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 과정에서 벌금형을 받은 시민운동가들이 "부당한 벌금에 평화롭게 저항한다"며 벌금형을 거부하고 자진 노역을 결의했습니다. '강정, 부당한 벌금에 맞서는 사람들의 모임'은 5월 20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뒤 서울구치소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26일까지 노역을 살 예정입니다.

오늘 구치소로 들어간 3명의 시민운동가 가운데엔 섬돌향린교회 담임 임보라 목사가 있습니다. 임보라 목사는 기자회견에서 감옥에 스스로 들어간 소회를 발표하였습니다. 아래 그 전문을 싣습니다.

바로 가기 : 강정마을 운동가들, 벌금형 거부…자진노역 택하기로 <연합뉴스> 
임보라 목사님 구치소 노역 입감 (향린교회 홈페이지)

사랑은 무죄가 아니었나요?

임보라(섬돌향린교회 목사)

세월호 참사로 흘러넘치는 눈물이 온 땅에 가득한 2014년 5월. 학생운동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민망하기 그지없지만 1987년을 지나 2014년 봄을 지나는 지금, 나는 난생 처음으로 '수배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지금 곧 달려가고 싶은 강정마을과 구럼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죄라면 죄일까? '사랑은 무죄'라는 노래처럼 '이 기분 이 느낌대로 가슴이 차오르는 이대로, 들끓는 나의 마음을 너에게 주고 싶었던' 마음을 갖게 된 것이 무죄가 아니고 유죄인 오늘을 살고 있다.

평화의 섬 제주에 해군기지 건설의 문제점을 제대로 보려면 오키나와를 봐야 한다고 하여, 2006년 늦가을 오키나와에 갔었다. 제주와 흡사한 자연환경과 한(恨) 서린 역사, 그리고 헤노코에 미 해군기지 건설 저지 운동의 지난한 과정을 보고 들으며 평화란 무엇인지, 왜 군사기지가 문제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뼈저리게 깨달았고, 깨달은 만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여행이 아닌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수년 동안 외쳐 온 강정의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마을에 들어간 것은 2011년 여름이 되어서였다. 당시 처음으로 구럼비에 걸터앉아 밥을 먹고, 양말을 벗어던진 채 맨발로 다니면서, '손으로 만지면 따스한 기운이 온몸을 타고 올라와 가슴이 뛰었지. 첫사랑이 다시 시작되듯 설렘을 남겨 주었지. 맨발로 서면 마치 구름을 타고 있는 듯 포근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고 올라와 가슴이 흔들렸지. 그리운 님 품에 다시 안기듯 애타는 맘을 남겨 주었지'라는 노랫말을 만들었을 정도로 첫 만남부터 나는 구럼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2012년 3월 4일 첫 발파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나는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들은 그 즉시 김포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잡아타고 강정마을로 들어가기도 했다는데 나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저 엉엉 울고만 있었다. 2012년, 그 해는 나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 해이다. 발파 이후 구럼비로 향하는 모든 길을 완전히 차단당하자 성직자들을 포함한 몇몇 분들은 펜스를 뚫고 구럼비로 진입을 했다. 그 결과 목사님과 신부님이 구속 수감을 당했는데,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선후배 목회자들과 함께 그때 그 장소로 가서 되지도 않는 톱질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펜스에 돌을 던지고 돌에 맞아 깨진 구멍으로 공사장에 진입했다가 연행되고, 강정포구에서 열린 행사 도중에 경찰이 임의대로 표시해 놓은 경찰 저지선을 넘어가 다시 연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주요 절기인 사순절(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며 실천하는 40일간의 절기)부터 시작된 개신교 기도회가 용역 깡패들의 폭력적인 방해로 인해 중단이 될 때는 항의 표시로 대기하고 있던 레미콘 앞에 주저앉았다가 연행되기도 했다. 그날은 초등학생이었던 딸도 함께 있었는데 갑작스레 연행된 엄마로 인해 가뜩이나 용역 깡패들의 만행에 놀라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던 딸애는 오롯이 혼자 황당한 상황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저런 연유로 서울에서 제주지법까지 수도 없이 오고 가면서, 아마 모르긴 해도 그간 선고받은 벌금형을 내고도 넘쳤을 만큼의 교통비를 하늘에 뿌려야 했다. 서울로도 옮겨 주질 않으니 열심히 제주지법을 드나들었고, 검찰의 기소 이유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날밤을 새워 가면서 증거자료를 모아 소위 '법정투쟁'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기도 했으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안 사안이라며 무죄는커녕, 벌금형과 집행유예라는 무거운 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라면 문제랄까? 강정을 향한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르고 사랑앓이는 계속되고 있다.

2014년 5월인 지금. 혹자는 이미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기정사실이며 이에 저항하는 모든 투쟁은 끝났다고 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이는 사실이 아니며 여전히 강정마을 주민들과 강정으로 빈 몸으로 들어와 이제는 강정 주민들이 된 지킴이들을 비롯하여 꾸준한 발걸음으로 함께하고 있는 이들은 오전 7시면 생명 평화 백배로 아침을 연다. 이어 오전 11시면 어김없이 가톨릭 미사가 집전되고, 미사 후에는 인간 띠잇기와 일명 강정 마약 댄스 반주에 맞춰 내리 4곡을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추며 저항하고 있다. 기지 사업단 앞에서 경찰의 고착과 해제를 반복적으로 받아 내는 저항의 몸짓도 계속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강정은 그런 곳이다.

