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은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부패한 현실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소장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신학대학의 교수가 아닌 지역 교회의 목회자이며 아직 박사 학위도 마치지 않은 그에게 '신학자'라는 칭호가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나는 우선 그의 문제작 <메가처치 논박>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펴냄 / 512쪽 / 1만 8000원

<메가처치 논박>은 한국 개신교회의 대형화에 따른 윤리적 퇴행 현상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크기에 대한 집착'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의 문화 이데올로기에 주목함으로써 개신교의 일그러진 '오늘'을 읽어 내려는 비평적 개입이 돋보이는 저작이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용어를 통해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일부 '상업적인' 대형 교회들에 국한된 현실이 아니라, 동시대 개신교회 일반이 공유하고 있는 지배적 정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즉, '메가처치'가 된 소수의 교회들이 성취한 욕망을 대다수의 교회가 내면화함으로써 또 하나의 '메가처치'가 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한국교회의 일반화된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는 무한 성장을 미덕으로 '이미 큰 교회'와 '장차 클 교회'만이 존재하는 개신교의 현실에서 성장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메가처치 논박>에서 보여 준 저자의 현실 분석과 비평적 개입은 신학대학의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신학자라는 정체성과는 별개로 지역 교회의 더 많은 '목사-신학자'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해 준 희망의 신호이기도 했다. 그의 새 책 <천하무적 아르뱅주의>가 반가운 이유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이 희극적인 현실은 그냥 몇몇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생겨난 우발적인 도덕적 스캔들이 아니(23쪽)"다. 겉으로 드러나는 윤리적 실패의 이면에는 한국 개신교회의 '신학적 실패'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26쪽). 그는 '아르뱅주의'라는 새로운 용어를 통해 한국 개신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지속적으로 양산해 내는 신학적 구조에 주목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의 근원에는 왜곡된 구원론이 있다. 교회가 값싼 죄의 용서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면죄부를 무차별적으로 남발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과거 성 베드로성당 재건축 자금 마련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가톨릭교회의 과오가 종교개혁자들의 공분을 샀다면, 오늘날 수천억 원에 이르는 대형 교회의 건축(을 위한 모금)과 목사직 세습, 헌금의 횡령과 목사의 성범죄 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의 퇴행적 현실은 교회 개혁자들의 관심을 넘어 동시대 시민 일반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른바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윤리적 문제의 근원에 대한 신학적 분석과 비평적 개입은 반드시 필요한 과제이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구원론'에 있어서만큼은 종교개혁의 대상이었던 중세 가톨릭교회보다 더욱 심각한 타락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발행이 "돈이 되었든, 선행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모종의 징벌과 보속의 행위를 요구한 만큼 완전히 공짜는 아니"었던 반면,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발행하는 신학적 면죄부는 "아예 찍을 필요도 없이 그냥 말로 발행하면 되는 완전 '공짜'(93쪽)"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발행하는 구원에 이르는 '완전 공짜' 면죄부를 얻기 위해서는 죄를 사함받기 위한 일체의 다른 노력이 필요 없다. 그저 죄 사함의 은총을 "마음으로 믿고" 이로써 구원에 이르렀음을 "입으로 시인"하면 족하다. 한국의 개신교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11쪽)"라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이른바 '회개'를 위한 노력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동체적 검증 장치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죄의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무차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신앙의 이름으로 '살인 면허'를 발급하고 있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253쪽). 그러므로 이 책은 이러한 극단적 편의주의에 물든 구원론이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을 '문제'로 설정하여 신학적·비평적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으로서의 신학'의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례로 읽힐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메가처치 논박> / 신광은 지음 / 정연 펴냄 / 357면 / 1만 5000원

저자는 책의 2부와 3부에서 각각 칼뱅주의의 주요 교리(T.U.L.I.P.)와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N.C.U.R.C.)의 내용을 소개하고, 각각의 교리가 형성된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모두 각각의 교리가 태동하게 된 역사적 교훈을 따라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오늘날 한국에서와 같은 '윤리적 패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220쪽).

그러므로 저자는 문제가 교리들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맥락을 떠난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즈주의의 '최악의 조합'이 개신교회의 구원론을 대체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책의 백미는 저자가 '아르뱅주의'라는 용어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구원론의 문제점을 분석해 내고 있는 4부 '한국교회의 면죄부, 아르뱅주의'이다. 그는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이나 크레이그 블룸버그(Craig Blomberg) 등이 사용한 '칼미니즘(Calminism)'이라는 용어에서 영감을 얻어 '아르뱅주의'라는 신조어를 주조하였는데, '칼미니즘'이 두 교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제3의 길로서의 혼합을 지칭하는 용어라면, '아르뱅주의'는 두 교리의 최악의 조합을 지칭함으로써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비평적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지닌다(221쪽).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의 최악의 조합인 '아르뱅주의'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각각의 역사적 교리가 모두 유지하려고 했던 '변증법적 긴장'을 제거하고(246쪽), 칭의와 성화를 별개의 사건으로 봄으로써 '성화의 실종'에 기여하며(251쪽), 이로써 '현실 긍정의 이데올로기(253쪽)'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르뱅주의'에 물든 한국의 개신교회는 "야훼 종교의 특징인 예언자적 상상력이 질식된 현실 체제 긍정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여 "기득권자들에게 아부하고 아첨하기에 바쁜(257쪽)" 타락한 종교의 전형성을 지니게 된다고 말한다.

