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설과 적용, 두 마리의 토끼를 잡다

"살다 살다, 이런 장르의 책도 나오는군."

▲ <한국교회, 예레미야에게 길을 묻다> / 김광남 지음 / 아바서원 펴냄 / 304쪽 / 1만 4000원

서평자가 이 책을 보고 처음 한 말이다. 아바서원의 전 편집자가 던진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본서를 읽고 또 읽다 보니, 부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공감이 되기도 하는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하였다. 지금까지 구약 예언서를 갖고 한국교회의 부패와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책들은 종종 있었지만, 소위 '학자'가 아닌, 평신도 신학자의 창의적 성경 주해서라니… 저자는 예레미야서의 내용과 신학은 살리면서도 전통적인 해설서가 갖고 있는 일반 독자들을 힘들게 하는 '넘어서기 힘든 벽들'을 과감하게 제거하였고 예레미야와 땅콩(저자) 사이에서 행해진 가상 대화를 통하여 본문의 원래 메시지와 현재의 상황적 필요성의 가교를 놓았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고민하던 중 구약 예언서를 통하여 문제의 유사성을 발견하였고 또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았기에 이와 같은 '강해서'를 쓰게 되었다고 서문에 저술 이유를 밝히고 있다(9쪽).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교회 타락의 중요한 원인이 잘못된 설교와 지나치게 순진한 신자들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잘못 뿌리면 잘못된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씨앗을 뿌리면 언젠가는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예레미야가 땅콩 선생의 요청으로 서울을 나흘간 방문하여 초청자와 몇 차례 진지하게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이 대화 형식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중간 중간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넣어서 저자 혹은 예레미야 자신의 논증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실제로 예레미야가 우리 앞에서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본문을 더 생동감 있게 읽도록 만든다. 비록 본서가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몇 가지 주제들을 다루긴 하지만, 예레미야가 살았던 사역의 몇 시기를 중심으로 행해진 대화가 큰 뼈대다. 책을 읽어 보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신기하게도 예레미야의 사역의 각 단계와 한국교회의 특정한 상황과 잘 어울린다! 첫째로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했던 요시아 시대의 사역은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남산의 한 카페에서, 둘째로 여호야김 시대의 사역을 논할 때는 어느 대형 교회의 지붕에서, 시드기야 시대의 말씀 사역에 관해서는 서울 근교 한 대형 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에서, 마지막으로 이집트로 끌려가 지내던 시기에는 예배당 없이 고등학교 강당에서 모이는 교회에서 나눈 대화로 이루어져있다.

수도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남산의 한 카페에서

대화는 야경이 아름답지만, 고통이 가득한 서울 야경 가운데서 시작한다. 이날 행해진 그들의 대화는 주로 다음과 같다. 예언이란 무엇인가, 예레미야의 인적 사항, 아나돗에 살게 된 배경, 성장 배경이 예레미야의 설교 사역에 끼친 영향, 그리고 예레미야의 요시아 왕 때의 사역의 동기와 배경을 다룬다. 여기서 잠간, 비록 예레미야가 언제 설교 사역을 시작했는지, 즉 요시아 왕 때인지, 아니면 요시아 왕 사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저자는 나름 호소력 있게, 그러한 입장을 극적(劇的)으로 묘사한다. 이후에 예레미야의 설교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가를 다룬다.

완전한 심판인가, 조건부 심판인가? 당시에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했는가? 과연 예언자는 타락한 유다 백성 앞에서 회개를 외쳤는가? 회개는 가능하다고 보았는가? 유다가 범한 중대한 범죄들은 무엇이었는가? 유다의 타락과 제사장들과의 상관관계, 바알 신 등과 관련된 혼합주의적 예배, 불의한 예물과 십일조, 회개를 전제로 한, 철회되고 유보될 수 있는 조건부 심판론, 유다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고, 중보 기도의 금지, 요시아 개혁의 성공과 예레미야 사역의 중단. 이 단락에서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저자는 예레미야가 요시아 왕 때 설교 사역을 시작하였지만, 요시아를 만나지도 않았으며, 또한 요시아의 개혁이 시작되자마자 그의 사역을 중단하였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러한 입장을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이 단락에서 저자는 한국교회의 타락의 실상을 파악하고 진정한 회개를 할 것과,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 정책과 관련하여) '세우는' 한국교회 개혁의 측면에서 강제력이 아니라, 대화와 설득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어느 대형 교회의 지붕에서

