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일어나서 아내와 나는 이 방 저 방을 왔다 갔다 하기를 몇 번씩 반복하고, 이쪽 서랍과 저쪽 서랍을 열기를 몇 번씩 반복해야 했다. 모닝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원두가 어디 있나 찾아 헤매야 했고, 깔때기를 찾기 위해 찬장 문을 다 열어 보아야 했다. 연유를 찾기 위해서 나는 냉장고 문을 살피고, 꿀을 찾기 위해 아내는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녀야 했다.

어제 우리는 새 집으로 이사했다. 그동안 살던 집은 집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많은 손해를 감수하며 처분해 버려서, 우리는 교회 근처의 다른 아파트 단지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포장 이사 업체에서 나오신 분들이 아침 7시부터 우리 집을 방문하여 하나둘씩 짐을 정리하더니, 오후에는 새 집으로 모두 들여다 놓았다. 이전에 살던 집과는 구조도 다르고 평수도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다 보니, 가구들이나 살림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게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앞으로 당분간은 숨바꼭질 술래인 것처럼 꼭꼭 숨은 물건들을 찾느라 고생 좀 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아파트는 이제 막 사용 승인이 허락된 상태이고, 준공검사를 받기 전까지는 아직도 많은 공사가 남아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 공사로 인한 먼지가 아파트 단지 내에 가득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모든 일이 귀찮고 때론 신경질도 나지만, 아내와 나는 새로 지은 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훨씬 더 많다. 이제 막 새로 건축된 아파트의 새롭고 신기한 기술들을 체험해 보니, 아직도 구형 창문 걸이형 탱크 소리 나는 에어컨과 함께 살던 미국 생활이 떠오르며 감사한 마음 그지없다. 모든 것이 다 바뀌어 늘 쓰던 물건도 몇 시간째 찾아 헤매야 하는 불편함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조금 살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 아닌가? 이러한 귀찮음과 불편함을 감내할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은 결코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변화를 싫어하고 거부한다. 바뀌게 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그 불편함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늘 않던 그 자리가 가장 편한 자리이고, 늘 부르던 찬송이 가장 부르기 편한 찬송이다. 예배 순서에서도 항상 있던 순서가 없으면 마음이 불편한 것이고, 없던 순서가 들어오면 마음이 불편하다. 굳이 바꾸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는 데 아쉬움이 없고, 굳이 바꾸지 않아도 신앙생활 하는데 큰 문제가 없는데 왜 바꾸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성도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 깊게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공간은 마련되지 않는 것이다. 같은 모습, 같은 성향, 그리고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야 들어올 수 있겠지만, 그들과 전혀 다른 세대, 그들과 전혀 다른 생각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특히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생각과 전혀 다른 삶의 스타일을 가진 젊은이들은 더욱 그렇다. 오늘날 교회 내에 젊은이들이 사라져 가는 이유는 자명하다.

 

서구의 교회가 몰락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곳에서도 부흥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런 교회들은 대부분 새로 개척한 교회들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들이 변화를 거부하면서 고사하고 있지만, 여전히 새로운 시대에 호흡을 맞춘 교회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부흥하는 교회는 새로 개척한 교회이거나, 과감하게 개혁을 선택한 교회들이다. 서구의 교회가 몰락하는 것은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변화를 따라가다가 몰락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지금까지 한 지역 교회가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면서 이어져 왔다. 예루살렘 교회나 소아시아의 7교회나 유럽의 교회들은 한 시대를 일구었지만, 어느 순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그럼으로써 교회가 망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에 응답한 새로운 교회들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계속 이어져 올 수 있었고 부흥할 수 있었다.

 

과연 나는 나의 안락하고 익숙한 나의 자리에서 일어나 좀 불편한 곳으로 옮길 마음이 있는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있던 자리에 들어와 않을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둘 수 있는가? 그럴 마음이 없다면, 지금까지 내가 누리던 특권과 편안함을 포기할 각오가 없다면 교회의 부흥은 요원할 것이다. 나의 노쇠함과 더불어 함께 교회는 노쇠해져 갈 것이고 나의 죽음과 함께 교회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들이 나를 밀쳐내고 내 자리에 앉는 것에는 몹시 불편해하고 거부한다. 우리는 새로운 교인들이 들어와 우리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들이 우리 교회 내에서 설치는 모습에 불편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훈수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셨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셨다. 우리를 품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셨다. 그들을 천국의 잔치로 부르시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모습으로 칭찬받는 위치를 고수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세리와 죄인과 창기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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