한편,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아르뱅주의'가 한국 개신교회의 타락한 구원론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1940년대를 전후로 미국에서 출현한 '신복음주의' 운동의 지속적인 영향력이 있었다(267쪽).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의 대중 전도 집회로 대표되는 미국의 신복음주의 운동은 이전까지의 근본주의적 신학과 적절한 거리두기를 통해 온건하고 중도적인 입장의 복음주의 운동을 전개해 왔다.

1960~1970년대를 전후로 대중 전도 집회와 복음주의 학생 선교 운동 등이 결합된 형태의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국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은 선교 단체들을 중심으로 학생 선교 운동, 초대형 대중 집회 운동, 복음주의 문서 선교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문제는 이들 신복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단체와 교회의 지도자들 기독교의 본질을 '자기 영혼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일차적으로 국한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구원에 있어 (타자와의 관계에 따른 책임이 배제된) '개인의 결단'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는 데 있다.

1980년대 한국의 신복음주의 교회 개척 운동을 이끌며 급속한 교회 성장을 이룬 이른바 '복음주의 4인방'의 성공은 교회 성장에 있어 '영혼 구원'과 '개인의 결단'에 대한 강조가 지니고 있는 '실용성'에 주목함으로써 점차 '탈신학화'의 길을 걸어갔다(274쪽).

다시 말해, 이들 탈신학화된 신복음주의자들에게는 "칼뱅주의냐 아르미니우스주의냐 하는 문제로 입씨름을 하느니, 차라리 밖에 나가서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는 것이 더 낫다(275쪽)"는 생각이 지배적 정서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탈신학화의 경향은 1990년대 이후 후발 대형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개신교 전반에 걸쳐 '메가처치 현상'이 자리 잡게 된 배경이 되고, '아르뱅주의'라는 왜곡된 신학이 태동하는 온실이 되어 왔다고 저자는 본다.

5부 이하에서 저자는 '아르뱅주의'를 통해 현실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대안' 모색에 나선다. 이를 위해 저자는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버린 우물(298쪽)"이 있음을 지적한다. 즉, 기독교신학이 지난 2천 년 동안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 되기도 한 반면, 그 안에 갇혀 '무덤'이 되기도 한 역사신학적 계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우물'들을 2~3세기의 그리스 철학,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그리고 16세기의 루터의 칭의론에서 찾고 있다. 각각의 주제들이 별도의 신학적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나는 특히 그가 '그리스 철학'을 '우물'로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학의 소위 근본적인 '왜곡'의 계기가 여기에서 마련되었다고 보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아르뱅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제3의 길'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방법론에 대한 근원적 문제 제기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모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모두 그리스철학의 '존재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314쪽). 그 때문에 이들은 모두 성서를 '명사화'시키고, '실체화'시켜서 결국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를 이렇듯 존재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를 따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명사적 개념화와 과정을 중시하는 그리스 철학의 논리적 추론과정을 따르는 동안 성서(의 언어)가 지닌 비명사적 역동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관점에 입각한 신학은 결국 "자기중심적 전제로부터 자기중심적인 논리 체계를 만들어 내는(327쪽)" 독백적 자기의식의 강화에 다름 아니고, 이로써 "진리라는 이름의 폭력과 인식론적 제국주의(345쪽)"를 정당화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아르뱅주의'에 대한 강조 못지않게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논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굳이 덧붙이자면, 그리스철학에 대한 이러한 저자의 비판적 관점이 이 책 전체의 관점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부분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교회의 왜곡된 구원론의 개혁이라는 급박함에 따른 '대중 신학'을 표방하는 이 책의 성격 때문일 텐데, 존재론적 본질주의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 보이는 저자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적지 않은 곳에서 초대교회와 성서적 '원형'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즉, 왜곡된 '아르뱅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마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어딘가'가 이미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교회 개혁가들을 위한) 또 다른 '인식론적 제국주의'에 봉사할 우려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이 지닌 훌륭한 비평적 가치를 더하기 위하여 '바른 신학', '올바른 복음' '그릇된 신학', '왜곡된 복음' 따위의 본질주의적 언어의 사용은 되도록 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서의 저자의 비평적 개입은 구체적인 대안 없이도 이미 충분히 '대안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신광은 목사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는 '지금' 한국교회 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대중적 구원론을 문제로 삼아 비평적 개입을 시도한 드문 역작이다. 더욱이 지역 교회 목회자로서 신학적 비평을 수행하는 저자의 '목사-신학자'로서의 정체성은 '아르뱅주의'의 유통의 주역인 지역 교회 목사들에게 지적 자극이 되기에 충분하다.

신학적 사유와 현실에 대한 비평적 개입은 신학대학에 소속된 '전문 신학자'의 특권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럴 때 비판은 특권이 되고, 비평은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용어에 이어 '아르뱅주의'라는 시대를 통찰하는 또 하나의 비평적 용어를 통해 한국교회의 현실을 분석하는 저자의 선구적 노력이 더 많은 '목사-신학자'들의 비평적 개입으로 교회 개혁의 활성화에 기여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홍정호 /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연세대학교대학원 박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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