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추앙하는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총 3부로 기획했습니다. 1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떠받드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2부는 '건국대통령 이승만' 영화 제작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전광훈 목사(사랑제일교회)와의 인터뷰를 다룹니다. 3부는 이승만 대통령이 과연 한국교회가 추앙할 만한 인물인지 살펴봅니다. -편집자 주
▲ 목회자들이 주축이 된 이승만 영화화 작업이 한창이다. 지난 2월에는 영화 제작 추진위원회가, 6월 27일에는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날 전광훈 목사가 대표회장으로 추대됐다. 이들은 영화 제작 취지문에서 "종북좌파들의 국가 부정 난동으로 위험한 경지까지 왔다"며, "대한민국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게 함으로 거짓 선동으로 잘못되어진 건국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공식 블로그 갈무리)

최근 교계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특히 목회자들이 주축이 된 이승만 영화 작업이 한창인데, 지난 2월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더니 6월 27일에는 창립총회가 열렸다. 영화 제작을 총괄하는 전광훈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대한 신앙인이자 민족의 최고 지도자로 추어올렸다. 올해 교계의 주요 행사에서도 보수 개신교 인사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우고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고 찬양했다. ([기획1] 교계에 부는 '이승만' 바람)

이들의 주장이 틀린 사실은 아니지만, 한국교회가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를 덮고 무조건 추앙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력과 개신교의 유착, 한반도 분단과 반공·냉전 체제 확립, 장기 집권과 부정선거 등 이승만 정권이 현대사에 남긴 역사적 오점을 기억한다면, 이 대통령과 그 당시 한국교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교 유착으로 왜곡된 기독교 국가 비전

▲ 이승만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으로 기독교 국가로 세우려고 했다.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 대통령과 한국교회는 해방 정국에서 대한민국 건설에 주역이 됐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공식 페이스북 갈무리)

이승만 대통령이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우려고 한 것은 분명하다.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2009년 발표한 논문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과 국가 건설론>에서 "(이승만이) 천부적 인권 사상과 그리스도의 이타적 자기희생을 토대로,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구현된 기독교 국가를 꿈꾸었다"고 밝혔다. 정부 수립 이후 국가 공식 행사에 기독교적 의식을 행한 것도 이런 신앙적 바탕에서 비롯됐다.

해방 정국에서도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기독교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척결해야 할 악마적 대상이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더불어 민족 지도자로 꼽혔던 김구와 김규식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국가 비전을 제시했지만,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민족 통일을 우선시한 이들보다 반공주의 이념을 내세워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대한민국 건설의 주역이 됐고, 다수의 기독교인은 국회와 정부의 고위 관료로 진출했다. 1948년 5월 출범한 제헌국회는 전체 208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개신교인이 44명이나 됐다. 전체 인구에서 개신교가 차지하는 비율이 2%에도 못 미쳤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였다. 김흥수 교수(목원대)는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정부나 국회, 나라 전체에서 뚜렷이 감지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기독교로의 대규모 개종과 한국 사회의 급격한 기독교적 변용에서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건국 비전이 실현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기독교 국가 이상은 정치권력과 개신교의 긴밀한 유착 관계로 변질했다.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 개신교 세력을 선거에 이용했고, 개신교는 선교 활동과 각종 이권에서 국가의 도움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은 해방 이후 미 군정이 도입한 성탄절 공휴일 제도, 형목 제도, 국영방송을 통한 선교 활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신교에 특혜를 줬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절하는 방식에서 지금의 주목례로 바꾼 것도 개신교의 요청 때문이었다. 1951년 2월 도입한 군종 제도는 기독교가 타 종교보다 월등한 영향력을 갖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경제적인 특권도 대단했는데, 개신교는 일제가 남긴 재산의 많은 부분을 정부로부터 취득했다. 강인철 교수(한신대)는 <종속과 자율>(한신대 출판부)에서 "일본 신사와 조합교회의 재산은 대부분 기독교에 불하되었다. 영락교회, 경동교회, 남산의 기독교 박물관과 장로회신학교 등이 모두 그런 식으로 설립되었다"며, 이 과정에서 합법적인 소유권을 무시하고 편법으로 재산권을 강탈하는 방식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이득을 본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은총인 동시에 기독교의 승리, 사교에 대한 역사적인 심판"이라고 정당화했다.

이승만 정권과 상호 협력하며 한국 개신교는 1950년대 주류 종교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10∼15만 명으로 추산된 기독교 인구는 1950년대 50만 명,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면서 불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교세를 자랑하는 거대 종교로 성장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승만 정부의 개신교 편향의 종교 정책은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한 실정으로 평가된다.

