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위한 신학> /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안종희 옮김 / IVP 펴냄 / 236면 / 1만 3000원

신학교 안에 떠도는 시쳇말 중에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하는 학생이 목회는 더 잘한다'는 말이 있다. 반농담처럼 가볍게 하는 말이지만 신학과 목회 현장의 괴리를 비꼬는 블랙 유머라는 점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신학이란 무엇일까? 아니, 이 경우에는 '신학의 유용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더 정확할 게다. 신학은 목회자가 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가. 목회자들에게 신학이 이런 코스워크에 불과하다면 대다수 크리스천에게 신학이 어떤 의미일는지는 묻지 않아도 그 답을 알 만하다.

손을 들고 찬양하는데 가슴이 뜨거워 오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특새'에 꼬박꼬박 나갔더니 기도 응답도 받았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좋은데 구태여 신학을 고민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중요한 건 삶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그렇다!"라고 단 한 번이라도 답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맥그래스의 책 <삶을 위한 신학>을 읽을 자격이 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게토(ghetto)에 갇힌 신학 구하기다. 중세에 유대인들이 강제로 게토에 갇혀 사회·경제적인 압박을 받아 약해졌던 것처럼, 신학은 고립되어 쇠약해지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크리스찬들이 신학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고서도 별 불편함 없이 신앙생활을 영위 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자연과학과 무신론이라는 철책에 갇혀 있다. 사람들은 과학에게 길을 묻지 신학에게 구태여 가지 않으려 한다.

맥그래스는 이러한 현실을 간파하고 신학이 여전히 쓸모가 있음을 증명 하려고 이 책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신학이 우리의 신앙과 공동체를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세속화된 현대 사회를 새롭게 통찰하여 당면한 현실의 문제에 적절한 답을 제공할 수 있는 아주 실제적인 학문임을 강조한다. 독자 역시 이 책을 통해 ‘순전한 신학’을 갖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사회를 새롭게 통찰하는데 얼마나 유용한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책의 타이틀의 변천과 출간 배경을 알아보자. 영국의 the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SPCK)가 2010년에 이 책을 출판하면서 달았던 제목은 ‘Mere theology(순전한 신학)’이었다. 그런데 IVP는 이 제목이 좀 난해하다고 판단했는지, 같은 해 7월에 ‘The Passionate Intellect(열정적 지성)’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하지만 이러한 타이틀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양 출판사 모두 Christian Faith and the Discipleship of the Mind 라는 부제는 손대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크리스천의 믿음과 지성의 제자도'라는 부제는 저자의 '순전한 신학' 개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명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순전한 신학을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과 지성이 새롭게 각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각성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기독교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러한 점을 계속 염두에 둔다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우리 번역본의 제목은 '삶을 위한 신학'이며 '모든 이를 위한 기독교 신학 입문'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한국 IVP는 이러한 편집을 통해 이 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적용점에 방점을 찍고 싶었던 듯 하며 이러한 변형은 매우 적절하고 영리한 듯하다.

