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는 없다. 수많은 생명을 수장시키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채, 아니 아무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선실에 가만히 들어가 있으라고 방송해 놓고, 제일 먼저 배를 빠져나오다니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서울은 안전하다고 속여 놓고 국민 몰래 피난을 떠난 이승만 대통령 같은 선장 앞에서 우리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피눈물 앞에서 온 국민은 마치 자신들이 그들의 어머니인 것처럼 슬퍼하며 좌절하고 있다. 바로 코앞에서 배 속에 갇힌 아이들이 절규하면서 죽어 가고 있는데 단 한 명의 생존자도 구하지 못한 무기력하고 무능한 정부 앞에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정부의 변명은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선장의 궤변을 닮았단 말인가? 대한민국호가 침몰 중인데 이 배의 선장은 변변한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책임은 힘없는 자들에게만 뒤집어씌우고 정작 자신들은 비난의 화살을 비켜 가며 안전지대로 도망가는 일에 급급해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흉흉한 음모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겠지만, 그런 음모설이 기존의 언론 보도보다 더 훨씬 더 퍼져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뻔뻔한 선장을 너무나도 빼닮은 기자들은 진실이 죽어 가는 것을 방치한 채 정권의 애완견이 되어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기에 바빴기 때문이 아닌가?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이란 그들에겐 단순히 언론 사업의 좋은 호재로만 비칠 뿐이다. 이러한 언론의 현실은 지적하지 않은 채 마치 SNS가 구조를 더 어렵게 만든 주범인 양 비난하고 침묵하라고 강요하고 회개나 하라고 외치는 것은 또 하나의 뻔뻔한 선장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실컷 욕을 해 대면 조금이라도 분이 풀릴까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이 그런 무책임하고 뻔뻔한 선장들이 아니었던가? 내 옆에서 절망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형제들이 있는데 우리들은 구조를 외면하고 나만의 안위만을 챙겨 오지 않았던가? 장애인들의 아픔을 외면했고, 학생들이 기형적인 입시 시스템 속에서 질식해 가고 있는 것을 외면해 왔고, 최저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한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사회적 약자를 돕기보다는 내 밥그릇을 더 챙기기에 빨랐던 뻔뻔한 선장의 모습은 바로 우리 마음속 깊숙이 들어와 있다.

세월호 선장을 향해서 던져야 할 돌은 사실 바로 나를 향해서 던져야 할 돌이다. 내가 뻔뻔하게 안락함의 곰탕 한 그릇을 비우는 그 시점에 우리의 이웃은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절망의 바다에서 죽어 간 것이다. 최대의 이익을 위한 무리한 선실 증축과 위험을 무릅쓴 항해가 수많은 학생들의 꿈과 미래를 앗아 갔듯이, 이익과 개발이란 이름의 욕망은 수많은 이를 희생시키고 있으며, 마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살아온 내게 그 뻔뻔한 선장의 죄가 있는 것이다.

이젠 손해를 선택해야 한다(참고. 고전 6:7; 롬 12:7). 나의 이익을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이기심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그리고 절망 가운데 처한 이들에게 희망의 구명정을 양보해야 한다. 그러다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게 선장이다. 우리는 모두 선장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이다(참고. 벧전 2:9). 우리 곁에서 절망 가운데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선장처럼 아무것도 조치하지 않은 죄가 가장 큰 죄임을 기억해야 한다.

위기의 순간에 진정한 선장 역할을 했던 분이 있다고 한다. 박지영 씨는 일개 승무원이었는데 오히려 그가 선장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생명을 구출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달려 온 민간 잠수부들이 그렇다. 이러한 분들이 있기에 그래도 여전히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나라가 아닐까?

영원한 우리의 선장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죄를 지어 죄의 종으로 살아갈 때, 그리고 영원한 멸망을 향해 나아갈 때,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려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참된 선장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제 그 뻔뻔함을 회개해야 할 때이다.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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