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깊은 침체와 우울을 넘어서 분노와 절망에 빠뜨렸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아마 앞으로 꽤 오랜 기간, 이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었고 책임자는 누구인지를 찾느라 우리 사회는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다. 사실 이 슬픈 사건은 단 한두 사람의 실수와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과 우리 사회, 그리고 제1, 2의 인간형

언론에서 질타를 받고 있는 선장과 승조원들의 모습은 공분을 살 만하다. 지난 2월에 안전 검사를 받은 배의 구명정 42개중 2개만 정상 작동한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출항 전 해운 조합에서 선장의 신체 상태, 화물 적재 상태, 구명·소화 설비 등을 검사하는데, 이 검사가 오류 투성이며, 약식으로 처리된 것이 밝혀지고 있다.

정부는 2009년 규제를 완화해서 중고 선박들이 30년까지 운항하도록 했고, 여행사는 2012년 10월 이 배를 매입해서 181명을 더 수용하도록 선체를 개조해 배의 복원력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는 배를 개조하도록 허가했고, 또 어떤 이는 안전 검사를 통과시켰을 것이다. 또한 여행사는 승객의 안전을 위한 선원 교육과 비상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많은 학교들이 그렇지만 수학여행이 학생들을 단순히 놀리는 시간이 아니라 교육이기에, 안전 교육과 비상시 대책 등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이를 학교 당국이 제대로 사용한 것 같지 않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늑장 대응과 책임 떠넘기기는 더욱 더 문제였다. 배에 이상 징후가 생긴 이후에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정부의 재난 관리 체계 역시 문제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강화하겠다고 이름도 행정안전부에서 안전행정부로 바꾸고, 지금까지 10년간 자연 재난과 인적 재난을 감당했던 내부 구조를 바꾸었다. 그러나 재난 앞에서 관계 부처간 사고 수습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공유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혼선을 빚었다. 경솔한 인터뷰를 포함한 기자들의 섣부른 보도는 가족에게는 상처를, 사회에는 혼란을 빚었다. 이런 와중에 거짓 인터뷰를 하는 사람에서부터 장난 문자와 더 나아가 스미싱까지….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핵 발전소나 방위 산업에 가짜 부품 조달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만난 것이 엊그제지만 우리 모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어느 날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면 모두가 패닉에 빠진다. 세월호 사건은 어느 한 개인의 과오를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작은 잘못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사건이다. 이런 일을 두고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셨느냐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여러 사람들의 자신의 편의와 무책임, 그리고 크고 작은 불법이 만들어 낸 뼈아픈 사건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행과 불법과 편법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각자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보다는, 속죄양 놀이를 하기에 바쁘다.

여러 지점에서 한 사람이라도 문제 제기를 했다면 어떠했을까? 제도 개선도 필요한 것이지만, 제도가 완비되어 있더라도, 자기가 관련된 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때, 이러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야 마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과 같이 사건이 모여서 터지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고, 실제로는 작은 규모의 이런 일들이 지금도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 등을 부러뜨린다(The last straw breaks the camel’s back)'는 속담처럼 여러 사람들의 과오가 모여서 결국 이런 큰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와 편리만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는 제1의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불행하게도 이런 사람들이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문제를 만나면서, 사람들은 안전 대책과 재난 대응 매뉴얼 등 제도를 정비하고 중대본의 관료체제를 전문가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난을 대비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공의 이익과 약자들을 위해 제도를 개선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죄 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예방 차원에서 더 철저한 교육을 해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수양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플라톤은 정의, 지혜, 절제, 용기 4가지 덕목을 연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교에서는 인의예지가 인간의 본성인데, 자신을 닦아서(수기修己),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치인治人)고 한다.

제2의 인간형은 나만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닌 약자를 돕고 함께 살기 위해 덕목을 키우고 인격을 개발하는 사람들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희생을 할 수 있도록 평상시에도 작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다. 박지영 승무원, 양대홍 사무장, 최혜정, 남윤철 교사가 제2의 인간형이었다. 우리는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과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하게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 상황에서 내가 선장이었다면, 내가 승무원이고, 내가 교사였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지금도 관행이라거나,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한다고 나의 작은 "지푸라기"를 가볍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희생의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바울, 제3의 인간형

부활절을 맞아, 자기 자신의 유익과 안위만 생각하고 속죄양 찾기에 급급한 "제1의 인간형"도 아니고, 수양을 통해 공공의 이익을 위하며 약자들 편에 서려는 "제2의 인간형"도 넘어선 "제3의 인간형"을 소개하고 싶다. 그것은 바울이라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후 4:6~14 6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8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 들어도 움츠러 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 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2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14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새번역)

8~9절에서 바울은 극악한 환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타협이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지독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것을 버텨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단지 종교적인 언어로 이해하지 말라. 그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을 위해서, 끔찍한 어려움을 겪지만 굴복하지 않고 있다. 12절에서는 자신들이 이러한 끔찍한 어려움을 겪어 그들이 생명을 얻으니,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고 고백한다. 바로 앞의 4장 5절에서는 자신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고린도 성도들의 종이라고 천명한다.

