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신학 vs. 창조과학> / 윤철민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펴냄 / 246쪽 / 1만 3000원

종교개혁 이후로, 특별히 미국 근본주의 논쟁 이후로, 미국을 포함하여 한국의 보수적 개신교의 특징은 성경의 무오성, 특별히 문자적 이해(literal understanding)와 역사성(historicity)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본주의 논쟁이 시작될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 자주 대두되는 해석학적 문제는 특정한 본문의 의미에 대한 논의보다는 논의하는 사람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전제를 수용하느냐의 여부로 그의 해석의 정당성을 미리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는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사실 한국(보수) 개혁주의 신학이 근본주의적 태도를 거부하느냐 수용하느냐에 따라 개방적이냐 폐쇄적이냐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이슈로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소개하려는 책은 '창조과학'이라는 근본주의의 중요한 요소에 대한 개혁주의의 재조명이라는 점에서 한국 보수 개신교(혹은 개혁주의) 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기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한국의 보수적 장로교 가운데 하나인 고신 측 출신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창조과학의 세 가지 기둥들(타락 이전에는 죽음이 없었다, 노아 홍수 이전의 족보를 계산하면 세상 창조의 시기를 알 수 있다, 한자에 창조와 노아 홍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을 주도면밀하게 검증하여 창조과학과 개혁주의의 무관함을 주장한다.

저자는 1장('창조과학의 성경 해석 이해하기')에서 창조과학의 기원이 창세기 본문에 대한 특정한 해석의 입장이나 교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먼저 제시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진화론의 도전에 따른 창조과학의 태동에는 성경에 묘사된 초기 역사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대한 고집과, 또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다루고 있는 근본주의 논쟁과 (미국 루터교 미주리 총회를 포함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가 그 배후에 있다. 게다가 이들은 그들 나름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권위와 무오성을 더하고 있으나,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그것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견해인 것이다.

첫 번째 이슈: 타락 이전에는 죽음이 없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식물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계에 죽음이 없었다는 의미다. 창조과학은 생명체에 식물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동물이 오로지 채식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죽음이 세상에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또한 노아 홍수가 약육강식의 흔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것이 인간 타락의 증거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인간 세포 자체와 인간의 몸속에 살고 있는 세균과 바이러스 등의 생로병사를 경험한다. 회복될 예언서의 말씀들(사 11:6~8, 65:25)이 과연 태초에 죽음(육식)이 없었음을 증명하는가? 그러나 흥미롭게도 종교개혁자들을 포함한 개혁파 신학자들은 타락 이전에 죽음(육식)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규례를 어긴 사람에게 죽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 이유에 죽지 않음이 전제되어 있던 것은 아닌 것이다. 채식을 하라는 말이 육식을 금하라는 의미는 아닌 것이며, 저자는 몇 가지 성경 구절(시편 104편, 창 9장, 딤전 4:3~5)을 근거로 육식도 창조 원리였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창조와 타락에 따른 육식의 차이는 허락과 금지가 아니라, 잔혹한 '피 흘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98쪽). 심지어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을 전조하는 예수의 부활의 첫 식사는 구운 생선이었다. 풀, 채소, 그리고 나무의 과일이라는 저자의 창세기 1장의 식물(植物)에 대한 논증은 독자들이 직접 살펴보라. 침묵과 허용에 대한 해석은 미묘하긴 하지만, 태초의 '식탁'에 대한 커다란 차이를 초래한다.

두 번째 이슈: 노아 홍수 이전의 족보를 계산하면 세상 창조의 시기를 알 수 있다?

저자는 창세기 앞부분의 족보들은 지구 역사를 연구하는 데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족보를 따르다 보면, 지구의 나이는 6000년~1만 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족보의 기능과 의미를 오해한 결과다. 그렇다, 창세기의 족보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째로, 아버지->장남이 아니라, 아버지-상속자 관계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 아버지는 할아버지일수도 심지어 직계 조상을 의미할 수도 있다. 둘째로 족보의 나이를 합하면, 노아 홍수 이후에도 조상들이 죽지 아니하고 살아 있게 된다. 셋째로 족보 자체의 등장인물의 선별성이다. 특정한 대수(代數)를 맞추기 위해서 실제 족보의 수가 줄어드는 경우가 발견된다. 고로 창세기의 족보는 지구의 역사를 말해 주지 않는다.

세 번째 이슈: 한자에 나타난 창조와 노아 홍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요즘 창조과학과 관련하여 중국 문화권의 고대 한자에 담겨져 있는 창조와 노아 홍수에 대한 암호 해독이 큰 붐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고대 한자를 방주학적 견지에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배 선(船)자가 방주(舟)에 탄 노아의 8가족(八食口)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바른 해석인가? 아전인수인가, 창세기의 비밀이 담겨진 진리의 메시지인가? 한자의 기원은 전문가의 견해를 듣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한자가 비롯된 갑골문자에서 지금의 한자가 원래 의미했던 바를 찾아내는 것이 우선 과제일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 우리가 자주 들어왔던 그 비밀이 사실은 비밀이 아니라, 견강부회(牽强附會)의 해석학의 한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결론

비록 많은 유익한 주장과 논증을 제외하고, 본서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주장 가운데 비판적으로 다루어 볼 부분을 언급하는 것으로 본 서평의 결론을 내려 본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저자가 택한 건전한 해석도 여전히 논쟁 중이라는 점이다. 첫째로, 저자는 많은 부분에서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지나치다는 점을 논증하고 있지만, 그러한 해석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공해 주지 않는 것 같다.

둘째로, 저자는 노아의 대홍수가 유일무이한 대격변이라는 점에 대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지만, 그것이 '전 지구적인' 대격변이라는 점을 고수한다. 사실 그것이 지역적 격변이었는지, 혹은 전 지구적 격변이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진행 중이다. 셋째로 아담의 행위 언약의 경우에도 소위 개혁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지속적이다. 넷째로 저자가 선호하는 지적 설계론도 불행하게도 기독교가 선호하는 삼위일체론적 유일신론의 온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것은 고등한 지적인 신적 존재(들?)를 증거할 수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서평자로서 주제 넘는 요구인 것 같지만, 결국 이러한 논의는 아담의 역사성을 포함한 창조 이야기의 의도나 해석 원리에 대한 논의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점에서 이 부분에 대한 후속적인 논의도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