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얼굴의 예수> / 김용민 지음 / 동녘 펴냄 / 217면 / 1만 3000원

김용민의 다작은 못 말리겠다. 나꼼수 때도 김어준과 주진우에게 왜 이렇게 많이 쓰냐고 핀잔(?)을 듣곤 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굉장히 바빠 보이는데도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이 살찐 건 이해가 가는데, 왜 살이 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엄청난 성실함으로 무장한 김용민이 이번엔 성서에 대한 책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작년에 설립된 벙커1교회에서 김용민은 꾸준히 설교해 왔다. <맨얼굴의 예수>는 벙커1교회에서 마가복음을 본문으로 한 설교를 더 확장하고 다듬어서 낸 것으로 보인다. 책은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글의 분량과 구조, 흐름을 볼 때 설교문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수많은 목사들의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강해 설교의 패턴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보통 설교의 목적은 성도들의 믿음을 독려하고 더 키워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설교자(목사)들의 어조와 내용은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님에도 성도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강박은 결국 관념적으로 치닫거나, 심히 기복적인 갈구함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용민은 확신이 아닌 회의에서 출발해야 비로소 바르게 믿을 수 있노라고 말한다.

무조건 '성서무오설'을 강하게 주장하고 견지해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도 우리는 자꾸 관념적 신앙의 가장 안전하기 만한 고백의 선 안에서만 웅크리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 허락하신 귀한 선물인 '이성'을 통한 합리적인 사유와 회의를 거치지 않은 신앙 고백은 베껴 쓴 답안지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공부하면서 예수를 믿자고 말하고 싶다. 많은 이들은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성과 양심을 주었는지 고찰하지 않고, 덮어놓고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오직 예수'. 그들이 오용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성찰 없는 '오직 예수'가 숱한 종교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그들에게는 관심 밖 사안이다. 신학, 역사, 철학, 문학 등 특히 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모든 낱말들에 직면해야 한다. 선대 연구가들의 고민이 나의 생각보다 깊지 않다면 그 이론을 외면해도 된다. 그러나 어디 그러한가.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줄 안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구도자의 길을 걷고 또 걷다가 그 끝에서 예수를 만났다." (213쪽)

오히려 회의와 의심을 직면한 성서 읽기가 더 강한 뿌리를 내리게 하고, 저자의 의도가 유실되지 않은 성경의 참 증언을 주목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성서를 정직하게 읽는다면, 최초의 의심은 결국 성서의 메시지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성서 비평을 통과한 마가복음이 여러 가지 의심을 받고 있음에도 김용민이 마가복음을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가 참으로 적절하다.

"마가의 복음서에는 쟁점이 될 수 있는 예수의 이적도 적지 않다. 부분적으로 가필의 흔적도 역력하다. 그러나 저간의 흐름에서 보면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에 방점이 있다. 패배이자 멸망으로 규정될 예수의 죽음의 과정을 누구보다도 상세히 그린 마가는, 그의 죽음이 실은 승리이자 생명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의 눈에 비친 예수는 가난하고 못 배우고 연약한 이들을 치유하고 다독였으며, 그들의 비극적 최후까지 함께한 친구이기도 했다. 마가의 생각과 내 시각이 공유되는 지점이다." (16쪽)

책 전반의 내용 흐름 편집은 기독교와 성서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염두에 두고 친절하게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0장의 부자에 대한 본문 뒤에 '여기서 잠깐'이라는 소제목을 빌려 돈과 부에 관련한 구절이라 할 수 있는 마태복음 6장을 다룬다. 그렇게 해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는 예수의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통해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성서의 돈과 부에 대한 분명한 경고를 착실히 전해 준다.

이 책의 또 하나의 강점은 김용민의 풍부한 인문학적 시각과 성서 텍스트를 현안과 예리하게 연결한 것이다. 저명한 시사평론가로도 활동했던 이력과 나꼼수에 이어 현재 국민TV PD까지 쉬지 않고 현안들과 밀착해 살아왔기에 관념에만 머무르는 빈약한 적용의 설교문을 거뜬히 뛰어넘는다. 거기에 다양하고 풍부하게 축적된 인문학적 독서뿐만 아니라 성서학 관련 독서도 나름 충실히 이행했다. 그렇게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 비유, 기적들을 인문학적, 신학적으로 기본적인 탐구를 함으로 독자들이 역사적 예수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돕는다.

사실 김용민은 신학자도 아니고 전통적인 목회자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학 등에 있어서 전문적인 요구를 할 수 없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그 한계는 김용민의 또 다른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김용민만의 가능성이 아니라 한국교회 모든 성도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 신학은 고유의 신학 언어로 표현될 때 가장 적절하고 의미와 해석의 낭비가 최소화된다.

그러나 신학이 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계속해서 진리와 양심의 나침반을 상실한 채 살아가야 한다. 이런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중의 언어로 신학이 이야기되어져야 한다. 그래도 요즘은 한국의 신학자들도 논문과 전문 서적에만 집중하지 않고 일반 성도들을 위한 서적도 점차 많이 출간하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신학과 주석, 설교의 언어도 우리에게 너무 소중하다. 거기에 더해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언어와 이야기의 장은 '담론'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맨얼굴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담론으로서 훌륭한 실례가 되어 준다. 늘 실체 없는 축복의 언어와 과시적인 기도 행위로 가득한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가 아닌, 일상의 담론이 회복되는 기독교, 집과 회사와 거리와 공동체의 기독교를 꿈꿔야 한다. 마음껏 회의하고 의심해도 넉넉히 용납되는 공동체의 성서 담론이 풍성해졌을 때, 고목과도 같은 한국교회의 가지에 새싹이 돋아 푸르러지고, 열매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성서는 휘청거리는 한국 사회를 향해 들려줄 메시지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누군가는 그냥 외면해 버리고, 누군가는 주저하다가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누군가는 자신이 보고 싶은 메시지만 보았을 뿐이었다. 저자의 의도와 맥락을 면밀히 살피는 정성 어린 성서 읽기와 그에 따른 적용과 행동이 보장될 때 한국 사회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교회를 통해 꽃 피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 희망은 멀고도 아득해 보이지만,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하는 게 정의인 시대,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다시 말해 촌에서 자란 블루칼라 청년이 로마 제국과 그 끄나풀의 절대 권력 앞에 굴하지 않고, 무기와 재력 또 세력이 아닌 평화의 이름으로 싸워 이기는 이 위대한 반전극이 허구요, 가식이라면 이것만큼 절망적인 게 없다. 신앙에 앞서 의지적으로라도 의지하고 싶은 게 바로 부활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 또 다른 지배와 착취, 정복의 언어로 오염되고 있다. 너무나 큰 회한과 분노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예수는 누군가에게 규정됐을 돌팔이 의사, 사채업자, 전쟁광이 아니다. 예수와 그의 부활을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종교와 문명, 정치 이데올로기에 가두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예수가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하고 사랑했던 약자의 품에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게 복음 아니겠는가."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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