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명한 한 목사의 죽음이 심장마비가 아니라 자살이었다는 기사가 떴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고 연이은 자살 시도 끝에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일반인도 해서는 안 될 자살을 목사가 왜 선택했을까? 그는 성령 충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분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정직하고 개혁적인 분이라는 소문만 들었다. 심각한 우울증은 정신의 병일 뿐일까? 신앙의 차원은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을까?

이 이야기는 필자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십여 년 전 가까이 지내던 한 여집사가 자살했다. 개인의 죽음으로 한 가정이 파탄 났다. 남편의 사업은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엄마가 사라진 어린 자녀를 제대로 보살피며 키우기엔 젊은 남편의 삶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었을 것이다.

여집사는 성품이 모질지 못하고 오로지 신앙으로 산 사람이었다. 대형 교회의 집사로 구역장으로 항상 솔선수범이었다. 목회자를 섬기는 면에서 언제나 정성을 기울였고 새벽 기도, 거의 매일 있는 철야 예배,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출석했다. 당시 사업하던 남편이 매달 건네준 큰 액수의 생활비가 항상 크게 모자랄 정도로 교회 봉헌을 열심히 하였다. 자신은 물론 아이들 옷 한 벌 제대로 사지도 않으면서 봉헌했다.

여집사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어느 날 평생 입에도 대지 않던 맥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농약을 마셨다. 여집사에게서 가장 많은 물질적 혜택을 본 그 교회 부목사가 장례식장에 왔다. 그리고 자살은 죄며 그녀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천국엔 갈 수 없노라고 했다. 당시 외국에 살던 필자는 그 소리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미친 것 아냐! "수십 년 전에는 그렇게 믿던 목회자들이 뜻밖에 많았다. 아니 신앙인뿐만 아니라 일반인 중에도 미신적인 사고가 보편적이어서 우울증은 귀신 소행, 자살은 마귀의 행위라고 믿은 이들이 다수였다. 사실 대부분 우울증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지금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처럼 말이다. 지금은 그 목회자를 탓하고 싶지 않다. 그분도 일정 부분 희생자다. 신학의 빈곤으로 생긴 일이기 때문에 탓하자면 끝이 없다.

심각한 우울증이 원인인 자살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수 세기 전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한 이의 장례식장에서 관을 두드리며 유족들 앞에서 "뜨거운 불 가운데 잘 타고 있는가"하고 호통치던 유명한 목사가 있었다. 차마 이름을 밝히지 않겠으나 우리에게도 아주 잘 알려진 서양 부흥사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확신 있는 복음 전도자의 성령 충만한 행위인 양 여겼지만 그런 방식은 사실 성경적이지 않다. 지금이야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근본주의자들이 지배하던 당시에는 이런 행태를 확신 있는 신앙으로 보았다. 우리 사회에도 아직 이런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럴 때는 성경을 신학 서적이 아니라 목회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니 신학적으로 왈가불가한들 바뀔 것이 없다. 이미 자살한 분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목회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일 것이다.

필자는 그 여집사가 신앙이 잘못되어 자살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에는 이미 자기 의지에 의한 감정 조절이 불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변에서 도움을 주지 못했던 가족과 교회가 안타깝다. 이럴 때 치명적인 실수는 목회자가 환자에게 신앙으로 고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님만이 아니시다. 만유의 주님은 좋은 의사를 통해서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한다. 우울증 환자에게 병원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렇다고 병원에 가면 곧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유전적 우울증인 경우 병원 치료를 통한 완치율은 30% 미만이라고 한다. 유전적인 우울증은 후천적으로 관리는 할 수 있어도 지금의 현대 의학으로 고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유전적 우울증은 불치병이라 부를 정도로 재발률이 몹시 높다. 그래서 다수 환자는 더 악화하지 않게 전문의의 도움을 받으며 우울한 자기를 보살피면서 평생 함께 살아가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주변에 주기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며 신앙으로 극복해 보고자 애를 쓰는 기독교인들을 본다. 안타깝게도 신앙으로 극복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크게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신앙은 의료적 도움과 병행할 때 확실하게 큰 도움이 된다. 가벼운 우울 증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 긍정의 힘을 주장하는 산술적인 책이나 강사들을 추종하여 교회에서도 이를 신앙으로 둔갑시켜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가 만든 귀신에 속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인 긍정적인 사고로 우울한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까?

