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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선 '평범한' 엄마, '평범한' 그리스도인

[인터뷰] 오지숙 씨, "세월호 진실 낱낱이 밝히는 게 진짜 위로"

햇볕이 따갑다. 5월 중순, 서울 광화문은 따뜻하다기보다는 더웠다. 늘 그렇듯 광화문 광장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가끔씩 분수가 올라와 더위를 식혔다.

활기찬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모습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거리로 나온 '엄마들'이었다. 이날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세 명의 엄마들이 낮 시간 동안 1인 시위를 했다. 유가족은 아니었다. 서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다. 각자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주변에는 경찰 몇몇이 서성이고 있었다.

   
▲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가면 '엄마'들을 만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내 자식같이 생각하며,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5월 16일에는 세 명의 엄마들이 각각 시위를 하고 있었다. 사진 맨 왼쪽이 오지숙 씨. ⓒ뉴스앤조이 구권효

그중 오지숙 씨(39)는 4월 28일부터 지금까지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1인 시위를 했다. 그는 "아이들이 끝까지 애타게 불렀을 이름, '엄마'. 이제 우리가 답할 때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바닥에는 "사고 31일째 실종자 20명", "내 가족 우리 아이", "은폐 엄단, 진실 규명"이라고 쓰인 피켓을 깔았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까를 고민하던 오지숙 씨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 안산에 있는 희생자들의 빈소를 찾았다. 그곳에서 이름도 모르는 희생자의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 그는 1인 시위를 시작하게 됐다. 어머니의 두 손을 잡고 "이번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안 되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피켓이라도 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왜 힘들지 않았겠나. 시위를 하러 나간 첫날과 둘째 날은 연일 비가 왔다. 바람이 너무 거센 날도 있었다. 그는 우산을 쓰고 우비를 입고 버텼다. 어떤 노인들은 "싸가지 없다", "노란 리본 치워라"며 위협했다. "시선 끌려고 치마 입고 하느냐"는 말까지 들었다. 그래도 오지숙 씨는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켰다. 5월 16일, 한참 피켓을 들고 있는 그를 만나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오지숙 씨는 혼자 흘리던 눈물을 그치고 어떻게 아픔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울지 고민했다. 한 번도 시위 같은 것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하나님께 매일 거리로 나갈 힘을 구하며 집을 나선다. 4월 28일부터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1인 시위를 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 언제부터 1인 시위를 했나.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4월 28일부터 시작했으니 3주째다. 평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3시까지 해 왔다. 이 사건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나왔다.

페이스북으로 한 유가족을 알게 됐다. 그분이 딸아이 장례를 치른다길래 4월 25일 장례식장에 찾아갔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 옆에도 단원고 학생의 빈소가 있었다. 아이 어머니 혼자 계신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전혀 모르는 아이였지만 조문을 했다. 영정 사진에 있는 앳된 모습을 보니 우리 아들을 보는 것 같아서 아이 어머니와 같이 한참을 울었다.

한 시간가량 어머니와 얘기하고 일어나는데, 어머니가 "안타깝지만 어쩌겠어요. 또 그렇게 잊혀지겠죠. 항상 그래 왔잖아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너무 가슴이 아파서 어머니의 두 손을 붙잡고 말했다. "어머니, 이번에는 정말이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뭐라도 하겠습니다. 안 되면 광화문 네거리에 가서 피켓이라도 들고 있겠습니다." 다음 날이 토요일이었다. 바로 피켓을 만들었다.

(오지숙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1인 시위를 하면서 겪는 일과 느끼는 점을 올린다. 그는 5월 15일 시민 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광화문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자신이 시위를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자세하게 발언한 바 있다. 발언 내용은, '내가 1인 시위를 하게 된 동기와 계속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그의 페이스북에 게재돼 있다.)

-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당시 감정이 복받쳐서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의무 방어식으로 한 번 하고 말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이런 용기는 어디서 나왔나.

그 어머니와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어머니가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해서 알려 줬는데, 얼마 전에 아이 장례 잘 치렀고 고마웠다고 연락이 왔다. 지금은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서명을 받고 계시다고 한다. 나도 그 후로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어머니가 자신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며 힘을 얻는다고 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친언니 같은 생각이 든다.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은 것이다. 만약 내 조카가 이번 일로 희생됐다면, 1인 시위든 뭐든 못 하겠나.

(10m 거리에서 경찰 몇몇이 인터뷰하는 이쪽을 흘끗흘끗 쳐다본다. 경찰들이 무섭지는 않느냐고 물었더니, 오지숙 씨는 "자기가 경찰이라서 얘기는 못 하겠지만 저분들도 대한민국 아버지인데요, 뭐"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경찰들도 자신을 경계했는데, 3주 동안 매일 나오니 이해하는 것 같다고 했다.)

