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뼈다귀야>라는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그림 동화책이 있습니다. 강아지 두 마리가 마당 한구석을 파헤치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얼굴에 얼룩이 있는 '냅'이고, 다른 한 마리는 꼬리에 얼룩이 있는 '윙클'입니다. 두 강아지는 마당을 한참 파다가 뼈다귀 하나를 발견하고는 서로 싸웠습니다. 냅과 윙클은 싸움이 끝이 나지 않자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지나가던 농부 아저씨를 만나 판단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마침 농부 아저씨 마차가 개울에 빠져 그것을 도와주면 말해 주겠다고 해서 열심히 도왔으나 나중에 농부 아저씨는 뼈다귀가 누구 것인들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하면서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염소를 만났는데 염소는 건초 더미에만 신경이 쏠려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음은 이발사 아저씨를 만났는데 이발사는 털 깎는 일에만 신경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리가 긴 큰 개를 만나 물었는데 그 개는 냅과 윙클 두 강아지의 뼈다귀를 뺏으려고 하였습니다. 냅과 윙클은 힘을 합쳐 큰 개를 물리치고는 집으로 돌아와 뼈다귀를 사이좋게 같이 소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좋은 내용과 예쁜 그림 덕에 해마다 최고의 그림책에 수여하는 칼데콧 상을 받았지만 단지 아이들에게 협동심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단순한 이야기 때문에 칼데콧 상을 수상한 것은 아닙니다. 저자인 니콜라스 모르드비노프(1911-1973) 러시아 사람으로 쌍뜨 빼째르부룩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러시아 혁명을 피해 파리로 이주하여 작품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 러시아혁명을 체험하면서 인간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모두 개뼈다귀 같은 아무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싸우며 살아간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개뼈다귀는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들은 그 뼈다귀에 목숨을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생명과도 같이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목숨을 걸고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 그림 동화책 <내 뼈다귀야>는 동화 속 주인공 '냅'과 '윙클'을 통해 아무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싸우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일깨운다. 진정 우리를 배부르게 할 수 있는 양식이 남들과 경쟁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인터넷 서점 인터파크 갈무리)

저는 '동물의 왕국' 이라는 TV 프로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 프로를 보면 아프리카의 사자 같은 맹수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상대적으로 연약한 초식동물을 무참히 사냥하여 배불리 먹는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가 아프리카에서 많이 목격한 것은 오히려 그 맹수들이 초원에 누워 평화롭게 초식동물들을 바라보는 보습입니다.

배가 고플 때는 사냥을 하여 초식동물들을 잡아먹지만 하루 종일 사냥을 하며 보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진' 대부분의 많은 시간은 누워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자 무리 앞으로 가젤이나 얼룩말이 지나가도 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그럴 때는 참 순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욕심이라는 식욕을 채우기 위해 언제나 배고파합니다. 그래서 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남들을 죽이면서 살아갑니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 아직도 배고파하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여전히 사냥을 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내를 죽이고, 아내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남편을 죽입니다. 부모는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녀를 죽입니다. 윗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랫사람을 죽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여전히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남들을 죽이며 피해를 주며 살아갑니다.