보통의 우울한 감정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온다. 감정이 일어나기 전 생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뀌면 감정도 바뀐다. 그런데 생각은 무의식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지금까지 알려진바 최소 95% 이상 인간의 의식을 조종한다. 즉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실천하고자 해도 생활에 적용하기 어려운 이유다. 초등학교 학생과 전문 격투기 선수와의 싸움처럼 언제나 의식보다 무의식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의식적인 좋은 생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해도 곧 오래된 부정적인 생각의 습관이 나를 지배하기 쉽다. 다시 말하거니와 건강한 사람도 잠시 겪는 지나가는 우울증 이야기가 아니다. 무의식과 뇌가 이미 강하게 우울증에 노출된 경우 의학적 도움 없이 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높은 영성으로 자신의 부정적인 무의식을 정화하고 승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고도로 훈련된 영성가의 경우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완치는 힘들어도 우울증을 잘 다스릴 수만 있다면 유익한 면도 있다. 첫째, 우울증을 겪는 이는 자신이 정신적 고통을 당하다 보니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해 준다. 둘째, 우울한 감정이 예술과 문학적 감성의 에너지로 변화되기도 한다. 우울감은 창조의 에너지다. 셋째, 인간의 연약함을 깊게 인식하고 신앙에 의지하게 한다.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몸부림을 통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기도 한다.

정신착란(schizophrenia)이 아닌 노이로제(Neurosis)의 일종인 우울증은 감기같이 흔한 질병이다. 영국 스펄전 목사도 옥한흠 목사도 헨리 나우엔도 우울한 성향이 강한 분들이었다. 유명한 설교자나 기독교 작가 중엔 우울증이 기본인 분들이 많다.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런가? 우울함이 신앙으로 잘 승화하면서 오히려 좋은 설교와 글이 나왔던 경우다. 그러나 문제는 심한 우울증의 경우다.

"심한 우울증이 아니에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니까요. 나는 성령 충만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죠. 물론 마음이 약해질 때도 때론 있지만, 항상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거든요. 내가 어떻게 심한 우울증일 수가 있어요? 난 아니거든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착각하지 마세요!"

"..."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이리 외롭고 우울한 거야. 모든 것이 짜증 나! 하나님은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시는 거야? 난 알고 있어. 다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 난 성령 충만해야 해! 마음에 위로를 주는 설교와 글, 집회를 찾아봐야지."

이런 심각한 경우는 뜻밖에 목회자들 사이에 더 자주 발견된다.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해 교회를 위해 더 많이 헌신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찬양하고 몸부림친다. 문제는 그들이 그럴수록 더 큰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느낌, 사실 사소한 일인데도 감정이 더 상하고 낙심되는 느낌! 그리고 이 화의 감정은 자신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죄책감! "목회자로서 내가 이래야만 하는데 지금 나는 어떠한가?" 결국, 감정에 삶의 에너지가 다 낭비되어 하루를 시작할 힘도 없어진다.

문제는 기독교인이 깊은 우울함에 빠질 때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많이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은 우울증에 대해 더 잘 다룰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현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우울증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빠져나올 수 있다면 심각한 우울증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트레스와 위기의 느낌에 관한 생물학적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뇌 기능의 한도가 넘어선 상태이기 때문이다(Kramer, p.131). 즉, 감정을 다스리는 뇌 부분의 기능이 감소한 경우에 개인의 의지가 감정에 함몰되기 때문이다. 심각한 우울증의 원인은 뇌 화학물질의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한다. 이런 경우 누구나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환경적인 심한 충격도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환경이 나빠서 모두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유전적인 요소가 오히려 개인의 반복되는 우울증에 가장 큰 요소다. 유전적으로 우울증에 강한 사람은 우울감에서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한다. 우울증에 덜 걸린다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건 조상 덕분이란 말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성령 충만한 영적인 목사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중생했으니까 나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우울증을 벗어나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왼발 가려운데 오른발 긁는 꼴이다.