특권 누린 한국교회, 이승만 독재에는 침묵

정부와 긴밀한 유착 관계를 맺은 한국교회는 정치권력의 집사 노릇을 하며 많은 영예를 누렸다. 이승만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민주주의 절차를 심각하게 훼손할 때도 한국교회는 이승만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하는 성명을 쏟아 냈다. 이는 개표 조작 등 유례없는 부정선거가 자행된 1960년까지 계속됐는데, 그해 2월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주최한 '교계 지도자 초청 모임'에 개신교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는가 하면, 이승만과 이기붕은 "전국 교회 150만 신도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성명을 통해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장기 집권과 부정선거에 맞섰던 국민들의 4·19혁명으로 하루아침에 막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한국교회는 국민들의 반발을 샀는데, 당시 화가 난 국민들은 기독교회관 앞에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열었고, 기독교에 대한 항의 표시로 1960년 5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4·19 합동 위령제를 불교식으로 지냈다.

견고하던 이승만 정권이 민주화 운동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모습은 당시 개신교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앞서 언급한 <종속과 자율>에서 강인철 교수는 한국교회가 이승만 정권의 몰락에 이렇게 자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 아랫놈들이 나쁘지, 그 어른이야 어디 그럴 리 있나? 아랫놈들이 다 숨겨서 모르셨거든."

이승만 대통령의 신앙과 치적은 기리면서 그의 잘못에는 눈을 감는 행태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광훈 목사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끝까지 지켰으나, 참모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새벽에 급히 한강을 건넜다"고 옹호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27일 오전 10시 대전에 도착해 장거리 전화로 "의정부를 탈환했다. 모든 것이 잘돼 가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내용을 녹음했고, 중앙방송(KBS)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 이 방송을 내보냈다. 서울을 버린 다음 날인 28일에는 수많은 피난민이 건너고 있던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시대 상황 고려 긍정적 평가 목소리도 있지만

장기 집권과 부정선거로 퇴장했지만,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양분된 세계정세 속에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는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30호에서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제 청산과 민족 통일이 아니었다고 언급한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느낀 감정은 해방의 희열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앞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였다. … 이승만과 기독교는 이렇게 남한이 자유민주주의를 택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박 교수는 한국교회가 해방 이후 국가의 주류 종교가 된 것도 단지 이승만 정부와의 유착 관계 때문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기독교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가장 잘 수호할 역량이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싸우고, 전후 복구 사업의 주역을 담당했다고 강조했다.

4·19혁명을 촉발했던 학생운동 역시 역설적으로 교육에 역점을 둔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앞서 언급한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에서 박명림 교수(연세대)는 "이승만은 4·19를 유발한 부정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4·19를 촉진한 긍정적 존재이기도 하다. 4·19는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와 실패 때문에도 왔지만, 그의 정부의 교육 정책의 성공 때문에도 왔던 것이다"고 분석했다.

▲ 영화 '건국 대통령 이승만' 제작 추진위원회는 지난 5월 12일부터 10억 원을 목표로 기금을 모으고 있다. 현재까지 후원자 5명에 13만 원이 모였다. 영화 후원 현황은 지난 7월 5일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루리웹에 올라오기도 했지만, 글을 읽은 누리꾼의 반응은 냉랭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후원 홈페이지 갈무리)

여러 가지 상반된 평가에도 이승만 대통령을 바라보는 일반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일례로 지난 7월 5일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인 루리웹에 올라온 <건국 대통령 이승만> 영화 후원 광고 글은 조회 수가 5700건을 넘어섰지만, 게시 글을 추천한 사람은 고작 10명에 불과하다. 60개가 넘는 댓글에는 "누구 맘대로 건국 대통령이래",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라고 쓰고 친일파라고 읽는다)의 현실", "미쳤다 진짜, 이게 진짜 집단 최면으로 만드는 영화겠지" 등 비판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승만영화추진위원회는 10억 원을 목표액으로 내걸었지만, 현재까지 후원자 5명, 달성액 13만 원에 그치고 있다.

배덕만 교수(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는 이승만 정권이 왕조 정치를 끝내고 민주주의 형태의 국가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면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그 시절 한국교회는 추앙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라고 봤다. 우익 개신교인들이 정치·사회적으로 엄청난 혜택을 누린 황금기를 향수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적들을 처단하고, 독재에 항거하던 민중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던 것 등 많은 부정이 있었던 것을 결코 잊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이승만 정권 시절 사회를 향해 가져야 할 건전한 비판의 자리를 상실했던 점을 뼈아프게 자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칩니다]

<뉴스앤조이>는 전체 인구에서 개신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5%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였다고 다섯 번째 문단에 썼습니다. 1949년 통계청 인구 조사 자료를 다시 확인한 결과, 당시 남한의 개신교 인구 비율은 2%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수정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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