했을 뿐이다.

논란은 '이사(Isa)'에서 불거졌다. 9.11 테러의 배후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기도 전 미국 내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하던 시기에 대통령의 취임식 날 버젓이 거룩한 이름 예수를 이슬람의 언어로 거론했으니 난리가 난 것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이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뒤를 잇는 기독교 지도자로 주목받던 릭 워렌 목사의 이 돌발 행동으로 일부 복음주의자들과 기독교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그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우거나 또는 '크리슬람(Chrislam)'이란 신조어로 릭 워렌이 이슬람과 손잡고 변절했다며 근본주의적 음모론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릭 워렌 목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얼마 후 미국 이슬람 전국 총회에서 축사를 전달했다. 릭 워렌 목사는 누가 뭐라던 간에 그렇게 당당하게 이방인이 아닌 이웃 종교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손 내밀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만들어 가는 불통의 일방적 전도 방식만이 오직 한 길이요 진리인 상황에서 위와 같은 릭 워렌 목사의 행동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털끝만큼도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인터넷상에서 활성화되어 있는 릭 워렌, 크리슬람(Chrislam)에 대한 음모론은 한국의 성도들에 의해 가장 활발하게 소비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존중이 변절로 읽히고 소통이 배교로 인식되며 화합의 제스추어가 종교 혼합주의의 불순한 의도로 여겨지는 현실에서 전도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이방 족속들을 몰아내며 약속의 땅을 차지해 가던 정복적 개념으로 왜곡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 땅의 전도자들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애달픔을 품고 전도 현장으로 나간다. 이십삼사 년 전의 내가 그랬듯이, 그러나 전도의 개념이 삐뚤어져 있으니 피전도자를 향한 접근 방식도 삐뚤어지고 피전도자의 반응도 삐뚤어질 수 밖에 없다. 전도자의 복음의 열정이 정복자의 오만함으로 비춰지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삶의 영역으로 접근해 간다는 것은 상당히 깊은 이해가 요구되어진다. 나아가 한 인격이 다른 인격과 만나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삶에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더더우기 신중함을 요하는 일이다. 하다못해 옷을 입는 취향이나 음식을 먹는 취향이 바뀌거나 공유되기 위해서도 서로 간의 긴밀함과 친밀함이 전제된 관계 속에서 상호 다른 가치관의 불규칙적인 충돌과 화해와 회복의 과정이 필요할진데 하물며 한사람의 현재와 내세를 지탱하는 종교적 가치관을 흔들며 영향을 주고 받는 상황이란 참으로 매우 무겁고 조심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떠나 한 사람이 삶을 살아오며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했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의 흐름 속 가치관, 세계관, 종교관, 이념 다양한 영역별 취향, 성향, 습관 등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존중과 인정 없는 접근에서 비롯된 가치관 내지는 종교관의 전환 요구는 자칫 인격적 소통의 과정이 결여된 폭력이 될 수 있다. 복음의 가치가 희석되지 않고 전달자의 본의가 오해되지 않는 제대로 된 복음의 전달은 바로 이 전제 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가 보여 주는 방식의 전도는 인격적 소통과 상호 존중이 배제된 상태의 전도이다. 한 개인, 한 지역, 나아가 한 민족이 수십 년 내지는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쌓아 온 역사적 유산을 기독교적 기치(旗幟) 아래 송두리째 무시한 채 중세 십자군이 이슬람 영향 아래의 예루살렘을 점령하듯 전도란 미명하에 막무가내로 짓밟는 것은 폭력 그 자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 언제까지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전달하는 고결하고도 아름다운 사역을 전쟁이란 이름으로 수행할 것인가. 언제까지 구약시대에나 통하던 시대착오적 호전성(好戰性)으로 복음이란 아름답고도 복된 소식의 가치를 훼손할 것인가. 

2000년 전 예수께서 이미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서로 간 분리되고 분열됐던 가운데서 화평이 되셔서 개인, 지역민, 민족 간의 각기 다른 가치관, 세계관, 종교관 사이의 막힌 담을 모두 허물어 버리시고 십자가로 모든 반목과 갈등을 꺽고 화목케 하셨다(엡 2:14-18) 전도는 예수께서 소외된 자들에게, 죄지어 돌 맞을 자들에게, 하나님께 등 돌린 이방인들에게, 우리 인생 하나 하나에게 신실하게 보이셨던 존중과 배려를 품고 예수께서 허무신 담을 넘어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그들의 삶을 깊이 이해하며 조심스럽게 손 내미는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게 행한다(고전13:4-5). 전도는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며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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