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이 말하는 대환난의 진실> / 윌리엄 R. 킴볼 지음 / 김재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88쪽 / 1만 3000원

본서의 논제는 감람산 예언(마 24장, 막 13장, 눅 21장)의 주된 메시지가 주후 70년에 행해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말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본서를 통해 이 예언을 종말의 여러 가지 심각한 징조들(미래적 해석 그리고 세대주의적 해석)로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의 오류를 지적한다. 본서는 예수의 재림과 관련하여 나타날 것으로 주장되었던 다양한 대환난과 예루살렘의 회복과 같은 중요한 주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단언컨대' 본서는 모든 종말론적 예언의 미래적 국면을 전면적으로 부인한다기보다는 이 예언(의 대부분)을 주후 70년에 행해진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하여 과거적으로 풀어 나간다.

이 감람산 예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나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내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일련의 (예언의) 말씀들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해석이 본문 자체보다도 본문에 대한 해석자들의 선입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예언에 대한 바른 해석은 원래의 문맥과 역사적 성취의 측면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즉 감람산 예언은 그 효력을 다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예수 자신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성전을 대체한다)과 불순종으로 일관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예언은 재림의 징조에 대한 시간적으로 나눠진 '충격적인' 시나리오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예언은 예루살렘(성전)의 임박한 멸망을 말해주는 징조들을 제공해 줄 뿐이다.

본서의 중요성은 예수의 감람 예언의 내용을 조목조목 주석과 같이 세부적으로 풀어 주면서 종말의 징조로 해석하는 입장을 반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1)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고: 거짓 예언자들의 등장이 종말의 징조가 될 수 있을까? 이미 예수 이후 시대에도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의 등장을 찾아볼 수 있다.

2) 전쟁과 전쟁의 소문: 예수와 그 이후 시대가 평화의 시대였던가? 아니다. 로마 기록을 보더라도 예루살렘 멸망 이전 시대에도 국지적으로 지속적으로 전쟁이 로마제국 내에 있었다.

3) 기근, 전염병, 지진: 이것도 로마제국 내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것들이 종말의 징조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개시를 알리는 해산의 진통'으로 여겨야 한다(44쪽).

4) 박해와 거짓 예언자들: 박해도 종말의 징조가 될 수 없다.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이전에도 이미 많은 박해가 있었다.

5)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 이것은 다니엘서의 예언을 인용한 것으로 예루살렘에 이교 우상이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곳(성전 혹은 예루살렘 성내)이 파괴된 이후에는 이러한 예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한 이후로 두 번째다. 이것에 대한 미래적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제3성전)이 건축되고 이교도의 악행이 재개될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멸을 예언하신 예수의 말("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막 13:2)과, 교회로 대체될 것에 대한 말씀과 매우 대치된다.

6) 피신 계획: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선 것을 본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대한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살아남기 위해 주저하지 말고 도피할 것이며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실제로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도피할 수 있는 신비한 기회가 주어졌다.

7) 대환난: 도대체 얼마나 큰 환난이었을까? 큰 것의 정도는 당시 사람들이 고난을 얼마나 크게 느꼈을까 하는 정도 차이일 것이다. 예수의 말은 '환난의 정도(혹은 규모)라기보다는 환난의 성격을 말하는 것' 같다(91쪽).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재앙만큼 큰 환난이 있을까? 하나님이 자기가 거하는 성전과 도시와 나라와 그 백성을 몰아내시는 환난 이상으로 더 큰 환난이 어디에 있을까?

8)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 우리는 이때의 상황에 대한 생생한 증거를 요세푸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9)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때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 지경이 파괴는 것에 그친 게 아니라, 유대인들이 다시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이 배척당하고 이방인들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돌이키실 때가 올 것이다. 이것은 교회로 말미암아 가능할 것이 결국 복과 충만함으로 이를 것이다.

10) 은밀한 미래: 저자는 이 예언을 통하여 예수의 재림은 '아버지만 아시는 비밀'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예상하듯이 많은 징조와 환난을 통하여 미리 짐작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준다.

11) 우주적 재앙: 이 부분은 문자적 이해보다는 상징적-비유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에 임하는 재앙이 우주적인 재앙과 견주어 언급된 것은 구약 예언서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2) 인자가 오심: 이것은 다만 이스라엘에 임한 그리스도의 권능과 심판의 임재를 의미하는가? 저자는 '그때에'를 의미하는 표현이 감람산 예언의 중대한 분기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감람 예언의 중요한 예언(예루살렘의 멸망)에서 부차적인 예수 재림 부분으로의 전환으로 이해한다. 즉 저자는 이 예언이 곧 임할 이스라엘의 재난, 그 후에 일어날 장기적인 열국의 시대(동요와 불안을 수반하는), 마지막으로 권능과 영광으로 임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믿는다(186쪽).

13) 무화과나무의 징조: 무화과나무는 국가적 이스라엘의 창건을 의미하는가? 어떤 학자들은 무화과나무가 결코 이스라엘과 동일시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무화과나무 비유가 예루살렘 멸망의 전주로 작용했을 뿐이라고 이해한다. 이 일은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발생할 일이다.

14) 하나님나라의 임재: 저자는 이 표현을 기독교에 대한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의 영향력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보았다(211쪽).

15) 아무도 모르는 그날: 정작 예수는 종말의 때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때는 징조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장을 하건만, 정작 예수는 아버지만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오히려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다. 모두들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살아가던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은 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예수의 재림을 위하여 깨어 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제시해 준다. 저자는 그것을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교회가 당해 왔던 시련 가운데 지금은 풍요의 시련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편안하고 안락한 시대에 예수의 재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사실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인 장차 임할 예루살렘의 멸망과 훨씬 더 미래에 올 예수의 재림에 대한 구분과 논의 자체가 매우 탁월하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종말 예언에 대한 중요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요즘 들불처럼 번지는 백투예루살렘이나 제삼성전에 대한 성경적인 반론의 여지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종말의 때는 환란과 기근의 때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과 기근이라는 신자들을 긴장하고 떨게 만드는 시기들이 아니라, 풍요와 번영의 시대에 임한다는 저자의 결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나태해지고 믿음이 없으며 타락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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