제아무리 펜스 안 땅 위로는 건물들이 들어서고, 케이슨이 만들어져 강정 바다 안으로 투하되고 훼손된 오탁 방수막이 이리저리 떠밀려 다녀도 이제 다 끝난 일이라며 뒤돌아 설 수 없게 만드는 그런 곳 말이다. 오랜 역사와 함께 '안 강정에 파도소리 울리고 마을 사람 어울리며 산 땅'에는 폭포와 암벽, 은어, 그리고 깨끗한 물, 이 네 가지를 담고 있는 신비스런 냇길이 소가 있고, 한여름이면 얼얼한 찬 기운을 찾아 뛰어들게 되는 강정천의 물소리가 들리고, '범섬이 노래하면 써근섬도 따라 부르는' 그리하여 일강정이라고 불리는, 강정은 그런 곳이다. 그러나 텅텅텅 온갖 소음을 내며 진행되고 있는 공사 과정에는 그곳을 지켜 온 원주민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지 않다.

중국의 위협에 대비하여 국가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하지만, 원주민들은 안보를 헤치는 공안 사범들이 된 지 오래고, 강정과 깊은 사랑에 빠져 '강정앓이'가 된 이들까지 합쳐 그간 연행된 숫자만 해도 650명이 넘고, 벌금은 3억 원에 달한다. 누가 보아도 과도한 형 집행이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거듭되는 구속 수감 생활에도 맑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면회자들에게 도리어 깊숙이 허리 굽혀 인사하시던 양윤모 선생님은 무려 4번이나 수감된 끝에 얼마 전에서야 겨우 1년 6개월의 형을 마쳤다.

과도한 형 집행은 용산 참사나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 현장을 통해서도 여러 번 지적된 바 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장애인 차별 철폐 운동에 헌신하고 계신 박경석 선생님이 5일간의 노역형을 감수하심으로 장애인 동지들에게 부과된 1500여만 원의 부당한 벌금형을 고발해 주신 바 있다.

오는 5월 20일로 예정하고 있는 부당한 벌금형을 노역형 선언으로 고발하고자 하는 분들은 나 외에도 일명 강정 전기톱 체포 사건으로 불리는, 2012년 4월 16일 PVC 파이프로 서로를 연결하여 공사 저지를 하다가 연행되었던 분들도 함께하게 된다. 당시 나는 4월 14일 연행되어 2박 3일을 동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고 나온 날이었던지라 그 현장도 목격하였다. 모터 소리 요란한 전기톱으로, 지킴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던 PVC 파이프를 모터 소리 요란한 전기톱으로 자르려고 시도하여 현장 주변에는 울부짖음과 비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성과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있을 수 없는 경찰의 진압, 과도한 형 집행을 남발하는 검찰과 사법부, 거기에 더해 세월호 사건으로 베일이 벗겨지고 있는 해경과 해군의 민낯은 이미 강정마을에서도 여러 번 만났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올해 초 대법원에서 업무방해죄로 확정된 벌금형 200만 원을 납부하지 않아 수배자가 되었다. 불법적인 채증 자료를 통해 매일 이어지고 있는 기지 사업단 정문 앞은 앉아 있기만 해도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 채증을 당한 2012년 9월 7일은 케이슨 점거 농성이 있었던 바로 다음 날이었다. 9월 6일 새벽 케이슨 작업장에 올랐던 5명 중 2명은 경찰과 시공 업체에 의해 안전장치 하나 없이 크레인으로 끌어 내려졌다. 이들의 연행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날, 주민들과 지킴이들은 연행 차량을 쫓아가다 길바닥에 널브러지듯 엎어지면서 제지하는 경찰들과 함께 뒹굴어야 했다.

안타까움에 온몸이 절여진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생명 평화 백배를 하고 기지사업단 앞에 앉아 있다가 경찰들에게 들려나가 고착(일명 인간 감옥) 상태로 갇혀 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하는 그저 그런 일상의 아침이었다. 그러나 벌금형 200만 원으로는 어림없다는 듯이 1심 판결에 불복한 담당 검사는 항소장에서 신앙의 양심과 소명 의식, 그리고 이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의 표시인 비폭력 불복종 행동을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음, 종교의 자유와 평화인지 의심, 자아 성찰 없음' 등의 표현으로 짓밟아 뭉개면서 모욕을 주기도 했다. 9분 동안 앉아 있었던 죗값(!)이 무려 200만 원 어치에 해당하고 그렇게도 죄질이 무거운 중죄인 것인가!

벌금 200만 원은 노역형으로 환산하면 40일에 해당한다. 누구는 일당 5억 원짜리 노역형을 살았지만, 우리는 그 만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일당 5만 원짜리 노역형이라도 살지 않으면 부당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중학생인 두 딸의 뒷바라지와 시작한 지 이제 1년 4개월을 조금 넘는 작은 교회의 목회 일도, 세월호 참사로 눈물을 뿌리며 들던 거리의 촛불도 잠시 접어둔 채 일상을 멈추고자 한다. 별스러운 시간이 아닌 것 같아도 나에게는 금쪽과 같은 시간들이다. 하지만 먼 훗날일지언정 공안 사건으로 취급되어 온 제주 해군기지 건설 저지 운동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이 사법부의 상징인 '저울의 추'가 어디로 치우쳐져 있는 판결이었는지 밝혀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외친다. "구럼비와 강정마을에 대한 사랑은 무죄다!" 라고.

"권력을 행사하는 한 명의 인간이 있는 곳에는, 그 권력에 저항하는 한 사람이 있다." (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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