가벼운 우울증이나 우울증 예방에는 신앙생활이 확실히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심각한 우울증은 이미 신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상태다.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전문 치료가 필요한 중병 환자에게 음식 조절하고 잘 쉬면 치료되고 정기적인 운동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으로 노화가 진행되고 질병에 취약해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감정을 주관하는 뇌는 육체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는 생물학적인 이유로 임상적인 우울증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유전적 병은 육체적 질병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우울증은 "믿음의 부족" 혹은 "나쁜 태도"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우울증을 겪는 이들은 주변의 배려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다 믿음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꼭 정말 신앙심이나 선한 양심이 털끝만치도 없는 이들 중에 우울증과 거리가 먼 사람도 많지 않은가? 아픈 사람에게 질책은 금물이다.

우울증은 마음과 몸의 상태에서...마음과 몸은 긴밀하게 연결

첫째, 짧은 시간의 우울증은 때론 단순히 축적된 피로와 힘든 상황의 결과다. 왕상 19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홀로 삼백여 명의 바알 선지자들과의 힘든 싸움에서 이긴 후 심하게 탈진했다. 그런데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피로에 지친 상태에서 도망가야만 했다. 결국 그는 우울감에 빠져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끝내 달라고 소리친다. 그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잠을 자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회복된다. 주변에 충분히 잠을 잘 수가 없고 학업이나 생활고에 지쳐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부분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우선 생활이 힘들더라도 정신적으로 힘든 짐은 그리스도에게 다 맡기고 정신적인 쉼을 얻어야 한다.

둘째, 가벼운 우울증은 건강한 음식 섭취와 정기적인 운동으로 예방할 수 있다. 음식과 운동도 우리의 감정적이고 영적인 상태에 영향을 준다. 온갖 가공되고, 포화 지방이 넘치는 음식, 패스트푸드를 섭취하면서 운동은 멀리할 때 우울감은 당연하다. 건강한 음식 섭취를 하고 정기적인 운동을 할 때 상당수의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누릴 것이다. 우울할 때 끌리는 초콜릿에 빠지지 말고 평소에 영적인 생활을 즐겨라. 우울감을 막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인간은 원래 육체적으로 노동하고 영적인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찾도록 창조되었다. 정기적인 기도와 찬양, 예배를 드리는 삶은 분명히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에 도움을 준다.

셋째, 우울증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몸의 화학적인 불균형으로 오기도 한다. 특히 유전적인 경우도 많고 여성들이 갱년기 때 겪은 우울증은 사실 육체적인 문제다.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과 근육 증가 운동이 도움되는 것은 틀림없다.

