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우연(偶然)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 가운데 있다고 믿는 것이 신앙적인 관점이다(마 10:29, 눅 12:6). 이 세상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섭리하신다는 관점은 이 세상적 관점에 비하여 아주 뛰어난 관점이 아닐 수 없고,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관점이다. 만일 이 세상이 아무런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이 그저 우연의 결과로만 빚어진다면 과연 우리가 미래에 대하여 무슨 소망을 가질 것인가?

일단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세심하게 섭리하며 통치하신다고 할 때, 고통(苦痛)의 문제와 악(惡)의 문제는 대답하기 어려운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에 고통과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것은 인류가 쉽게 대답하지 못해 온 숙제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최종적인 결재권자가 하나님이었다고 말하면, 그 하나님은 더 이상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반면에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면, 그런 하나님이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과연 궁극적으로 선이 악을 이긴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대답을 모두 내놓는다.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악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으며 악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답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악도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컨트롤하지 못한 상태에서 할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한쪽 측면이다.

그런 점에서 욥에게 일어났던 고통도 하나님의 허용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고, 이집트 왕 바로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과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동시에 말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도 아니었다고 말이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결과적으로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한 부분이었지만, 결코 가룟 유다는 영웅이 될 수 없으며 그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가룟 유다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영웅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탄이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도둑을 맞게 된다면 방범에 대한 경각심이 생겨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더 큰 도둑이 들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 큰 재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된다면, 원래의 도둑에게 방범에 대한 공로로 상을 주어야 하겠는가? 일제 36년의 통치의 결과로 어느 정도의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우리나라가 개방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서, 일제의 식민 통치가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제 36년 동안의 비인간적이고 악랄한 통치가 그 기간 안에 우리나라의 진보된 모습이 있다 하여(그것도 인과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일제 식민 통치가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부부 싸움을 하고 갈등이 있는 가정에 강도가 들어오는 바람에, 부부가 다시 사랑을 회복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고 하여서 그 강도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아쉽게도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해 버리는 죄를 짓곤 한다. 이런 죄는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이며 너무나도 심각한 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의 유익을 위해 악용하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은 그 동안 시무하던 교회를 떠나 더 큰 교회로 부임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시키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 자주 보아왔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기 때문에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허용하심이 없이 발생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완전히 잘못된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함부로 단언할 수 없다. 때로는 그러한 움직임이 악하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부로 우리의 욕심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포장하면 안 된다.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가 아닌 것이 없다. 과거의 고통도 슬픔도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은혜로 귀결될 수밖에 없고(롬 8:28),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우리들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가운데 만나는 모든 슬픔들도 결국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 속에서 아름답게 꽃으로 피어나는 것들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모든 악들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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