또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리처드 도킨스 등을 위시한 무신론자들과의 토론을 그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맥그래스는 2007년 가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세기의 종교 전쟁'으로 일컬어진 토론회에 참여했는데 그때 무신론 진영의 토론자가 리처드 도킨스였다. 이 책의 원저가 2010년 영국에서 출판되었음을 감안한다면 2부의 기독교 변증에서 묻어나는 팽팽한 긴장감의 원인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현장감은 맥그래스의 기독교 변증이 책상에서 지어낸 기성품이 아니라 영국 사회 현장에서 맞추어진 멋진 수제 양복과도 같다는 증거다. 그래서 이 책은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는 맥그래스를 소유한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못내 부럽다. 하루 속히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수준 높은 기독교 변증이 일반 대중과 지성 그룹 안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본서는 크게 2부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를 구성하는 1~6장까지는 기독교 신학의 목적, 위치, 타당성에 대해 다루며 이를 통해 현실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는 기독교 신학의 의의와 가치를 변증한다. 2부, 7~11장까지는 자연과학과 무신론, 기독교 신학의 관계에 대해 변증하는데 옥스퍼드에서 분자 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던 저자의 전문성과 통찰력이 특히 빛을 발한다. 동시에 1부와 2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신학의 효용성이다.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 기독교 신학이 매우 쓸모가 있으며 이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열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세 가지 영역, 즉 크리스천의 신앙생활, 세속 사회와의 대화, 무신론과 자연과학의 기독교 공격에 대한 방어에 신학이 쓸모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신학은 크리스찬의 신앙생활에 유익하다. 맥그래스는 바늘 끝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는가를 논했던 중세 신학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신학이 성경과 이성 그리고 전통에 기반하며, 신앙의 개인적인 체험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기독교에 뿌리박은 공교회성을 동시에 아우르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통찰은 신학 없이도 잘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독자들에게 매우 귀중하다. 내 신앙이 건강하다는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느낌? 눈물? 열정? 성공? 아니다. 맥그래스에 따르면 그 기준은 신학이다. 신학은 성경 자체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통찰할 수 있는 가드레일을 쳐 준다. 우리의 신앙이 기독교의 전통과 합리적 이성에서 이탈하지 않았는지 점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맥그래스는 바로 이러한 '지성의 제자도'를 통해서만 신학의 순전함을 보존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신학은 기독교가 이 세상과 대화, 즉 변증할 수 있는 매우 탁월한 루트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보자.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진 이때 신학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언제 배가 뒤집힐지 모르니 평소에 열심히 전도하자고? 이게 다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이것 뿐인가? 기독교가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이것 뿐인가? 만약 맥그래스라면 이 이 상황에서 무엇이라 말했을까?

우선 그는 이러한 경우에는 변증과 복음 전도를 구별하자고 말했을 것이다. 맥그래스에 따르면 변증은 대화이고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 대한 요청이다. 교회는 세상을 복음 전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는 관성이 있다. 하지만 좋은 신학은 세상과 변증, 즉 대화한다. 그들이 미처 풀지 못한 삶에 대한 고통과 신비를 통찰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을 위로한다. 우리의 신학으로 세월호의 상처를 핥아 주어야 한다. 고통의 신비를 눈물로 녹여 온몸으로 대화해야 한다. 신학은 바로 이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물론 동시에 맥그레스는 변증의 한계도 인정한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하여 논증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적 변증의 본질은 대화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인정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복음 전도에 대한 조급증을 조금만 참을 수 있다면 좋은 변증을 통해 회심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복음의 통로를 열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은 자연과학이나 무신론과 대화할 수 있는 과의 대화에도 매우 유용하다. 이 내용은 주로 2부에서 다루는데, 저자는 자연과학과 기독교 간의 오래된 전쟁을 압축적으로 소개한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소개하면서 과학이 자기 안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전제를 감추고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척'할 뿐임을 폭로한다. 또한 기독교 역시 맹목적으로 과학적 발견의 성과를 외면하고 있다고 나무란다. 그는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는 관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상호 반목해서는 안된다고 적절하게 지적해 준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어떻게 '신학, 너 참 잘 생겼다~' 하고 쓰다듬어 줄 수 있을까? 사실 이 책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답답하다. 신학의 유용성에 대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유용성을 누릴 수 있을까?'하는 부분에서는 침묵한다. 독자들의 책임으로 미뤄 둔다. 아침마다 아이를 깨워 학교에 보내고 시험 성적에 스트레스를 받는 주부, 서류 작성에 머리가 빠지는 평범한 직장인, 하루 종일 이리 저리 휘둘리느라 아침에 했던 QT말씀 조차 기억하기 힘든 우리와 같은 일반인에게 이 좋은 주장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때문에 독자가 보다 적극적인 읽기를 하지 않는다면 맥그래스의 사려 깊은 주장은 공중에 뿌려진 물뿌리개의 물처럼 흩어지고 말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 지점이 본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한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한계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지적인 게으름을 먼저 반성할 일이다. 삶과 신앙, 신학과 세상을 아우르는 신앙의 통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보다 진지한 태도가 요구된다. 가볍고 즉흥적인 신앙의 양태를 벗고 우리 삶과 신앙, 신학과 현실을 통합해 내려는 신앙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할때 맥그래스의 이 책은 문자 그대로 '삶을 위한 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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