넷째, 우울증은 개인을 넘어 사회의 문제다. 오늘날 탐욕과 소비를 부추키며 항상 경쟁을 시키는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소진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요즘 남녀 간의 사랑은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인 이해관계다. 예전보다 남자는 돈, 여자는 미모면 다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많은 젊은이에게조차 진실한 사랑이란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사회에서 서로 상처받고 상처 주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예전부터 백의의 천사로 불리던 간호사들의 현실은 지금 과도한 업무 그 자체다. 그래서 힘들게 대학에서 공부하고도 4년 내 이직률이 가장 높은 직업 중의 하나다. 병원에서도 중요한 것은 '돈'이다. 비용 절감 때문에 결국 업무 스트레스는 계속 높아진다. 적성에 맞지 않거나 비인간적인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것 모두 우울증을 유발한다. 충분하게 쉴 수 있는 휴가가 필요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직장,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가 겪는 우울증은 사회적 문제다. 돈 때문에 형식적으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수없이 외쳐야 하는 감정 노동자들, 빈익빈 부익부를 벗어날 수 없는 희망없는 미래가 사람들을 우울하게 한다. 우울증을 감소시키려면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우울증은 영적인 문제일 수 있다. 하나님 뜻에 맞지 않게 살았다는 죄책감은 우울증을 유발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자신과 남을 해친다. 특히 기독교인 중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복음은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도구가 아님에도 성경을 잘못 읽어서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일부 목회자들은 죄책감을 심어 주는 율법적인 말씀은 잘 전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복음을 전하는 데는 서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청소년 중에는 성적 정체성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동성애 성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자살을 생각한다. 많은 교회에서 그 고통을 이해해 주고 상한 마음에 위로를 주고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날 길을 제시해 주기보다는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심하게 정죄만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여섯째, 유전적인 우울증의 잠재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또한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겪는다고 누구나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도 습관이고 생각에서 감정이 발생한다. 평소에 늘 감사하고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성서적인 세계관이 무의식까지 침투되어 있기란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감정도 바뀐다. 관점이 체득되어 있고 기도의 힘이 축적된 사람은 사실 우울한 기질을 가지고 있거나 또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쉽게 우울해지지 않는다. 우울함에 빠져도 놀라울 정도로 빨리 빠져나온다. 운동을 통해 근육을 강화하듯이 오랜 기간 영성 훈련을 통해 마음의 근육을 강하게 훈련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서로 보살피는 양육 관계(보살핌을 받는 것 이상 보살피는 기회도 크나큰 기쁨이다), 말씀 묵상과 기도, 성경의 영성 훈련은 영혼의 보약이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기 전에 해야 하는 예방이다. 그러기에 이미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모두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필자의 경험으로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목회자의 지도 아래 오랜 훈련을 통해 영적인 관점이 체득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관리 가능한 우울증의 경우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조절이 안 될 때는 더 심해지기 전에 무조건 전문 병원에 가라! 이런저런 주변의 말을 믿지 말고 전공의의 말을 신뢰하라. 현재 우울증 치료는 예전보다 상당히 발전했다. 가까운 곳에 경험이 많은 전문 상담가 혹은 정신 건강 전문 인력을 찾아가야 한다. 병이 있으면 그 분야의 좋은 의사를 만나야만 치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상담과 의료계에서 그 분야에 검증된 전문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찾아야만 한다.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상담가와 의사를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소문이나 인터넷 광고, 언론에 속지 말아야 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 전문가를 만나 치료를 받는 것은 뜻밖에 쉽지 않은 일이다. 제삼자가 볼 때는 당연한 일임에도 심하게 우울증을 겪는 이에게는 전공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 보통 지독하게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울증이 있을 때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 상담가나 의사를 만나길 원한다면 그쪽의 최고 전문가를 찾는 길을 여러 전문가를 통해 모색해야 한다.

둘째, 상담가나 의사를 만나면 정직해야 한다. 그들은 점쟁이가 아니다. 말을 안 하고 보여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들은 도우려고 있지 정죄하거나 판단하려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더 많이 자신의 속마음을 개방할수록 더 많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끝으로 '목회는 목사에게, 질병은 의사에게'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우울증 환자를 상담하고 도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심각한 정신병에 대하여 목회자로서 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목회자가 개입할 부분과 전문의에게 맡겨야 할 부분이 있다. 아니면 목회자는 탈진될 정도로 에너지만 소진하고 가족들에게 원망을 사고 상처만 남겨 원수가 되기 쉽다. 필자의 신앙 친구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기립 원장의 말처럼 "우울증을 생물학적 질병으로 이해하는 과학적 관점이 한국의 교계에는 아직 많이 결핍되어 있다, 의지가 부족해서 또는 믿음이 부족해서 우울증에 걸리는 거 아니냐는 식이다." 이 사고를 벗어나는 길이 환자를 돕는 길이다. 우울증!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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