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교우들의 가족 관계를 살펴보노라면 약간 과장하여 거의 대부분의 교우들은 그 일가친척 가운데 목회자가 한두 명은 있다. 심지어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분들하고 이야기를 해 보아도 일가친척 중에 목회자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이 넘쳐 나는 시대를 맞이했다. 타락의 극치를 달렸던 중세 암흑시대에도 성직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고 하더니,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과 목회자들의 과잉 공급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교회에 목회자들이 과잉 공급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건전하지 못한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있을 것이다. 즉 평신도로 세상적인(secular) 일을 하는 것보다, 목회자가 되어 거룩한(sacred)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비성경적인 생각이다. 이미 16세기 종교개혁 때 직업 소명론을 통해 종교적인 업무가 아닌 일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명임을 간파했건만, 한국 크리스천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더 심각하게는 목회자들의 설교 속에, 직업이란 그저 입에 풀칠하기 위한 저급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목사가 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세상의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성경적 관점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하겠다. 사실 성경은 어떤 직업을 가지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더 중요하게 본다. 그래서 제사장이라는 성직을 가졌지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결코 거룩한 자들이었다고 할 수 없다. 반면 왕이라는 세속적 직업을 가졌지만 다윗은 성실하게 왕의 직무를 다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에 목회자의 과잉 공급을 가져온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아들을 목사로 바치겠다고 하는 서원 때문이다. 이러한 서원은 앞에서 지적한 잘못된 이원론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서원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서원은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사사기의 입다처럼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자신의 아들을 목회자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 번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켜야 한다는 말씀에 이끌려 목회자가 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외적소명(外的召命)의 확인도 없이 목회자가 되는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아들을 목회자로 바치겠다고 하는 부모의 서원은 월권적이다. 아들의 인생은 아들에게 있는 것이지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마치 아들이 자신의 소유물인 양 목회자로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른 서원이란 아들이 목회자가 되기로 결정한다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서원일 뿐이다. 아들이 목회자의 길로 가는 여부는 부모가 강제할 것도 아니고, 서원이라는 굴레를 씌워 정신적으로 아들의 삶을 제대로 된 고민이 없이 목회자의 길로 가게 할 것도 아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내적소명(內的召命)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그리고 여러 가지 조건들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는 외적소명이 동반되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여성과 결혼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같다는 내적인 확신이 든다고 하여서 그 여성과 결혼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혼을 하려면 그 상대 여성으로부터의 동의도 얻어야 하는 것처럼,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는 서원이나 내적소원만으로는 목회자의 길로 가야 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목회자로서 서원을 하였는데 그 길로 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사고가 생길 때마다 서원을 지키지 않아서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잘못 서원한 것을 충분히 이해하신다. 우리가 잘못 기도할 때 하나님은 충분히 이해하시고 우리가 기도한 잘못된 기도대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한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가 잘못 서원한 것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다른 길로 주님을 섬기는 모습에 축복으로 함께 하신다.

만일 오래 전에 아들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으로 서원을 하였다면, 이제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 예전에는 잘 모르고 아들을 목회자로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여전히 제 마음은 하나님께 열려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내적소명과 외적소명을 통하여 제 아들을 목회자로 부르신다면, 저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며 받아들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만일 어떤 고통 가운데서 기도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은사를 확인함도 없이 목사가 되기로 서원하였다면, 이제라도 다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 예전에 제가 성급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다급해서 제가 과연 하나님께서 어떤 길로 가기를 원하시는지 세심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제 욕심을 채우고자 서원을 했습니다. 이기적이고 욕심으로 가득 찬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전히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의 길로 가기를 원하신다면 제게 확실한 내적소명과 외적소명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만일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제게 어떤 길을 인도하시든지 신실하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진지한 고민도 없이 단지 서원을 하였고 그 서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신실함이 없이 그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제사장이 된 홉니와 비느하스가 결국 제사를 폄훼하였던 것처럼, 그저 목사의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혹은 부모님의 서원 때문에 목사가 되어 한국교회의 타락을 부추기는 자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내가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더 중요하게 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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