이들의 대화는 마치 예루살렘 성전의 지붕에서 행해지는 것 같았다. 이때 나눈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호야김 시대의 배경, 리더십이나 신앙심의 부재한, 어리석고 욕심으로 가득한, 왕의 자격 없이 외세에 의해 세워진 왕, 우상숭배를 재도입하고 백성을 타락시킨 왕, 요시아 개혁의 실패의 원인들, 즉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와 제물 바치는 데만 골몰하고 삶을 등한히 여기는 모순, 그리고 우상숭배와 같이 제거하기 어려운 내재적 악들, 그래서 예레미야는 성전 앞으로 가서 성전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이 아니다!)을 허물기 위한 노력을 행한다. 이에 따른 핍박과 투옥, 요시아의 개혁에 대한 세부적 논의-율법이란 무엇인가?-, 즉 도덕법에 대한 준수는 없고 오직 제의법에 대한 강화만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예레미야가 설교 사역을 재개한 이유가 되었다.

이에 대한 기득권층의 지도자들의 반응은 핍박과 무시였고, 그들의 생각은 무슨 잘못을 행해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온의 불가침성'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한 헛된 믿음에 근거한 청중은 예언자들에게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 심각한 수술이 필요한 상황, 진정한 '힐링'은 현실에 대한 직시와 질병의 심각성을 깨닫는 데서 비롯된다.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예레미야가 겪은 고난,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심리적 고통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고통, 왕에 대한 비난과 투옥, 말씀을 기록하고 낭독하는 일, 편집자의 역할, 회개하지 않는 유다.

이 단락에서 저자는 예레미야와 땅콩 선생의 가상 대화를 통하여 (1) 종교개혁이란 단순히 예배의 개혁뿐만 아니라, 삶에서의 진정한 변화도 포함하는 것, (2) 우리가 성전이라고 부르는 예배당은 사실은 성전이 아니라는 점, (3)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허다한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윤리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계신다는 점, 그리고 (4) 우리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과 타락의 상처가 매우 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서울 근교 한 대형 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에서

이 단락에서는 기도의 중요성을 다룬다. 바벨론 제국에 대항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는 안전, 느부갓네살과 주의 종, 바벨론에 대항하려는 국제적 모반 계획에 대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종에게 대항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설교하다, 포로 시대가 곧 끝날 것이라는 거짓 예언자들과의 대결, 포로 가운데서 유다 백성을 보존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 현실에 대한 수용과 인내, 위로의 책이 주는 회복의 메시지, 시드기야의 반역에 따른 바벨론의 징벌, 징벌 뒤에 회복하시는 사랑의 충만한 하나님의 계획, 구조악의 문제와 정의의 수행,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너를 바꿔라"는 말은 기만이다(217쪽), 오히려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하라, 심판 이후의 구원과 회복, 의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함, 새로운 언약의 체결, 회복의 상징으로서 땅을 매입함, 포로 생활이 오히려 축복이다, 심판에 대한 우리의 자세-심판의 인정, 심판의 고통을 감내, 심판의 해소를 위한 간구-, 애국과 매국 사이, 민족의 몰락 가운데 나타난 개인의 구원, 총체적인 파괴-왕조의 몰락, 수도의 몰락, 성전의 몰락-,

이 단락에서 저자는 (1) 자고로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가장 심각한 악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사회악'이라는 점을 인식할 것-구조 악을 해결하지 않은 채, 개인의 성결을 요구하는 것은 '초등학생에게 거대한 조폭 집단'과 대결하기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211쪽)-, 그리고 (2)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한 사역을 행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예배당 없이 고등학교 강당에서 모이는 교회에서

마지막 단락은 유다가 멸망한 후의 일들에 대한 논의다. 교회 건물 유지를 위하여 재정을 사용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가난에 대처하는 교회의 대안, 교회의 대형화란 시장 싸움에서 승리한 것일 뿐이다, 고통 받던 가난한 자들의 '횡재', 그달랴의 치적과 반란 세력들의 오해, 하나님의 심판의 거부로서의 이집트행, 도피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예레미야 예언자의 실패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함 등.

이 단락에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한국교회가 교회 건물을 키우고 헛된 욕심과 꿈을 키우는 데 몰두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불의에 눈을 뜨고 그러한 부조리를 외치고 정의를 수행하는 예언자의 삶을 따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통과 소망 가운데 살았다. 즉 그는 자신의 조국 유다가 처한 상황들을 도외시하거나 자신의 유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으며, 그러한 좌절의 순간들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당대의 거짓과 불의에 저항하였으며 멸망과 관련하여 회개와 각성을 외쳤다. 사람들은 진리를 설파하는 자들을 위협하거나 왜곡하거나 감추는 방식으로, 그리고 혼합주의 종교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열심, 혹은 외교술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와 같이 우리에게는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점들과 대결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다. 그러한 면에서 예레미야와의 대화는 예레미야서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했으며 우리에게 한국교회를 위한 수고와 노력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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