시위를 시작할 무렵, 유가족들이 정치적 선동꾼이라는 얘기가 한창 돌았다. 매스컴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졌다. 그분들은 자식을 잃었다. 자식이 다친 것도 아니고 죽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의도에서 이러느냐'는 식으로 말할 수 있나. 너무나 속상하고 화가 났다.

나도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내가 분명히 피해자인데 어느 순간 가해자가 된 상황이었다. 너무 아픈 일을 당했는데, 사람들이 "그거 네 잘못이잖아. 네가 부족해서 그런 거잖아"라고 얘기할 때다. 진실이 낱낱이 드러나, 부모들 잘못이 아니라는 게 밝혀져야 한다. 그게 진짜 위로라고 생각한다.

   
   
▲ 오지숙 씨가 직접 만든 피켓. 그는 안산의 한 장례식장에서 이름도 모르는 희생자의 어머니를 만난 후 집에 돌아와 바로 피켓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 씨는 진실이 낱낱이 밝혀져, 희생자의 부모들 탓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게 진짜 위로 같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 이번 사건으로 한국 사회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가족들의 '의도'를 의심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공감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아이들의 아픔을 공감해 줘야 한다. 아이들은 계속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부모들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한다. 보듬어 주고 들어 주지 않는다. 자기가 아플 때 공감받은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아플 때 공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그래야 다른 친구들이 감기에 걸렸을 때도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부모들은 개근상 받아야 한다며 굳이 보낸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어떤 곳인지 드러내는 하나의 예라고 생각한다.

(마침 이날은 중학교 1학년인 오지숙 씨의 큰아이가 동행했다. 하루 동안 학교에 가는 대신 '민주 시민의 자세와 이웃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현장 체험 학습을 낸 것이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서울시청 합동 분향소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조문하고, 광화문에서 1인 시위하는 다른 엄마들을 인터뷰했다. '기자 수첩'도 준비해 왔다.)

   
▲ 광화문은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볐다. 이날도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사진을 찍으며 여행을 즐겼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 교회에 다닌다고 들었다. 이번 시위를 하게 된 신앙적인 동기도 있었나.

2011년부터 분당우리교회(이찬수 목사)에 다니고 있다. 전부터 교회는 다니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몇 년 살다가 이사를 하게 되면서 집 근처에 있는 분당우리교회를 나가게 됐다.

내가 눈물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 매일 울었다. 새로운 뉴스가 뜰 때마다 울었다. 그러다가 로마서에 나오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하지만 나는 줄곧 혼자 울고 있었다. 어쩌면 내 슬픔에 젖어서 감상적으로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면서부터는 '어떻게 하면 같이 울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안산 장례식장에서 그 어머니를 만났고, 작은 행동이라도 보여 드리면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울면서 기도하는 것도 귀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몸소 함께하시지 않았나.

- 날씨가 점점 더워진다. 4시간씩 햇볕 맞으면서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이런 시위를 예전에도 해 본 적 있나.

없다. 내가 95학번인데 학교 다닐 때 데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데모하다가 혹시 기록이 남아서 나중에 직장 생활에 지장이 있으면 어떡하나'라는 걱정 때문에 데모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엄마가 돼서 그런지 더 강해진 것 같다. 매일 나오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내 아이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른 척하지 말고 네가 친구가 되어 주라고 아이에게 말하곤 했다. 아이 입장에서는 감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 때문에 친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랐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나에게도 그 말을 적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 언제까지 하겠다는 계획은 있나.

정확한 계획은 없다. 매일 집을 나서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오늘 하루 나갈 힘과 체력을 허락해 달라고. 매일의 만나를 구하는 마음이다.

오늘로 세월호가 침몰한 지 31일째다. 아직 20명의 실종자가 있다. 실종자를 모두 찾을 때까지는 하고 싶다.

   
▲ 한 극우 단체 시위대가 오지숙 씨를 욕하고 위협했다. "싸가지 없다", "노란 리본 치워라", "종북 세력이다" 등 경멸 섞인 눈초리로 쳐다보고, 한 할아버지는 달려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 씨는 소란을 겪은 후에도 자기가 있어야 할 시간을 채우고 돌아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기자와 인터뷰를 한 이날, 오지숙 씨는 한 극우 단체 시위대에 위협을 당했다. 한 시간가량 이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그들은 경멸이 섞인 눈초리를 던지고, 한 할아버지는 오 씨에게 시비를 걸며 달려들었다. 경찰들이 그를 제지했다. 소식을 듣고 놀란 마음으로 오 씨에게 전화했는데, 오히려 그녀는 담담했다. "별일 아니에요. 그런 거 다 각오하고 있었어요."

오지숙 씨는 '평범한 엄마'이자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알기는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다 거리로 나오지는 못해도, 평범한 엄마가 1인 시위하는 걸 보면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한 번씩이라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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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성
2014-05-25 04:5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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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4-05-25 04: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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