바울이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 정체감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실을 질그릇이라고 여긴다(7절). 질그릇은 사실 깨지기 쉬운, 별 가치가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보물이 자신의 정체감과 가치를 결정한다고 바울은 이야기한다. 7절의 보물은 6절에서 설명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을 뜻한다. 바울의 정체감을 결정 짓는 결정적 요소는 인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렇기에 바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에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를 추구했다. 바울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과 같은 어려움을 끊임없이 당하는 대가를 치른다고 이야기한다. 바울이 소망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예수의 생명을 경험하고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그의 일상이었다는 것이 더욱 도전이 된다. 10절과 11절은 원어에는 '언제나'와 '늘'로 시작하고 있다. 예수의 생명의 자신의 몸에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 실제적인 시간과 실제적인 자신의 실존 속에서 예수의 부활 생명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추구하고 있는 바울을 우리는 만난다. 바울은 일상 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끊임없이 당하지만, 그 일상의 삶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가 가진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그의 일상에서 경험되는 실제였다.

바울의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한 보물(7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살아있는 하나님, 예수의 생명(10-11절),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릴 것이라는 능력(14절)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 속에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되어서, 고난과 죽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생명을 경험하고 누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바른 소리를 하고 바른 행동을 하려고 하면 불편, 집단 따돌림, 그리고 실제적인 불이익을 당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고, 부활의 생명을 간직한 자들이 되었기에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을 우리는 제3의 인간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제3의 인간형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

제3의 인간형의 비밀은 부활 영성에 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며 살았고 결국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께서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도록 하셨다. 또한 예수를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살리실 것이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부활을 맛보기를 바라는 자들이 되었다. 부활은 상징이 아닌 인간의 존재를 억누르고 있던 죽음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더 이상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부활의 영성을 갖게 되면 정체감이 바뀐다. 나는 질그릇이지만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의 생명, 부활의 능력을 보물로 여기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 지식, 경험, 경력, 인맥, 재산 들은 모두 질그릇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뿐 아니라, 그의 생명이 나의 속에 들어와 있고, 그렇기에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구하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다스림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감이다. 참된 기독교는 세상의 가치와 방법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감이 생기면 사명감도 생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 자신과 가족만을 돌보기 위한 일차적인 것을 넘어서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관련된 사람들을 섬기고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으로 뻗어 나간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나의 인생과 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흘러가 그들을 살릴 것을 기대하며 산다. 이것이 사명감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과 생명이 이 땅에 드러나기를 바란다.

부활 영성에 기초하여 정체감과 사명감이 생기고 나면 두려움 극복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타협하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이유는, 따돌림, 낙오와 실패를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깊은 내면 가운데 있는 두려움 때문이다. 모든 두려움의 궁극적 뿌리는 죽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두려움에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내 속에 있는 것을 진정 믿을 때 이 두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내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 박해, 거꾸러 뜨림을 당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움을 극복하여 평안하고 의연하게 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사명을 감당하며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언제나', '늘' 일상의 삶에서 하는 것이다. 인생은 특별한 순간이 예고하고 다가오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모든 순간이 특별한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생명이 자기 몸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다. 바울은 관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늘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 일상의 사소한 순간 속에서 부활 영성에 기초한 정체감, 사명감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제3의 인간형인 것이다. 

세월호 사건과 세 종류의 사람들

세월호 사건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픈 사건이다. 그러나 이 세월호 사건은 지금도 작은 규모로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고 진행 중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월호 사건을 대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평소에 자신의 안위와 편익을 추구하다가 이런 일을 만나면 패닉에 빠지고 희생양 찾기에 급급한 제1의 인간형이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의 원인을 제공하는 작은 지푸라기를 끊임없이 여기저기 쌓고 다니고 있는 것을 모른다.

제도와 교육을 보완하며 자기 성찰과 자기 수양을 하려 애쓰는 제2의 인간형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이 정도의 사람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제3의 인간형으로, 부활을 믿기에 부활 영성에 기초하여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 일상 속에서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에 무릎 꿇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제1, 제2의 인간형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우리 속에 보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참사 앞에서, 제3의 인간형이 절실하기만 하다, 우리 한국 사회에, 우리 한국교회에!

김형국 / 하나님나라복음DNA네트워크 대표, 나들목교회 대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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