진정 내 배가 부를 때 사냥을 멈추듯이 우리는 우리의 배가 부를 때 비로소 남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욕구가 채워질 때에야 비로소 평화스럽게 남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아내 될 수 있게 하고 남편이 남편 될 수 있게 하고 자식이 자식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배가 부를 때에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것으로는 우리가 평생 배부를 수 없고, 그래서 평안의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 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우리를 진정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양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양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특별 새벽 기도를 통해 부활주일을 준비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는 나의 빛이요, 예수는 양들의 문이요, 예수는 선한 목자요, 예수는 부활과 생명이요, 예수는 길과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물려 질질 끌려가며 죽어 가고 있는 우리를 예수의 복음만이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양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6:48-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생명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죽으셨음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의 비밀, 즉 나를 위해 죽으신 것과 그 죽음에서 다시 사셨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려고 한다면 주님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과 다시 사신 부활의 사건을 먹어야 합니다. 내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옛부터 사람들은 곡기가 끊어지면 사람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먹는 것을 끊으면 생명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양식이 끊어지면 우리는 참 생명을 얻으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양식의 기운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밥 기운으로 살듯이 주님을 먹고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양식이 없으면 언제나 허기지고 배고파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죽은 양식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남들을 잡아먹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16일 일어난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된 세월호의 구조 상황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실로 많은 아픔을 공유하며 지냈습니다. 대한민국의 한 부모로서 이렇게 제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말 침몰된 배 안에 갇혀 있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도와줄 수 있는 시기를 놓쳤고, 또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해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이런 현상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려 하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먼저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최근의 우리 사회는 유독 아이들의 피해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아동 성폭력, 학교 폭력, 가중되는 입시 경쟁 속에 늘어나는 성적 비관 자살, 그리고 어른들의 안전 불감증으로 나타난 지난 2월의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 등 집중적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목숨을 잃거나 심한 상처를 입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을 향해 쏟아지는 뉴스의 보도는 선장의 무책임한 조치가 아이들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안일한 대응이 이 사건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오늘날 우리의 아이들을 사지로 몰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부모들이요 어른들 아닙니까?

다시금 우리의 아이들을 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갑니까? 우리 아이들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우리 어른들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경쟁이라는 양식을 주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경쟁이라는 떡을 주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유독 학생들보다 어른들이 많이 구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남이야 어찌됐든 자신만은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이 어른들의 생각이고 익숙한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다릅니다. 아이들이 경쟁에 익숙했다면 남들을 밟고 배에서 빠져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아직 경쟁을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경쟁을 잘 하는 아이로,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로 키우려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경쟁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마음이 남아 있는 우리 아이들의 깨끗하고 순수한 심령을, 배고픈 마음으로 꽉 차 버린, 육체의 욕심으로 꽉 차 버린 더러운 어른의 마음으로 바꿔 놓으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어른들의 그 탐욕스런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바꿔 놓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타고 있는 배는 또다시 뒤집히고 말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야단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부모처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구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적어도 하나님을 제대로 잘 믿고 싶은데 자신이 아는 하나님과 부모님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이 달라 갈등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이 사회의 예수 믿는 어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달라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하나님 품에 있지 않는다고 제발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위선 가운데 살아가는 어른들의 교회보다 아이들의 모임이 그들에게는 더 따뜻한 하나님 품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른 된 우리가 먼저 경쟁의 마음을 버리고 위선의 모습을 버리고,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신문과 방송, 그리고 인터넷상에 이번 세월호 사건 얘기가 수도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중 제가 접한 얘기 중에 가장 마음에 두고 싶은 말씀이 있어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인터넷상으로 무지개성서교실을 운영하시는 류호준이라는 목사님의 글입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부활절을 맞아야 할까?'라는 매우 도전적인 질문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매번 연합 예배를 조직할 때마다 '누가 어느 순서를 맡을 것인가?'와 같은 치졸한 자리싸움으로 얼룩졌던 과거를 기억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상실한 지 오래된 병든 중환자처럼 너절하게 찢겨져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부패하고 무감각한 제사장 엘리의 교회처럼, 한국교회와 그들의 몇몇 탐욕스런 인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린 비극적 상태를 무시한 채 위험한 항해를 계속해 왔습니다. 이번 기회를 맞이하여 한국교회와 그들의 지도자들은 죽음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만 부활이 예기치 못한 선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경험하기를 소원하는 바입니다. 어쨌든 '이번 부활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한국교회는 정말로 죽어야 합니다. 죽은 척이 아니라 정말로 죽어야 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다고 강단에 올라갑니까? 값싼 은혜가 통용화폐로 사용되고 있는 즈음에 싸구려 부활을 선포하는 일은 멈추어야 합니다" (관련 글 바로 가기 : 성금요일과 부활절 그리고 세월호)

예수만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먹을 때만이 진정 배부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세상의 욕심을 멀리 하게 됩니다. 그것의 소용 없음을 알게 됩니다. 진정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우리의 자녀를 키워야 하는지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양식을 먹고 생명을 얻을 때, 우리는 진정 부활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양식을 우리 모두 함께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내 배가 불러야 남들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 생명의 떡을 먹고 배를 채워
남들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자녀들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대식 / 높은뜻정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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